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閑良), 할냥 혹은 활량(弓~)은 원래 한국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을 뜻하는 말이나, 보통 “일정한 직사 없이 놀고먹는 양반 계층”으로 넓게 쓰였다.
위키백과 (24/9/14 주제어 '한량' 검색)
한량(閑良)은 한자 표현대로 '한가한 양반' 정도로 이해하면 간단할 것 같다. 집업에 대한 귀천 의식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전 시대에 과감히 '놀고먹기'를 선택하였으니, 얼마간의 부러움과 얼마간의 조롱이 뒤섞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어제 오랜만에 코칭을 재개하면서, 내 안에 한량에 대한 오래된 열망/동경이 있음을 발견한다. 나의 이야기에 코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제약 없이 시도하고 경험하는 삶'이 아닐까라는 멋진 정리로 화답해 주셨고. 사실 회사 생활을 벌써 15년이나 해왔지만,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의 행복'보다는 '밥벌이의 고단함'을 느낄 때가 더 많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나는 이른바 한량 문학과 소설들을 일관되게 사랑해왔다. (자료 무단 인용 등 여러 가지 논란은 남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최애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작)'의 주인공은 명문대를 나와 몸에 맞지 않는 회사원 생활을 바득바득 이어오다 마침내 한량이 되고 나서 인생의 과제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아직도 종종 악몽으로 등장하는 첫 회사/처음 사회생활의 고단함에 큰 위로가 되었다.
이후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한량 문학의 발자취를 따랐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시모무라,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신도 인정했듯), 기원을 더 올라가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의 다이스케 등등. 모두 하나같이 특정한 직업 없이 놀고먹으며, 음악이나 미술, 무용 같은 고상한 취미를 지닌 이들이 타인의 갈 길 바쁘고 사연 많은 인생을 관조하거나 동참하는 등의 내용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루키의 소설들을 사랑'했다'. 사실 하루키 저작들의 컬렉션을 책장 한 칸 이상 가진 '하루키이스트' 지만, 이제 조금씩 과거 완료형으로 채비를 해야겠다. 올해 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시작으로 무려 4권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와 무려 2권의 '기사단장 죽이기', 그것도 모자라 초기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먼 북소리'와 '세이지 오자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까지... 그야말로 하루키 열독의 한 해를 보냈으므로.
무리해서 두 소설 총 여섯 권을 요약하면 이렇다. 특별히 가난할 것도 부자도 아닌 재능도 성격도 심지어 외모조차 '평범한' 주인공이, 어느 날 아내로부터 이혼을 통보받고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놈에 아내들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둘 다 '외도'를 표면적 이유로 이혼을 요구한다. 그렇게 시작된 주인공의 삶의 균열에 혼돈이 자리 잡는다. 기묘한 일들. 이런 와중 그들에겐 (마치 약속한 것처럼) 한 치 부족함이 없고 완벽한 옷과 자동차를 가진 부호들이 나타난다. 그들의 제안과 도움을 받아, 깊은 우물과 구덩이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신고의 여행 끝에 부메랑처럼 원래 자리로 '착'하고 돌아온다 이야기다. 한량들의 이야기 치곤 너무나 숨 가쁘고 바쁜 이야기다. 하루키는 언제나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삼각 초점/관계를 지지 삼아 하나의 지점에 안착한다.
사실 주말에 취미 삼아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데는 주인공의 라이프스타일이 주는 한적함이 '부럽'기도하고, '그립'기도해서 였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에서 소박하게 산다. 간단한 몇 가지 요리를 할 줄 알고, 적막을 달래줄 재즈나 클래식 음악이 언제나 함께한다. 종종 위스키를 마시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이십 년 가까이 와타나베, 다이스케, 시모무라, 그리고 기사단장 죽이기의 '나' 등 한량들을 부러워하면서... 결론적으론 얼마간 비슷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게 됐다. 하루키가 말하는 간단한 요리들 대부분 나 역시 만들 줄 알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매우자주 가끔 와인과 위스키를 마신다. 이렇게 쓰고 보니 밥맛없는 캐릭터가 되려는 것 같기도 한데, 사실 대부분 활동들이 얼치기에 가깝다.
한량의 '내가 원하는 것을 제약 없이 시도하고 경험하는 삶'은 간단한 문장이지만, 심오한 말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를 둘러싼 '제약'은 어떤 것이고 이것들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시도'와 '경험'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막연하다. 한량을 동경해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반갑다. 그리고 진정한 한량이 된다는 것은 결국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성'을 '확고히'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지 질문한다. 직업이 곧 신분이자 경제적 능력으로 번역되기 쉬운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에, '한량'이 되기로 '선택' 한다는 것은 '용기'를 쥐고 확고히 '취사선택'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럭저럭한 회사의 이러저러한 회사원으로 두 아이의 아빠이자 남편이고 가장인 내가 어떤 '한량'이 되어야 될지 구덩이 파고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