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by 쿠쿠다스

너(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지난해 연말, 한 유명 배우가 자신의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죽음에 이르렀다. 각종의 의혹, 추문, 그리고 (물론)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어지럽게 뒤섞인채. 사건은 피의자의 자살로 석연찮게 일단락 되었다. 나 역시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게 궁금하지도 않고.

23년 연초에 그가 출연한 “나의 아저씨”를 감명깊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극중 지안(至安)을 든든히 살펴주던 그 아저씨는 현실에서는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 그가 발군의 연기를 펼친 탓인지, 현실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그래 주리라고) 기대했었던 나를 본다.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거, 다 아무것도 아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한동훈-故이선균 분 대사 중에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의 문화예술계 동료들이 성명을 냈다. 그의 죽음에 이르게 한 과정에서 수사기관 그리고 언론의 태도는 정당했는가를 되묻는다.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어떤 이들은 세계적인 배우이며 한국 문화의 소프트파워를 잃었다고 한탄하고. 지금에라도 나서주어 고인은 고마울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숨죽여 지켜보기만 한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나는 이 죽음에서 말을 만들어 내고 그 이야기들을 (재)생산하고 소비한 모든 이들의 책임을 본다.

일말의 불편함이라도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우리는 타인의 사생활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산다. 아니, 정확히는 언론과 미디어가 그 관심을 부추긴다. 관음증이다. 오죽하면 관찰예능이 대세일까. 연예인은 퇴근이 없다. 대부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텐데, 일 끝나고 집에 가면 되도록 일 생각 적게 하고싶다. 그리고, 비로소 김과장, 조대리, 최부장이 아닌 '나'로 돌아와 쉬고 싶을터. 그러나 연예인에게는 퇴근이 없다. 그가 운전할 때 벨트를 바로 매는지, 코로나 거리두기 기간에 여행을 가는지, 결혼을 하든지 이혼을 하든지, 변비를 겪든지 공황장애를 겪든지 모든 생활이 일거수 일투족 감시 조명된다. 그리하여 평가되어 지고. 어떤 가수는 본인이 대학을 졸업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와 같은, 가수로서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안에 휘말려 몇 년의 시간을 잃어 버리기도 했다.

투명사회. SNS라는 요즘 세상의 판옵티콘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효율적으로 24시간 감시한다. (한병철, '투명사회')

그래서인지 연예인에게 우리는 꽤 드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아무런 송사나 개인적 추문이 없는 것을 하나의 대단한 미덕으로 여기면서. 그러는 동시에 무거운 법적/사회적 비난을 이기고 돌아온 '전과자'들을 너그러이 용인하며 다시 브라운관 안으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음주운전, 도박, 병역기피, 마약, 탈세, 비리 등. 한때는 마약 투약으로 복역중인 '죄수'였다가, 지금은 화려하게 부활한 사람들도 있지 않나. 요컨대, 연예인들이 활동하는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최대치의 도덕과 최소치의 도덕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쿨하게 생각하면, 한 인간으로서의 과오를 재능으로 다시 한번 뛰어넘는 자기초월적 과정이라고 할까. 그(녀)도 그런 자기초월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피나는 노력도 뒷받침 되었겠지. 그렇다고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주어진 프로그램에서 맡은 바 '역할'을 해 나가는 진짜가 아닌 '연예인'에 대해서 특별히 기대도 실망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미디어의 이중성을 간파해야 한다. 한쪽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는 아랑곳 않고 조회수와 시청률에 대한 갈증만으로 최대치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다가, 그 다음 프로그램에서는 음주운전으로 여러번 실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연예인이 나와 프로그램의 비중을 차지한다. 대체 이들에게 '도덕'은 무엇인가. 이들이 주장하는 '시청자의 알권리'의 경계선은 누가, 언제, 어떻게 그리나.

경제학개론 시간에 수요-공급 곡선을 배운다. 가격이 오르면 공급이 증가하고, 가격이 내리면 반대로 공급이 줄어든다. 내가 말하려는 이야기에 빗대 다시 설명하면 관심이 증가하면 보도와 취재는 증가하고, 관심이 사라지면 보도와 취재는 줄어든다. 사실 보도와 취재를 증가시켜 관심을 부추기기도 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보도와 취재를 줄여 관심을 의도적으로 줄이기도 한다. 경제학 기본법칙은 미디어 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공영방송이든 종합편성채널이든 신문이든 OTT이든 SNS든 거의 이 수요-공급 곡선이 예외없이 작용한다.

우리는 더 무관심 해 져야 한다. 특히 개인의 사생활이나 특히 법이 정하는 기본권에 관한 일일수록. 형사법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문명사회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적용된다. 그리고 특별히 법을 전공하거나 배운 것도 아니지만, 형법은 가능하면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기 위한 '죄형법정주의'가 적용된다. 다시 말해, 관습이나 여론에 의해서 죄를 가중하거나 그에 따라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근대' 형법의 기본적 원칙이다. 근데, 여론과 필요 이상의 관심과 공론장에서 가래처럼 쏟아내는 댓글이나 미디어를 자처하는 개인들이 '마녀사냥'을 자행하여 한 개인을 스스로 '사형' 하도록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멈춰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단 남모르는 한 연예인에게만 생길법한 일이 아니라,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지 최소한의 '공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관심 해질 수 있다. 카타리나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어보았는가? 지금 우리는 한 배우의 죽음에서 겸연쩍고 멋쩍은 듯 가만히 있어야 할 게 아니라,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혹은 어디에선가 그런 책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좀 더 성숙해질 수는 없는지 그리하여 좋은 미디어와 그렇지 않은 미디어가 가려지는 '합리성'의 시장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처럼 불건전한 미디어 생태계가 활개를 치는 이상, 우리중 누구라도 언제든 그 배우의 자리에 놓여 비로소 자신의 '죽음'으로 죗값을 치를게 될 지 모를 일이다. 지나친 연결이라고 비난 받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미디어와 대중이 나(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게 될 수 있다는 섬뜩함을 느껴야만 한다. 그리하여 반드시, 이 다음에는 무관심해져야 할 것이다. 적어도 법원이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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