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의 시작과 끝을 등산으로 장식하자는 친구의 말을 오늘 실천했다.
연휴가 시작되는 10월 3일 개천절에는 관악산을 우중 산행했고, 연휴 마지막 날인 10월 9일 한글날에는 불암산과 수락산을 종주했다. 관악산 산행은 B와 H가 집안일로 함께하지 못했고, 불암산과 수락산 종주에는 H가 멀리 있어 동참하지 못했다. 늘 넷이서 하던 등산을 둘이서 하다가 오늘 셋이 함께하니 더욱 즐거웠다.
불암산을 오르는 코스는 많지만, 우리는 길게 종주하고 싶은 마음에 화랑대역에서 모였다. 가장 쉽게 오르는 코스는 상계역에서 시작하지만, 우리는 천천히 산을 즐기며 걷기로 했다. 화랑대역은 인근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인 '화랑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주변은 조선 시대 왕릉이 즐비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명에 '릉'이 붙은 곳이 많아, 우리는 그 유래를 재미 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태릉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였던 문정왕후의 릉이고, 이웃에는 아들인 명종의 릉(강릉)이 있다. 이에 근처의 공릉, 덕릉고개 등의 이름에도 궁금증이 생겨 찾아보았다.
공릉은 공덕리(孔德里)와 능골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조선 시대 왕릉이 있던 곳은 아니라고 한다. 덕릉고개는 선조가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며 그의 묘를 '덕릉'이라 칭한 데서 유래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불암산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공릉산 백세문'이라고 쓰여 있어 우리의 이야기에 새로움을 더했다. 이웃한 태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경내에 있던 태릉선수촌이 진천으로 이전해 이제 그 이름도 점점 잊히고 있지만, 우리 세대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선명하다.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라면 누구나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절이었다.
서울둘레길과 불암산 등산로가 나뉘는 갈림길까지는 무척 편안한, 트레킹 코스에 가까운 길이다. 가족 단위, 지인 단위로 많은 사람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아마 추석 연휴 내내 이어진 비로 야외 활동을 못 했던 사람들이 모두 나온 듯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고, 시야에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가까이 보였다. 북한산과 도봉산이 이렇게 가깝게 보인다는 것은 오후에 비가 올 확률이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불암산성을 지나면서부터 우리의 '느린 산행'은 '쉬지 않는 산행'으로 이어졌다. 사실 천천히 걷되 쉬지 않고 걸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더 오래 산행할 수 있다. 마치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원리와 같다. H가 늘 그렇게 걷는데, 나도 자주 함께하다 보니 닮아가는 것 같다.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히. 이제 암릉 구간이 시작되었다. 다양한 모양의 바위를 만나며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같은 바위나 글, 그림, 음악을 접하더라도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른 것과 같다.
이정표에 '거북바위'라고 쓰여 있음에도, 한 친구는 고래가 솟구치는 모습 같다고 말했다. 저마다의 시선이 곧 현실인 것이다. 잘 설치된 데크를 따라 불암산 정상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오르기 힘겨웠던 곳인데, 이제는 누구나 산을 즐길 수 있도록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덕분에 등산로 외의 다른 곳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는 듯했다. 불암산 정상석이 아래로 옮겨져 있었고, 인증 사진을 찍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몇몇은 바위 위로 올라 예전 정상석이 있던 위치에서 또 한 번의 인증을 남겼다.
이제 덕릉고개로 방향을 잡았다. 내려가는 길에도 다양한 바위들이 눈길을 끌었다. '쥐바위'라고 하는데 위에서 보니 돼지머리 같기도 했다. 정상에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는 석장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이동했다. 덕릉고개로 내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통 수락산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통해 올라오는데, 아직은 시간이 이른 모양이었다. 우리가 산행을 일찍 시작한 덕분이다. 3시간 이상 산행을 하니 다들 지쳐 가는지, 수락산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우리 나이에 하루에 산 두 개는 무리"라는 친구도 있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는 친구도 있었다. 문득 내가 어릴 적 보았던 지금 내 나이의 어르신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의 어르신들은 참으로 연세가 지긋해 보였는데, 나는 아직 이팔청춘인 것만 같다. "우리가 은퇴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라며 서로를 격려하며 덕릉고개로 내려섰다.
덕릉고개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과 마주쳤다. 수락산을 종주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었다. 기관차처럼 빠른 속도로 우리를 앞질러 가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수락산을 오를 것인가, 아니면 둘레길을 따라 하산할 것인가.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우리는 예전 군부대 자리로 보이는 곳의 시설물에 앉아 허기진 배를 채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담소를 나누니 식사가 더욱 꿀맛 같았다. 그리고 우리의 결론은, '수락산으로 가자'였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뒤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다. 등산로가 좁아 비켜주기 어려워, 우리는 본의 아니게 속도를 내어 그들보다 앞서 걸었다. 덕분에 산행 중간 전망 좋은 곳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때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산행도 그리 느린 것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수락산에는 철탑이 상당히 많다. 상계동에서 남양주로 넘어가는 거대한 철탑을 지나자, 불암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전망이 나타났다.
덕릉고개에서 수락산을 오르는 길은 한차례 가파르게 올랐다가 편안한 구간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오르기를 반복하는 형태였다. 도솔봉을 지나 게걸음으로 암릉을 즐기고, 바람과 세월이 빚어낸 바위 조각품들을 감상하며 무념무상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철모바위가 있는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등산화에는 기본적으로 암릉 등반에 유리한 릿지 기능이 있어 바위를 오르내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일반 운동화는 위험하다. 고소공포증도 없이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조심하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도솔봉을 직접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에 오늘은 우회하기로 했다. 수락산이 처음인 친구를 위해 최대한 체력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오르는 산은 코스를 몰라 힘이 배로 드는 법이다. 그래서 더욱 천천히, 경치를 즐기며 올랐다. 치마바위를 지나고 코끼리바위를 감상했다. 직접 가보겠다는 친구를 말리고 종바위를 옆으로 돌아 이동했다. 코끼리바위는 아래에서 봐야 제 모양이 보이지, 위에서 접근하면 그저 그런 바위들의 조합일 뿐이다. 뭐든 멀리서 조망할 때 더 아름다운 법이다. 철모바위 아래쪽 전망바위로 곧장 오르자는 친구도 말려 우회로로 안전하게 올랐다.
드디어 수락산 정상에 도착했다.
얼마 전 수난을 당했던 정상석 옆에 새로운 정상석이 하나 더 서 있었다.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여름이면 아이스크림을 팔던 아저씨가 오늘은 다른 물건을 팔면서 교통정리까지 하고 계셨다. 인증숏을 남기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사진사로 변신해 열심히 도와주는 모습이었다. 등산객들은 고마운 마음에 그의 물건을 하나씩 사주고 있었다. 참 장사를 잘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락산 정상 바로 아래, 경기도 방면에는 음식점이 하나 있다. 내가 등산을 시작한 20여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청계산 정상 아래에도 비슷한 곳이 있었지만, 단속으로 지금은 사라졌다.
이제 수락산의 명물인 홈통바위(일명 기차바위)를 지날지 고민했지만, 과감히 포기하고 장암역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장암역으로 바로 내려가는 길은 짧지만 그만큼 매우 가파르다. 예전에 한 번 내려가 보고는 너무 힘들어 그 뒤로는 거의 이용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수직에 가깝게 내려가는 길이었다. 우리보다 앞서가던 다른 등산객들도 힘에 부치는지 중간중간 쉬어갔다. 계곡에 물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 힘겨운 내리막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가파른 길을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홈통바위의 스릴을 즐기기 위해 간다고 했다. 인왕산에도 기차바위가 있지만, 수락산의 기차바위가 가장 멋지다고들 한다.
계속 내려가다 보니 작은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 4일간 연이어 내린 비 덕분일 것이다. 수락산(水落山)이 '물이 떨어지는 산'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순간이었다. 너른 바위가 많아 조선 시대 선비들의 한시라도 새겨져 있을 법했지만, 평소에는 물이 많지 않아서인지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도 물 없는 계곡은 그리 즐기지 않았나 보다.
석림사를 지나 드디어 장암역에 도착했다. 의정부시 장암동에 있는 장암역은 차량기지를 활용해 만든 역이라 그런지, 역으로 오르는 계단이 녹슨 모습이 조금 아쉬웠다. 그렇게 우리의 길었던 추석 연휴 마지막 등산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