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끝이 난 두륜산과 대흥사를 뒤로 하고 다산선생이 10년 동안 거주하였던 다산초당으로 이동하였다.
다산선생은 정조가 아끼고 총애하던 신하였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자 정조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당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학문으로 서학을 접하였던 다산선생도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갔으나, 풀려나지 못하고 큰형의 사위가 모반에 준하는 백서를 중국에 보냈다가 발각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 된 것이었다. 지금도 자식이나 조카 등이 문제를 유발할 경우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이 사과를 하고 관직을 물러나는데 조선시대는 더 하였을 것이다.
두륜산에서 다산초당으로 이동을 한다.
다산초당은 다산선생이 사의재에서 4년 동안 지내고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까지 4년의 세월을 보냈고, 10년을 보낸 곳이 다산초당이다. 내가 8년 전에 H와 함께 삼남길을 걸을 때 이곳을 지난 기억이 있는 곳이다. 그때에는 강진에서 출발하여 백련사로 와서 백련사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다산초당을 갔는데 오늘은 반대다.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하여 다산기념관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다산초당으로 가는 일정이다.
친구들은 근처까지 가고자 요구하지만 기념관에 자동차를 세워두어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걸어야 5분 정도 추가정도 걷는 것이다. 다산기념관에 주차를 시키고 다산초당으로 간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주차장이 또 하나 있다. 10대 정도 세워둘 수 있다. 주말에는 힘들겠지만 주중에는 주차가 가능하다. 8년 전에 왔을 때 초당인 것으로 기억하였는데 사실은 와당이었다. 다산초당은 목민심서 등 6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한 곳이다. 산속의 초당에 기거하면서 이론을 완성한 것이다. 어쩌면 다산선생이 유배된 것이 다산의 방대한 지식을 완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귀양을 갔을 때 귀양 간 사람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경제를 확보하던가 그 지역 유지들이 지원하던가 하였다. 그 지역 유지들이 지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유배에 풀려나서 한양으로 간 후 그 지역유지들이 그 사람에 의하여 어떤 특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정조 사후에 귀양을 왔기에 그 지역 유지들 입장에서는 언제 복권될지 확신되지 않았기에 도외시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후 다산선생으로부터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생계를 책임지게 된 것이다. 다산선생은 다산초당에서 생계에 대한 걱정을 뒤로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지식을 정리하여 후세에 그 지식을 전파하였다.
다산초당 초입을 조금 지나서 올라가면 처음 만나는 무덤이 있다. 다산의 제자로 다산초당을 짓고 다산선생을 모셔온 제자의 무덤이라고 한다. 다산기념관은 강진에도 있고 서울 남양주에도 있다. 서울사람이라면 서울의 다산 기념관을 더 많이 가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산선생이 10년 동안 머물렀던 다산초당은 여기뿐이다. 1일 차에 사의재를 보았고 오늘은 다산초당을 본 것이다. 다산선생 유배길 전체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산의 유적지를 탐방한 것이다. 현판에 판각된 ‘다산초당'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과 ‘다산 4경'이라 부르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 등의 유적이 있다. 다산초당을 비롯하여 이곳의 다양한 유적을 ‘정약용 유적'으로 통합하여 사적 10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다산초당 건물은 원래 목조 초가였으나 1936년에 노후로 인해 붕괴되어 없어졌던 것을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그 자리에 목조 와가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이웃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다. 다산선생이 유배당시 이웃한 백련사에 혜장선사가 있어 서로 오가며 친분을 나누었던 길이라고 한다.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있어 여름에는 산책하기 좋은 오솔기이라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해월루가 있는 곳까지 오르고 백련사까지는 내리막이다. 우리가 두륜산을 걷고 왔기에 백련사로 간 후 다시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돌아가는 코스로 능선을 오르기 싫은 코스였다.
두륜산을 오를 때 그 기세를 갖고서 다산초당을 싶게 올랐다. 그리고 다산초당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백련사로 이동을 한다. 오솔길을 걸으면서 그때의 다산선생이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고민을 해보았다. 다산선생은 8년 동안 강진에 유배를 온 후 제자들에 의하여 다산초당에 기거하였고 이웃에 속세를 벗어난 스님과 속세의 연이 아닌 정신의 세계로 이어진 이야기를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백련사를 정문이 아닌 옆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언덕을 넘어서 내려간다. 차밭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백련사가 있다. 백련사는 만덕산이란 산 이름을 따서 ‘만덕사’라 하였으나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다. 백련사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1211년에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지금 백련사는 다산초당을 찾았다가 백련사는 찾는 관광객이 더 많은 것 같다. 유불의 조화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백련사를 보고 앞에 나오면 모두가 동백나무다. 백련사 주변 5.2ha 면적에 동백나무를 위주로 7,000여 그루의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동백나무와 함께 비자나무, 후박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 아래에는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특히 3,4월경 붉은 동백꽃이 만개한 후 바닥에 떨어진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오늘도 그 동백나무들 중 어느 나무에서는 계절을 잊은 듯 꽃이 피어 있다. 그리고 꽃을 피우기 위한 꽃망울이 곳곳에 보인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을 거쳐 원위치하여야 하지만, 백련사에서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싫어 우리는 도로를 따라 자동차를 주차시켜 놓은 곳으로 이동을 한다. 원래 의도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실현이 되었다. 내려가면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움직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제 땅끝마을로 이동한다. 일몰이 되기에는 2시간이 남았고 이동하는데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며 그곳 숙소에 짐을 풀고 땅끝전망대, 땅끝탑을 둘러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처음에 땅끝마을에 숙소를 정한 것은 일출을 보기 위하였는데 이제는 일몰도 같이 보고 땅끝마을을 돌아보자는 것으로 바뀌었다. 삼남길의 마지막 땅끝탑에 온 것인 2016년이었으니 8년 만이다. 걸어서 온 길을 자동차로 도착하는 것이다. 예전에 걸었던 길이 보인다. 그 길이 아련하다. 그 길을 걸으면서 마지막을 장식하자고 하였는데 아무 생각 없이 끝을 내었던 기억이다.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땅끝마을에 도착하였고 숙소에 들어섰다.
어제의 불쾌한 감정을 오늘은 깔끔하게 청산하였다. 오늘의 숙소 프런트는 너무 친절하다. 마을이 크지 않아서 그런지 물어보면 즉시 답이 나온다. 인상이 중요하고 응대태도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아침부터 천상천하의 두륜산을 보고 대흥사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 땅끝마을에서 일몰을 보면서 마감을 하려고 한다. 땅끝탑과 전망대를 둘러보기 위하여 이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땅끝탑으로 가는 길이 11월 말까지 공사 중이라는 안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사 중인 인부들에게 서울에서 왔는데 들어갈 수 없는지 요청을 하니 공사 중인 인부들이 우리들을 이해하였는지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곳을 알려준다. 우리는 그곳을 이용하여 땅끝탑으로 갔다. 그렇지 않았으면 땅끝 전망대를 올랐다가 내려와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를 드리면서 데크로 들어서서 땅끝탑에 도착하였다.
나와 H는 경험이 있지만, J와 B는 처음이다. 우리는 그곳을 안내한다. 그곳에 있는 탑을 보고 그곳에 있는 할머니상을 배경으로 인증을 한다. 땅끝탑을 해남군에서 설명하기를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땅의 끝을 상징하는 삼각뿔 형태의 탑이다. 바다를 향해 꿈을 싣고 나아가는 배의 돛을 형상화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서서 절망을 털어내고 희망을 안고 돌아간다. 땅끝전망대와 더불어 땅끝해남의 랜드마크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곳의 위도는 북위 34도 17분 32초이다". 탑에는 “이곳은 우리나라 맨 끝의 땅/ 갈두리 사자봉 땅 끝에 서서/ 길손이여/ 땅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라고 새겨져 있다
땅끝탑 바로 옆에 이렇게 표시되어 있다. 이곳을 경계로 서쪽은 서해, 동쪽은 남해라고 한다. 서해와 남해의 경계라 한다. 다음날 서해, 남해, 동해에 대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땅끝탑에서 일몰을 볼 수 있지만 일몰이 되고 난 다음에 어둠이 찾아오면 전망대를 오르는 것도 힘들 것 같아 일몰이 오기 전에 전망대가 있는 갈두산 정상을 올랐다. 계단이 무척이나 많다. 계단을 한 번씩 넘어갈 때마다 우리나라 모든 광역단체를 표시하고 있다. 처음에 전라남도를 시작하여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경기도, 강원도이며 북한지역의 경우 현재 북한에서 분류하고 있는 광역단체를 표기하고 있다. 황해남도, 황해북도, 자강도, 양강도 등이 표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함경북도이다. 함경북도를 오르면 이제는 갈두산 정상이다.
나와 B는 갈두산 정상에서 일몰을 지켜보았고, H와 J는 전망대를 올라서 일몰을 보았다. 산 정상에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땅끝이 남해와 서해의 경계로 국립해양조사원은 정하고 있으니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다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와 달은 서해로 떨어지는 것이다. 해가 바닷속으로 빠지니 광풍이 몰아친다.
이제 숙소로 돌아내려간다. 갈두산 정상에서 하산을 어떻게 하냐 물으니 모노레일을 탑승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걸어서 내려간다. 도로를 따라 천천히 내려간다. 계단보다는 거리가 좀 더 있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것보다 편안하게 내려갈 수 있어 우리는 그렇게 선택을 하였다.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세계 각 대륙의 땅끝을 알리는 공원을 둘러보았다.
이제 저녁을 해결하고 내일을 준비하여야 한다. 저녁을 찾아 나선 곳은 괜찮았으나, 그곳 주인은 상도의보다는 이윤이 앞섰다. 4명이 일행이 손님이 왔으나 4명이 앉을자리가 없어 2명씩 앉고자 하였으나 주인은 거부하였다. 기다리라고 한다. 2명씩 앉는다고 하면 밑반찬이 약간 더 나갈 뿐인데..... 주인이 그렇게 하니 안주인은 난감해한다. 음식은 괜찮았으나 주인이 그랬다.
이제 내일을 준비하여야 한다. 이곳은 조그마한 마을이라 내일 먹을 음식을 마련할 수가 없어 편의점에서 해결하였다. 그리고 하루가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곳의 명소에서 일출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