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로

Fazil Say 피아노 리사이틀

by 쿠쿠다스

저녁을 먹으면서 자칫 와인을 한잔했더라면, 아니 그전에 퇴근 후에 가려고 했던 운동을 갔더라면... 나는 분명 오늘 공연장에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아침에 난데없이 새벽 다섯시에 눈이 떠져 그 뒤로 다시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벽녘 한참을 뒤척이다가 다시 자 볼 요량으로 명상을 했다.

명상가는 말한다. 나를 사랑하고, 친절히 대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며, 용서하라고. 그렇게, 금요일 '긴' 하루가 시작된다.

저녁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파질세이의 연주를 보러 갔다. 파질세이는 정만섭 선생의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게 된 연주자인데,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잔잔한 호수 위에 물수제비뜨듯 연주하길래 인상 깊어서 음반도 저장하고 이름을 기억했다. 그가 작곡도 한다는 사실은 이번에 공연 프로그램을 예매하고야 알았다. (이런 내용들은 대부분 인터넷 위키피디아를 참조함을 밝힌다) 오늘의 프로그램 전반부에는 바흐의 골든베르그 변주곡 그리고 후반부에는 본인의 자작곡을 몇 곡 연주하는 구성이다. 그리고 실제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음반에서 느꼈던 느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확연히 느낀다. 그는 정말 온몸으로 피아노를 치고, 피아노 현 위를 공명하는 진동에까지 리듬을 불어넣으며 연주한다.

앞서 말한 '잠'의 문제는 바로 바흐인데, 골든베르그 변주곡은 어디서 얼핏 듣기로 누구의 불면증을 달래줄 요량으로 썼다나 뭐라나 하는 설이 있는 곡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썰'에 불과하다나 뭐라나...) 어쨌든 이 곡의 설화처럼, 그리고 앞서 말한 다섯시에 일어난 금요일 밤... 나는 30곡의 다소 반복적인 변주 피아노곡 사이사이에 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곡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큰 깨달음이 벼락처럼 찾아와 잠이 깬다. 바로 첫 곡과 마지막 곡이 반복된다는 것. 수미쌍관! 돌고 돌고 돌아 다시 처음 지점으로 '착'. 이 부분에서 놀라는 걸 보니, 나는 이 곡을 한 번도 끝까지 들은 적이 없었나 보다. 마치 정독도 아니고, 끝까지 읽지도 않은 책처럼.

(또 여담이지만 바흐의 이 곡은 보이저 우주선에 실려 '지구의 소리'로 우주를 날아다닌다고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보이저호는 -이 곡의 마지막 아리아처럼- 지구에 '착'하고 돌아올까? 아무튼 연주는 흠잡을 데 없었다. 뭐 사실 공연장에서 듣는 연주는 다 좋다. 연주자는 본인이 심취하여 연주 중간중간 허밍과 발 구르기 손 휘젓기 등 높은 몰입도를 보여준다. 글렌 굴드가 저랬으려나.)

후반부가 시작되고, 그는 이제 본인의 자작곡을...'한치'의 주저함 없이 연주한다. 전반부 연주에선 한쪽에 악보를 펼쳐두고 매 곡마다 스스로 장을 넘기며 연주하더니, 자신의 곡은 악보도 없이 피아노 음의 한계를 뛰어넘어가면서 (한 손으로는 현을 잡아 진동을 제어하고 다른 손으로는 연주하면서 매우 색다른 소리를 내는 연주 기법을 사용), 발도 구르고 너무나 자유롭게 연주한다. 자신의 곡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려나. 그의 곡이 라흐마니노프나 쇼스타코비치의 그것처럼 시대를 초월해서 살아남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듣는다. 그럼 나는 원곡자의 완벽한 해석에 뒷받침된 연주를 들은 영광을 함께 하는 것이니까. 연주가 계속될수록 그의 열정과 감흥은 점점 고조된다. 자신이 만든 곡이려니 어련히 사랑하시겠나요...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잠시 멈칫한다.

나는 (얼마 되지도 않지만) 내가 쓴 글을 보통 다시 보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고쳐 쓰지도 않는다. 그리고 비난도 두렵고 칭찬도 부끄러워 좀처럼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잠깐, 그럼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친절히 대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며, 용서'하고 있는 건가 하고 멈춰 생각한다. 거의 300년 가까운 혹은 이상의 시차를 둔 바흐의 곡과 파질세이의 두 곡들과 연주 사이. 그 긴 시간을 초월해서 우주의 중심인 '나'를 발견한다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 아무튼, 그는 자신의 곡을 너무나 사랑하고, 자기 자신이 그 곡을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 그리고 결국 그로 말미암아 자칫 '소음'이 될 뻔할 수도 있는 곡을 관객들에게 '관철'시킨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나 숭고하고 아름다워 '브라보'를 외치고 긴 시간 정성 들여 박수를 보냈다.

긴 하루, 돌고 돌고 돌아 결국 '나'로 돌아온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사랑해 주나요.

자기가 쓴 글을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읽고 좋아해 줘야 하나요.

연주회 끝... 집에 돌아와 미뤄두었던 와인을 마시며 이 글을 쓴다.

나를 사랑하고, 친절히 대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며, 용서하면서... 그렇게, 금요일 '긴' 하루를 닫는다. 쓰고 보니 일기 같아 겸연쩍어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네. ㅎㅎ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할 일 많은 한량의 이야기, 기사단장 죽이기/태엽 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