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cats Apr 13. 2016

레로-로

철학을 읽는 시간을 읽고

     매주 일요일 밤, 개그콘서트가 끝나는 드럼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월요일이 왔음을 자각하고 슬퍼한다. 하지만 괜찮아.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하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그 무리에서 포함되지 않는다. 일요일 11시 20분에 올라오는 '신의 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탑은 최근 휴재 중이다.  이 사실을 잊은 채 나는 습관대로 신의 탑을 확인하다가 잠시 고민했다. 연재가 시작되는 4월 18일까지 나는 슬퍼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야 하나? 그럴 순 없다고 애써 부정하며 정주행을 고민했다. 그것도 귀찮다. 이 공허한 시간을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재밌었던 부분을 보는 것으로 타협하고 몇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그때 내 눈에 '레로-로'가 언뜻 스쳐지나갔다.  

    레로-로는 신의탑에서 나오는 시험감독관이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단어의 앞글자만 따서 줄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레로-로'를 보고 '(레)토릭(로)직-(로)직'이 떠올랐다. 생각은 레토릭과 로직으로 표현은 로직을 빼나? 레토릭과 로직으로 시작해서 로직으로 끝내라?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는가 고민해보니 최근에 읽었던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나왔던 내용이었다.


    독서모임에서 미션 도서로 선정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철학자 강신주씨가 쓴 책이다. 이 책은 내가 빠져 있는 세상을 망치로 두드려줬다. 두드림에 충격을 받아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나는 이런 현상을 '프레임 브레이킹'이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이 있냐고 묻곤한다. 평소에 믿고 있는 프레임이 깨지고 다시 쌓이면서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다. 이런 깨짐 중 내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논리와 수사학이다. 

    나는 처음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수사학을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사학이라기 보다는 맞는 말은 곧이 곧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정당당하기 위해 아첨이나 곡학아세를 하면 안된다고 했다. 맞는 것은 맞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생각했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 P.206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지향했던 논리의 궁극적 목적은 대화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있지 않았을까? 불행히도 논리적인 논증만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상대방은 논리의 힘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간과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 

     위 문장은 말할 때 정의와 당당함 그리고 솔직함이 극단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를 망치로 깨부셨다. 상대방이 듣기 싫은 소리라도 해야하는 말은 꼭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당당함의 인문학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대화는 두명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혼자서 이야기하는 것은 독백이고, 혼자있다면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대화는 단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므로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

대화(dialog)는 '둘'을 의미하는 다이아(dia)라는 말과 '말'이나 '논리'를 의미하는 로고스(logos)로 구성된 단어이다. 그렇지만 자신으 주장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고 한다면, 대화가 함축하는 '다이아'의 정신은 사라지고 '모노(mono)'라는 유아론적 정신만이 남은 모놀로그(monologue)가 될 것이다.

    난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감정 표현과 논리/레토릭에 관한 의견이 달랐다. 이에 대해 술자리에서 친구와 재밌는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좋아할 때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더라도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상대방이 받아들일 만큼 표현해야 할까? 친구는 전자를 택했고 나는 후자를 택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물론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의 의견이 일관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의견과 로직과 레토릭에 관한 것에 대한 의견에서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레임이 깨지면서 반성했다. 그리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때 그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가지 않도록 받아들일만큼 이야기 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타인에게 말할 때는 상대방이 알아먹도록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친구야 미안하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 P.205

논리학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수사학은 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중점을 둔다.

    물론, 논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 다른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설득하는데 중점을 두냐 많은 사람을 설득하는 데 중점을 두냐의 차이다. 논리는 논문과 같이 글로 남겨 보편적인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중점을 두는 것이고 수사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설득하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는 있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설득시킬 수 없다면 슬픈 일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생각은 논리적으로 말은 수사적으로 해야한다. 안에서는 논리 밖에서는 수사다. 상대방의 상황과 표정,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야 한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과의 대화는 언제나 재밌다. 생각이 다르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대화는 재밌다. 많은 사람들이 수사학과 논리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심독, 주기적인 인풋&아웃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