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기운 때문에

by 쿠쿠다스

둘째 아들 뽕민이 감기 기운이 있어 학교에 가지 못했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재택근무도 허용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을 돌보는 목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휴가도 제공한다. 그는 침대에서 늦잠을 청하고, 나는 집에서 부랴부랴 아침부터 애와 회사일을 같이 돌본다. 감기 "기운" 만으로 학교에 가지 못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해 보지 못한 나의 어린 시절이 잠시 떠오른다. 왜 그렇게 바득바득 학교에 '열심히' 개근했나 모르겠다. 그냥 어른들이 하라고 하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을테지만. 한편으론 또 그런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가서 정말 기진맥진한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약 먹고 학교에 가서 수업듣고 친구들과 노닥이다 보면 하루가 그냥 지나 가고는 했다. 두 아이를 키운 몇 년 간의 육아 경험에 비춰보건대, 어린이들의 감기 기운은 사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대수롭지 않은듯 지나가고, 대수롭게 여기면 대수롭게 지나가는 것 같기도.

오늘 감기 기운이 있어 제 일을 하지 못한 건 우리 아들뿐만은 아니다. 한국의 어떤 공인께서도 오늘 감기 기운이 있어 중요한 일정에 불참하였다.

'성실성'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누가 꾸준히 성실한지가 중요하다고 혼자 말하기도 하고. 비슷한 지적 사고능력과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회사라는 공간에서는 고성과자와 저성과자의 차이가 종이 한장에 불과하다. 어떤 경우는 실력과 전혀 관계 없는 우연한 요소들에 의해, 이를테면 인간관계(?), 고성과자가 저성과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 본인의 승진이나 성장이 지체되면 자연스럽게 절치부심을 위해 '성실함'이라는 해결책을 떠올리게 된다. '자 지금부터 엉덩이 끈덕지게 붙이고 더 열심히'.

대학교 신입생 때 본인이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해 방황하는 친구들에게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했었다. '니가 못나서 그런게 아니라, 걔들이 우리보다 몇 시간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한거지 모'. 얼굴 모르는 경쟁자들의 노력과 성실성을 인정하고 박수칠 뿐, 나는 괜찮아... 뭐 그런 얘길 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난 많은 일류대학 친구들을 보면, 정말로급이 다른 성실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가끔 나는 그들을 보며 '지덕체'를 갖춘 인간들이구만 이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성실이 밥 먹여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나브로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성실성에 관한 일종의 신화적 그리고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다. 앞에서 말한 '개근상'이 바로 그 상징일터.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학교는 가야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여러가지 이유에서 이 개근은 환대 받지 못한다. 혹시 '개근거지'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개근거지란, 체험학습(출석대체)을 이유로 학교를 결석하는 일 한번 없이 꾸준히 출석하는 아이들을 차별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이제 개근은 부모의 경제적 (혹은 여타의) 능력없음을 간접적으로 노출하는 하나의 낙인이 되고 말았다. 부모와 집안의 사회경제적 차이를 차별로 즉각 반응하는 거친 세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실함'의 의미는 조금 너절해 지고 만다. 하긴, 성실성보다는 말고 영악함이 제 살길 찾는 데 좌파우파/운동부동 너나할 것 없이 '제 자식이 우선'이라고 키우고 있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는 '공정과 상식'가 들어설 여지가 매우 협소해진다. 룰과 원칙을 믿지 못하면, 마냥 '성실'할 수만도 없고.

감기 기운이 있어 오늘 하려던 일을 하지 못한 두 사람. 이들에게 '성실함'을 어떻게 다시 말해줘야 하나 막막하다. 특히, 그 어떤 공인은 내가 앞서 말한 '지덕체'를 갖춘 학생들만 가는 것 같은 '일류대' 출신이고. 자타공인의 성실성으로 사법고시도 무려 9수나 해낸 성실함의 그 잡채(?) 아니신가. 그런 분께서 5년 선출계약직 하시면서 감기 기운으로 돌연 (그것의 중요도를 떠나, 아니 사실 중요하지 않은 일정이 어디 있나만) 일정을 취소 했다는건 다소 아쉽다 (오늘은 반차로 처리 하실래요? 재택으로 해드릴까요?). 우리집 어린이에게는 더더욱 '감기 기운이 있어 학교를 안가는 건 말이 안돼'라고 하기가 면구스러워진다. 더 나은 컨디션으로 더 큰일을 해야하니 한 걸음 쉬어 가는 것도 괜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쓰고 나니 종일 집에서 아이도 돌보고, 일도 돌보다가 오지랖이 뻗쳐 사회까지 돌보려 무리수를 두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감기 기운으로 집에서 하루 쉴 수도 있는 거지 뭐. 근데, 감기 기운에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살기위해 문 밖으로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친다. 내일은 북극 냉동고 한파가 한반도 전역에 들이닥친다고 한다. 감기 기운 때문에 개근과 성실함의 가치을 포기하는 분들이 아주 많지는 않은 날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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