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걸으면서 국토를 종단하는 것은 싶지 않다. 우리의 옛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강화도의 나들길을 다 걷고 난 다음 무엇인가를 하고픈 생각이 든다. 우리의 옛길을 복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걷는 길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하였고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국토종단을 한다. 우리는 대학생들처럼 떠들썩하게 국토종단을 할 수 없고 의기투합이 되어 야! 걸어보자 하고 시작했을 뿐이다. 대학생들이 걷는 길은 도보여행이 아닌 '극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잠깐 우리의 옛길은 남태령에서 시작하여 해남 땅끝마을까지 이어지는 삼남대로, 옛골에서 시작하여 부산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와 의주까지 가는 의주길이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삼남대로, 영남대로 등은 유생들이 과거를 위하여 한양까지 오늘 길이며 낙방한 거사들은 거기에서 힘들게 내려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의 옛길을 걸으면서 현대의 길과 다른 점도 볼 수 있어 더욱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삼남대로는 남태령에서 시작하여 해남 땅끝마을까지 이어지고 거기에서 제주까지 연결되어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고 보면 될 것이다. 3월에 시작하면서 거창하게 우리는 간다고 한 것이 아니고 삼남대로란 것이 있는데 걸어보자 하여서 시작하였고 아침 일찍 새로운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하고 강화나들길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이용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삼남대로 걷기가 6월 말까지 이어질지 몰랐다.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을 거치면서 우리 삼남지방의 특색을 알아볼 수 있었다.
친구와 둘이서 있는 정 없는 정을 다 쌓으면 14일을 걸었다.
이 길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능행차를 가던 길이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가던 길이도 하다, 첫날 걸은 길은 현륭원을 관리하던 용주사까지 걸었다. 정조대왕은 이틀에 걸려서 가던 길을 우리는 하루에 걸었다. 미친 짓을 한 것이다. 첫날부터 이렇게 걸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의기투합한 친구 둘이서 남태령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시작한다. 이제 남태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앱을 가동하였다.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걷는다.
남태령 옛길에 대한 설명이 있어 읽어보니 " 남태령 옛길은 한양에서 삼남(충청, 전라, 경상도)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보길이었다. 즉, 이곳을 지나 수원 안성을 거쳐 남쪽으로 갔으며, 반대로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을 거쳐 노들나루(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이르렀다.
원래 이 고개는 여우고개로 불이었는데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원(현릉원)으로 행차할 때 이 고개에서 쉬면서 고개 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임금께 속된 이름을 아뢸 수 없어 남태령(남행할 때 첫 번째 나오는 큰 고개)이라 아뢴이후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과천으로 길을 들어서기 전 갑자기 길은 관악산으로 가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난리가 난다. 무슨 일일까? 친구사이에 서로 쳐다보면서 알람이 이 시간에 왜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알람이 아니다. 새로 설치한 앱에서 우리가 갈길을 설정하였는데 우리가 길을 잘못 가고 있다고 우리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강화나들길을 걸으면서 헤맨 것을 생각하면 이제 문명을 이용하여 이제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게 되었다. 온온사, 관악산 입구, 과천향교, 가자우물, 인덕원 옛터까지 약 8.7km 거리이다. 이것이 1구간인데 우리는 이것을 무시하고 계속 걸을 예정이다. 과천성당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인 온온사(穩穩舍)는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갈 때 하룻밤 묵어갔던 곳이다. 온온사는 과천지역의 관아가 있던 자리이자 객사로 사용하던 건물인데 정조대왕이 하룻밤을 어찌나 편안하게 묵었던지 이 객사의 이름을 ‘편안할 온(穩)‘자를 두 번이나 써서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가자우물은 과천시 갈현동에 있는 우물인데 정조대왕이 행차하면서 이 물을 마시고 난 후 물이 참으로 차고 맛이 좋다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이 우물에 정 3품의 벼슬인 가자당상(加資堂上)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길 곳곳에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가자우물을 지나 들판 길을 걸은 후 인덕원 옛터에서 제1구간이 마무리된다.
인덕원에서 제2구간이 시작되고 백운호수에서 종료된다. 경기옛길은 이렇게 관리가 잘되고 스탬프를 찍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래서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재미도 곁들인다고 볼 수 있다.
백운호수로 이어지는 길에서 이곳저곳에 재미있는 조각들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은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나는 저 그림이 한 폭의 그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백운호수는 의왕시에 위치하고 있지만 안양, 의왕, 과천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운호수는 백운호수는 1953년에 준공한 인공호수로, 원래 농어촌정비법에 의한 농업기반시설로 안양과 평촌지역의 농업용수를 공급하였으나, 안양 평촌 지역의 산업화 도시화로 농지가 사라져 지금은 호수가 되었고, 백운산과 청계산이 둘러싸고 이들 계곡의 물이 호수로 흘러들기 때문에 물이 맑고 풍경이 수려하다. 백운호수에서 2구간이 종료되고 3구간이 시작된다. 사실 2구간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백운호수부터 지지대비까지가 제3구간인 모락산길인데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이기도 하다. 백운호수와 연결된 이 길은 모락산 동쪽으로 이어지고 정조대왕 능행차가 쉬어가던 사근행궁터를 지나고 골사그네를 경유해 지지대비가 있는 지지대고개까지 약 12.6km에 이른다. 삼남길을 걸으면서 경기도가 삼남길 곳곳에 재미있게 관련 설화나 예화를 비치하여 더욱 재미나다고 할 수 있다. 모락산길을 걸으면서 모락산 이름 이야기를 보았다.
모락산 이름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조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둘째형 세조가 셋째형 안평대군을 죽이고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신병의 위험을 느껴서 몰래 이곳으로 피신하여 절터골로 불리던 계곡에 토굴을 파고 숨어 지내면서 매일같이 산 정상에 올라서 풍우한서를 무릅쓰고 대궐을 향하여 망배례를 드리며 종묘사직과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조카인 단종을 추모하는 마음이 사무쳐서 수시로 유배지인 영월 쪽을 향하여도 절을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서울을 사모하는 산'이란 뜻으로 그림을 뜻하는 모자와 서울락자를 써서 목락산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모락산 정상 부근 서북쪽에 있는 사인암에서 보면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서해바다까지 잘 볼 수 있다.
의왕시내로 들어온 길은 사근행궁터를 지나고 지지대고개로 방향을 잡는다.
우리 땅은 산이 많다. 그래서 산그늘로 다니지 못하고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다녔다. 그래서 도로가 발달하지 못하고 수례도 발달하지 못하였다. 하천을 이용한 연안으로 물자를 한양으로 공급하였고 그 결과 한양에 포구가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마포, 영등포, 노량진 등이 이러한 예로 보면 될 것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건설하고 현릉원에 참배하기 위하여 며칠에 걸쳐서 한양에서 현릉원까지 이동을 한 것이다. 지지대고개는 요즈음은 국도 1호선이 넘고 있고 그 넓은 도로가 자동차로 가득하지만 예전에는 그리로 다니기보다는 능선을 이용하여 다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지지대 고개에는 지지대비가 있다.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아들인 순조가 재위 7년 화성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로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 능인 화성의 현릉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능을 뒤돌아 보며 이곳을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따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지대 고개를 넘어 용주사로 가기 위하여 수원을 지나는데 재미있는 전시관이 있어서 들려본다. 화장실문화전시관이라고 한다. 삼남길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화장실은 예전에는 멀리 있어야 했는데 요즈음은 가장 가까이 있다. 예전에 처갓집도 멀어야 한다고 했는데 요즈음은 가장 가까이 있다. 이것이 세월의 변화라고 할 것이다. 화장실과 처갓집이 멀어야 했는데 아니다.
지지대비에서 서호공원 입구까지 제4길인 서호천길 7km은 지루하기만 하다. 서호공원 입구까지 서호천을 따라서 걷기만 한다. 지지대비에서 시작해 서호공원 입구에서 끝나는 8킬로미터 구간의 도보여행길로, 단순하게 길만 걸으면 편도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주변 볼거리까지 함께 보면서 걷는다면 3시간에서 3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이다. 출발지점부터 해우재 화장실문화전시관까지 전체 경로의 4분의 1은 산길과 일반 도로이며, 이후부터는 서호천 둔치 산책로를 따라 걷기 때문에 비교적 걷기 쉬운 길이라 할 수 있다. 화서역까지 이어지는 근린공원, '서호꽃뫼공원'이고, 길 오른편 야산은 여기산공원입니다. 여기산 공원과 그 주변은 야생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백로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수원은 계획도시다. 조선시대에 계획도시는 한양과 화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양은 태조가 나라를 건국하고 도시를 만들었고 화성은 정조가 천도를 위하여 만든 도시이지만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애착을 갖고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서호도 계획도시의 일종으로 만든 것으로 현재는 수원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철새들도 사랑을 한다. 호수 가운데 있는 섬은 백로의 서식지가 되어 고사되고 있지만 그래도 백로가 노닐고 있다. 서호는 수원시청에서 "축만제(서호)는 1799년(정조 23년)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에 길이 1,246척, 너비 720척으로 당시로서는 최대 크기로 조성된 저수지이다. 2016년 11월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세계총회에서 축만제의 가치가 인정받아, 세계 관계 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수원팔경 중 하나인 '서호낙조'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 해질 녘, 서호에 여기산의 그림자가 덮이며 그 위로 석양이 내리면서 서호를 찾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2020년 3월 1일 서호는 공식적으로 서호는 축만제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아직까지 우리에는 서호로 더 알려져 있다.
서호까지 이른 길도 거의 35km를 걸었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있어 다음 구간이 배양교까지 걷기로 하였다. 사실 여기에서 중단을 하면 다음에 접근을 하기도 쉬운데, 다음 구간이 밋밋하여 그래도 걸어보기로 하였다. 배양교까지 걷는데 지금은 수인선이 완전 개통되었지만 걸을 당시에는 폐선이 된 협궤열차 철로가 있어 나름대로 아! 이것이 그 협궤열차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협궤열차는 1937년 7월 11일에 개통되어 수원시에서 안산시, 시흥시(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화성군, 시흥군)를 지나 인천광역시(당시 행정구역으로는 인천직할시)까지 오가는 철도 노선이었으며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궤간 762mm의 협궤철도였으며 1995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영업한 후 모든 선로가 철거되고 영업도 중지되었으며 부분적으로 선로가 남아 있었고 소래포구 철교 등 일부 철교 위 구간에는 레일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2016년 당시 걸을 때는 볼 수 있었는데 수인선 직결 공사로 인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고 한다.
배양교까지 지루한 길을 걸으면서 거기에서 대중교통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고민하였는데 그래 걷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곳까지 하고 걸으니 현릉원의 원찰인 용주사까지 걸었다.
용주사 입구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병점역으로 이동이 용이하여서 1일 차 일정을 마감하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산행을 하거나 둘레길 등을 걸을 경우 시작하는 곳과 마치는 곳은 항상 대중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특히 시작하는 지점은 택시 등을 이용하여서 접근할 수 있지만 마치는 지점은 시내버스 등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점을 선택하여야 한다.
삼남길을 걷기 시작하여 벌써 45km를 걸었다. 첫날 45km를 걸으면서 물집도 생기고 하지만 일주일 후에 다시 시작하니 그래도 견딜만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침 8시에 시작하여 오후 6시에 마쳤으니 꼬박 10시간을 걸은 것이다.
1일 차 종료도 서호 시작점에서 종료를 준비하였으나 너무나 빠른 시간이라 좀 더 하다 보니 용주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사실 둘레길을 만드는 주최 측도 이러한 부분을 십분 고려하여서 만들지만 한계가 있다고 본다. 용주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병점역으로 이동하여 복귀를 한다. 역 근처에 오니 왜 이렇게 많은지 떡집이 많다. 사실 병점이라는 한자를 풀어보니 떡집이다. 지명유래를 찾아보니 "이 지역은 예부터 삼남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쉬었다 가는 행인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을 상대로 떡을 파는 떡 장수 들이 많아 마을 이름을 '떡전거리'로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해서 병점(餠店)리가 된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