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을 훈련하기
요즘 '침묵의 세계'를 읽고 있다. 사고 보니, 법정 스님께서 추천한 도서 중 하나였다고 들었다.
고백하건대, 철학 서적 읽기는 고역이다. 지식이 일천하니, 그 심오한 세계를 다 이해하고 소화하진 못한다.
그러나, 뭔가 남는 게 있다. 그것도 오래.
20년 전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읽기 어려웠다. 두세 번쯤 읽었는데도, 내용을 다 이해하진 못 했던 것 같다. 스무 살 무렵의 대학생에겐, 그리고 갓 인터넷이 보급되어 사용되려던 시기여서 그의 말은 '예언'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나, 출간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시뮬라시옹'에서 말하려는 주제는 놀랍게도 현재 진행형이다. "가상(시뮬라크)가 현실을 대체하는 세계 (시뮬라시옹)".
그게 철학 서적이 주는 힘인 것 같다. 힘들여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침묵의 세계를 이야기하다 옆 길로 샜는데, 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침묵은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침묵은 '존재 (Being)'의 근원성에 가까운 것이라는 내용은 와닿는다. '존재와 생성'을 말하다 보니, 한 학기를 바쳐 밑줄 치며 읽고 수업했던 프랭클린 보머의 '유럽 근현대 지성사'가 아련히 떠오른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쓰다 보면, 이 글은 읽히지 않을 수 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이들은 보다 더 강렬하게 철학에 관심을 가질지도.
다시 앞선 이야기로 돌아와... 침묵의 세계를 꺼낸 이유는 '언어'의 탄생에 관한 언급이 있어서다. 우연에 의해서 인간은 침묵의 세계를 깨고 마침내 언어를 만들어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언어는 발전해 왔고, 지금 우리는 언제라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초연결'사회에 도착해 있다. 그런데, 언어가 사람들이 원활히 '소통'하는 데 있어서 '아무 중요한 중심'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말로 생각을 표현하지만, 말은 소통에 6프로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법칙도 있다. (메러비안의 법칙).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현대는 소통이 원활한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통의 시대에 가깝다. 서로 자신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으므로. 이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지금 SNS 앱을 열어보면 된다. 모두가 '관심'을 사길 원하고, 그를 위해서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인다. (한병철, "투명사회"에서 차용)
이런 시대에 '감수성훈련'을 알게 된 것은, 나 개인에게 있어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되고 있다. (현재진행형). 2019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상사의 추천으로 3일짜리 교육을 참가했다. '감수성훈련'이라니. '아 나는 그러고 보니 정말 감수성 충만한 소년이었는데'라고 거의 비아냥에 가까운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함. 가족, 친구, 학교 등 많은 사회집단/제도(institution)에서 '감수성'이라는 단어의 위치는 공고하지 않다. '사내자식이 감정에 휘둘려선', '감정을 드러내는 건 프로답지 않은 행동이에요', 심지어 시비 걸 때조차 '너 나한테 "감정"있냐?'라는 말이 쓰일 정도니...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는 감수성이 자리 잡을 기반은 매우 좁다.
과거에 오죽하면 '고맙다, 미안하다, 감사하다'라는 기본적인 표현을 장려하는 캠페인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짜증 난다'는 표현을 금지시킨다. 짜증 안에 있는 감정들을 바라보지 않고 뭉뚱그려 대책 없이 내뱉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기억한다.
감수성 (Sensitivity, 感受性) 은 사전적 의미로 감각의 예민성을 뜻한다고 한다.
이 사전 정의를 찾다가 우연히 마음에 쏙 드는 시를 한편 찾았다. (https://brunch.co.kr/@thine/82 인용)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란다.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라는 제목과 시구가 마음에 쏙 와닿는다.
언제든 멈춰 서고 싶을 때마다, 어디로든 숨어들고 싶을 때마다, 어떻게든 넘어가고 싶을 때마다 나는 책상 한 편의 섬으로 떠나곤 한다. 그 어느 때에 찾아가도 그 어느 걸음이든 알아주는 문장들이 나를 환하게 반기는 섬. 그 어느 때에 머물러도 그 어느 마음이든 안아주는 그림들이 나를 폭닥하게 끌어안는 섬. 한 권씩 발견하고 한 권씩 채워 넣은 작은 책꽂이.
brunch.co.kr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물 주기를 게을리해놓고
(중략)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이바라기 노리코, "자기 감수성 정도는" (위에 인용된 게시글 참조)
그래서 나는 2주에 한번 '감수성'을 민감하게 유지하기 위한 '훈련'을 한다. 그것도 지난 오 년간 계속 해왔다. 이름하여 '감수성훈련'.
감수성도 마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훈련이라는 단어까지 써버렸으니 읽는 분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일상의 많은 순간 감정은 억압되고 표출될 길이 잘 열리지 않는다.
가족끼리 속 깊은 감정의 대화를 얼마나 자주 나누는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감정적으로 솔직하며 사랑 이외의 다른 감정에 대해서도 투명한지,
절친한 친구들과의 대화가 얼마나 감정 깊은지 생각해 보면, 많은 장면을 떠올리기 어렵다.
자잘한 일상의 대화에도 감정은 깃들여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알아차려주는 '듣는 이'를 만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 감정을 알아차려 주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의 대화는 더 깊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알아봐 주기만 해도, 풀기 어려울 것 같았던 긴장과 갈등이 해소의 기미를 발견한다.
감수성을 훈련하는 것은 말로만 보아선 간단하다. '상대방 중심의 대화'. '상대방의 감정을 알아봐 주고 상대의 노력, 욕구, 성품을 알아봐 주는 것' (남관희 선생의 "Yes and Com" 모델에서 인용).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는 침묵을 깨고 대화의 행위에 들어서는 순간, 거의 예외 없이 '나'를 주어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미 오랜 시간 몸에 배어 있으므로. 그래서 의식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한다. 그리고 '훈련'이 일상의 영역에서 발휘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고백한다. 아직도 잘 되고 있지 않으므로. 겨우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 더듬더듬해 나갈 뿐이다.
내 마음을 이해받을 길이 없어 좌절하는 이들에게.
일상이 온통 '불협화'로 가득해서 마음의 평정을 찾기 어려운 (나와 같은) 이들에게.
그리고 더 잘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감수성 "훈련"을 권한다.
그러면 무릇 자기 감수성 정도는 지킬 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