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The world of us, 2015)
장애인, 성소주자, 여성, 아이. 다수, 전체의 가치가 우선하는 세계에서 이들은 쉽게 배제되는 약자들이다. 많은 영화들이 이들을 향해 카메라 렌즈를 향했다. 소외된 이들의 삶을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상황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이나 성격과 환경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이끌어온다. 그때 영화는 사소한 오락, 이야기를 뛰어넘어 특별하게 여겨졌던 이들의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이 된다. 동시에 소외되었던 이들을 ‘그들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야’ 로 대변되는 보편의 세계로 끌어안는 일이 된다. 영화가 세상을 향해 삶의 진실이 담긴 ‘착한 말’을 외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소외되었던 특정한 존재에게 여성, 아이와 같은 이름을 붙이며 소수자에게 보편의 지위를 부여할수록 카메라가 영화 속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은 심화된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가학적이다. 대상을 향해 카메라를 겨눠을 때, 관객은 대상을 향해 시선을 던질 수 있지만 대상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래 속성에 더해 상황과 인물을 바라보고, 언어를 활용하여 의미를 부여할수록 우리는 더 폭력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영화 밖 세계에서 한 텍스트가 내는 목소리가 옳은지 그른지 여부와는 다른 층위에 있다. 영화 속 세계, 그리고 그곳을 살아나가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문제이다. 영화가 내는 목소리가 아무리 선할지라도, 그 목소리가 명쾌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어질수록, 세계는 도식화된 구조로 포섭된다. 단독성을 갖고 살아 움직이던 사람은 캐릭터에 갇힌다.
‘착한 말’을 하려고 할수록 더 ‘착한 눈’을 포기하고 폭력적이 되어야 하는 딜레마. 그 앞에서 영화 <우리들>은 러닝타임 내내 우직하게 ‘착한 눈’을 고집한다.
[우리들]의 착한 눈
- 한 사람을 향한 성실한 사랑의 형식-
11살 아이, 초등학교 빈부격차, 왕따, 영어학원과 같은 기호들은 우리를 유혹한다. 이들은 카메라 뒤에 있는 우리가 그녀의 상황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관객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선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사회구조,교육,계급과 같은 단어가 포함된 ‘착한 말’을 하기 좋은 요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를 거부한다. 오로지 이선에게 집중한다. 러닝타임 내내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이선을 유심히 관찰한다. 집요하게 이선의 얼굴을 살핀다. 그녀의 바람인‘친구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온 신경을 쏟는다. [우리들]은 아이를 두고 다른 영화들이 의례 음악이나 편집을 활용해 행하는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온 가족이 황급히 찾은 병원. 수술비와 입원비로 들어갈 돈을 마련할 생각에 바쁜 엄마에게 이선이 말을 건넨다.
"엄마, 저 핸드폰 사주시면 안 돼요? 다른 애들은 다 있단 말이에요"
어린아이의 철없는 행동으로 생각하기 좋은 상황. 그럼에도 엄마와 아빠의 반응을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사건을 객관화하기보다는 이선의 표정과 행동에 집중한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 내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이것은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춘다거나, 아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식의 시선이 아니다. 이선을 수많은 어린아이 중 하나로 대하지 않고, ‘우리들’ 중 하나인 개별적인 ‘사람’으로 대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누구도 다른 이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없는 삶의 한계이다. 게다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폭력성을 갖는 카메라를 거쳐 대상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영화 속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그저 최대한 정확하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뿐이다.
이선에게 집중하는 [우리들]의 시선은 그녀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선의 마음은 친구에게는 오해를 받았다. 어른들에게는 아이라면 그럴 수 있는 투정으로 가볍게 취급됐다. 오로지 영화만이 이선을 이해하고 그녀에게 공감한다. 그것은 이선이라는 한 사람을 향한 성실한 사랑의 형식이 된다. 그래서 [우리들]의 눈은 ‘착한 눈’이다.
[우리들]의 착한 말
-우리가 절실하게 원하는 말-
한 사람을 정확히 바라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영화. 그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좋은 영화이다. 그러나 극장을 나서 세상을 살아나가야 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가 영화 밖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관객은 [우리들]이 주는 감동이 더 나아가 삶의 진실을 고발하는 ‘착한 말’이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들]은 충분히 한국사회의 은유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다. 경쟁이 반복되고 낙오자가 양산되는 비극. 그것이 구조화되어 하루하루를 옥죄는 우리의 일상이 영화에는 투영되어 있다. 이는 세계를 성실하게 바라본 영화가 갖는 미덕이다. 영화를 본 관객은 그 근거를 하나씩 지적하며 스스로가 영화를 통해 ‘착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이러한 해석은 무익하다. 게다가 영화가 고집한 ‘착한 눈’을 전적으로 무용하게 돌린다는 점에서 해악이 크다.
[우리들]은 경쟁, 사회, 구조와 같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에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을 할애해 ‘이선이 왜 아픈지',‘이선이가 무엇을 원하는지,‘이선의 기분이 어떤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착한 말’을 가장한 쉬운 말을 거부하고 어려운 말을 택한 것이다.
앞에서 ‘착한 말’을 하려고 할수록 더 ‘착한 눈’을 포기하고 폭력적이 되어야 하는 딜레마를 말했다. [우리들]은 ‘착한 눈’을 고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끝내 ‘착한 말'을 해낸다. 딜레마로 지칭된 명제를 거부하고 폐기시키는 것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수사들을 쏟아내는 세계. [우리들]은 세계를 향해 조심스레 말한다.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을 잘 보고 잘 들어봐야 해요”
‘착한 눈’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이 말은 복잡한 문제가 가득한 세상 앞에서 뜬금없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영화 밖으로 빠져나와,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를 향해 강한 울림을 준다.
치유되지 못하는 아픔들이 있다. 그것은 진행 중이다. 정치, 과학, 법률, 철학 등의 체계들. 이들은 사건을 진단했다. 그에 따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적용하는 데 있어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논리적 체계로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 존재해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쉽게 외면된다.‘~을 해야 한다’류의 서술어로 정리되는 구체적이고 직선적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수많은 비극들은 구조적인 모순, 문제점으로 치환된다. 논리의 메커니즘 아래에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단편적으로 활용되고 소모되어 버린다. 하나의 삶이 가질 수 있는 개별성과 맥락이 파괴된다. 그때 사안의 구조적인 진전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는 만성적인 허무함에 사로잡힌다.
[우리들]의 시선은 논리의 영역 밖 진실을 향한다. 이는 쉬움을 포기하고 어려움을 취하는 것이다. 고집스러운 선택은 하나의 형식이 되고, 나아가‘말’이 된다. 있는 존재를 조심스레 살피고 정확하게 있다고 확인하는 말. 나날이 척박해지는 지금 우리 삶을 향해 영화를 매개로 세상에 던질 수 있는 최선. 한 사람을 살피고 배려하는 인간적인 말.
[우리들]은‘우리가 절실하게 원하는, '착한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