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5가지 장면은 무엇일까요?
2034년 9월, 마침내 대학으로 돌아왔다. 대학원, 강의, 어학원 등 이런저런 활동으로 졸업 후에도 종종 대학을 드나들었다. 드나들었다기보다는 맴돌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할 것 같다. 미련이었다. 2010년 뭘 해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 없이 서른을 맞았을 때, 나는 진지하게 대학원 진학을 고민했다. 실제로 입학허가까지 받아 두었다. 하와이 마우이섬 해변의 석양을 바라보며 51대 49의 스코어로 대학에 돌아가지 않는 것으로 결심한다. 상스럽긴 하지만... 아주 솔직히, "씨발, 돈이 좋긴 좋은 거구만"이라고 내뱉으며 말이다. 그날의 바다와, 파도, 석양, 온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은 보호시설이야. 아니, 요즘은 그걸 뭐라고 하더라? 요양소. 환자, 노인, 불평분자, 그 밖의 무능력자들을 위한 곳. 우리 셋을 보게. 우리가 바로 대학이야... 대학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걸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존윌리엄스, 스토너 중에서)
가을이 되면 스토너를 읽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해다. 왠지, 새 학기가 시작되는 기분, (우리 학교는 이상하게도 9월에도 뜨거운 스포츠 축제가 벌어지곤 했는데) 너무나 완벽했던 날씨 속 잠실 주 경기장 그늘 한편에 한줄기 바람에 대한 기억, 그리고 이 책이 비로소 '내가 대학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결코 떠나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준비 없이 전쟁터에 내몰린 훈련병처럼, 직장과 사회에서 그야말로 좌충우돌하던 시절에도... 나는 언젠가 회사원으로 성공해서 대학으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생각했었다.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 회사는 게젤샤프트, 그러니까 이익사회의 한 전형인데, 구성원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더 이상에 가까운 정치프로그램의 실현이 가능할 것이라고 비전을 삼았다. 나는 정치를 한정된 것들의 배분(배려포함)을 둘러싼 한 사회의 운영원리를 결정하는 철학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인사(HR)를 직업으로 선택하기도 했고.
아무튼 지금 대학으로 돌아오기까지 예상보다 시간은 좀 더 걸렸지만, 어쨌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나는 지금 마침내 대학의 강단에서 학생들을 마주한다.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 열 가지를 추려본다.
1. 귀인: 2024년은 참 특이한 해였다. 연초에 점성술사께서 '두 계단 상승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해'라고 말해주어서 기대를 잔뜩 가지고 시작했다. '귀인'이 나타나 나를 도와준다고도 했고. 하도 귀인이 나타나지 않길래, '모든 이를 귀인처럼 대하라'는 말을 핸드폰에 적어두고 다녔다. 그래서였나, 장모님은 연초에 퓨쳐셀프 (벤저민하디)의 책을 선물해 주셨고, 그 책의 내용 중에 경기장에 들어서라는 조언을 적극 받아들여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제목은 쿠쿠다스의 사소한 생각모음이라고.
2. 롤모델: Teach for China라는 공익 프로그램을 회사에서 후원했다. 2년 간 중국의 도서벽지에 교육봉사를 나가는 대학생들을 후원하는 것이었는데, 행사 막바지 몇 명의 예비 선생님들과 대화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중국어가 서툴렀고, 그들은 영어가 서툴러서 서로 '더듬더듬'해 가며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학생이 행사가 끝나고 연락을 해왔다. 오늘 고마웠노라고. 그리고 나도 당신처럼 나의 학생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그들을 돕겠다고. 그리고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그리곤 나를 '롤모델'로 치켜세워 주었다. 내가 뭐 그럴 주제나 되나. 싶다가도.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자면, 열심히는 살아야겠노라고 생각한다.
3. 상하이: 2021년부터 그러니까 5년 동안 체류했던 상하이는 내게 정말 많은 성장과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적은 사람들과 깊이 대화하고. 무엇보다 내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처음 도착 했을 때, 한때는 지랄 맞다고까지 생각한 '나이'라는 디멘전에서 내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더 높은 자리에 앉아있고. 23살에야 영어를 말하기 시작하고, 28살이 되어서야 대학을 졸업한 데다, 무려 마흔 살에 이르러 해외 생활을 시작한 것이 너무 늦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생각이 일상을 방해하는 순간이 적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다 나의 '열등감' 혹은 '열등콤플렉스'가 어디에서 오는지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열등콤플렉스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부자들에게, 더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에게,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 (혹은 비슷한 조건을 가진 것 같은데 나보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학교'에 관한 복잡한 생각은 반복된다. 아무튼 상하이에서 비로소 나는 '비교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깨닫는다. 그로 인해 비로소 나만의 궤적을 만들어 나가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4. 파리: 식상하고도 의미와 의도가 천박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인생을 바꾼 단 한 권의 책'을 "그래도" 꼽으라면 아마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작)'을 선택할 것이다. 그 책에서 사회 부조리에 저항하는 '사회과학'의 불꽃같은 것을 발견했고, 그 책이 '전태일 평전'을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으로 나를 이끌었으며 70년대와 80년대 한국의 대학가/민주주의/민주화운동에 깊은 관심과 노스탤지어 (아니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동경'이라고 해야 할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17살에 읽었던 책이, 30년쯤 지나... 나를 '나는 파리의 회사원'으로 이끄는데 어느 정도는 일조한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모든 꿈들의 시원과 기원을 거기에서 찾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 회사를 전전하다 파리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에 입사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프랑스 철학과 정신에 대해서 특별히 거부감 없이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본사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표면적 이유를 달았지만, 더 근원적으론... 철학적 사유와 깊이가 다른 사회에 나를 위치시키고 무엇인가 흡수하고 싶었다. 종종 이를 두고 '세계시민성'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인류에 공헌하고 있고,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 같은 것. 이건 아들러가 말했다.
5. 박사: 오십에 가까운 나이에 박사를 시작한다고 했으니, 용기가 가상했다. 응원하고 지지해 준 아내와 아이들 덕분이다. 정말 농담처럼 우리 큰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면 같이 따라가서 같이 학교 다닌다고 했었는데. 그 보다 좀 더 계획은 앞당겨졌고, 다행히 우리 큰 애는 아빠와 함께 대학을 다니는 '화'를 면했다.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배우고 그리하여 나누고 싶은 주제가 더 명확해졌다. 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서 행복과 희열을 느낀다는 것.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결국 내가 잘하는 '일'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해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박사를 준비하고 공부할 주제를 정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늦깎이 학생을 받아들여 줄 교수님을 만난 것도 큰 복이고.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하는 건 정말 힘들었지만, 제2의 경력을 시작하는 준비기로는 손색없었다.
상상력의 한계로 열가지 쓰려던 것을 다섯가지에서 멈춘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명확히 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해 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다. 희소코치님에게 감사의 인사 함께 담아 '발행'의 용기를 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