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에 빛이 들어오는 호사에 관하여
비싸고 좋은 집을 가르는 기준은 여러가지지만 중요한 한가지는 바로 빛이다. 빛이 가득 들어오는 집은 좋은 집이다. 한국에서는 남향집을 대대로 좋은 집이라고 여겨왔고 이는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몇년전 서구권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며, 북유럽에서는 오히려 북향집이 인기가 많다는 취지의 기사를 읽기도 했다. 확실히, 남향집이라고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가 너무 강하게 들어온다며 하루종일 블라인드를 치고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결국 해를 다 막고 살거라면 남향집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 햇살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슬프다. 직업이 사진가라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노릇노릇한 햇살이 집안으로 들어왔으면, 묘하게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었으면. 그런 작은 소망이 있었다.
8평의 신혼집에 그런 호사가 허락될리 없었다. 우리의 집은 북향이고, 건너편에는 우리보다 높은 건물이 있다. 북유럽에서 북향집을 선호한다곤 하지만 그 기사에는 집이 ‘10층 이상’일 경우라는 단서를 달았다. 우리집은 그렇게 높지가 않다. 물론 반대편에 들어오는 햇살이 반사되어 간접적으로 빛이 들어오기에 낮에도 어둡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직사광선이 아쉬웠다. 하루종일이라면 싫겠지만 잠시라도 태양과 우리 사이에 아무 장애물이 없으면 좋겠다. 샛노란 그 광선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싶다. 그런 나에게 희망이 된 것은 계절의 변화. 봄이 오는 것이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 집에 들어온 우리. 나는 봄이나 여름이 되면 태양의 궤적이 바뀜으로 조금이라도 우리 창문이 태양과 일직선상이 되는 시기가 올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볼링 붐은 온다! 아니, 태양 빛은 온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3월초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출근해야하는 그녀를 깨우러 나 또한 잠시 눈을 떴는데 평소와 다른 빛이 창문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니 거기에 있었다. 동그란 태양이 비스듬히 우리 창문을 향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 옆 벽으로 길다란 빛이 내려 앉았다.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직사광선이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하늘이 내려준 기적처럼 나는 흥분해 그녀를 깨웠지만 그녀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월요일의 출근을 앞둔 직장인에게는 모세가 바다를 가르고 찾아온다고해도 기상해야된다는 현실을 위로해주진 못할테니까.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 이 한장의 사진을 찍었다. 예상한대로 해가 점차 떠오르면서 벽에 새겨진 태양은 서서히 지워져갔다. 문신처럼 이곳에 계속 머물러주기를 바랬건만 한 여름 바닷가의 헤나처럼 그렇게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렸다. 하지만 우리집에도 햇살이 비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서구권의 사람들은 햇살을 참 좋아한다. 도시에서는 공원에서, 해변에서는 모래사장 위에서, 다들 온 몸으로 햇살을 만끽하며 일광욕을 한다. 한국 사람들은 햇살을 좋아하는 듯 하면서 좋아하지 않는다. 햇살에 있는 것은 좋아하지만 타고 싶지 않아 온 몸을 다 가린다. 이른 아침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면 햇살이 따사로와 무척 기분이 좋은데, 사람들이 서둘러 버스의 커텐을 다 내려버려서 시무룩해졌다. 조금 눈이 부셔도 햇살을 느끼는 편이 더 좋은데, 이런 내가 한국에서는 마이너한 취향인 모양이다. 영화 <127시간>을 보면 동굴 속에 갇힌 주인공의 자리에 하루에 몇분 정도 햇살이 비출 때가 있고, 그는 온 몸을 내밀어 그 빛을 받는다. 그 마음을 나는 십분 이해하는 바이다. 봄이 지나고 또 여름이 오면 조금 더 많은 빛이 8평의 창문을 비추어 주기를 바란다. 조물주는 아니지만 외치고 싶다. 빛이여,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