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차다. 3월이 가고 4월이 되었다. 용주사까지 걸은 후 일주일이 흐른 사이에 1일 차 당한 부상(발바닥 물집)을 회복하고 이제 2일 차에 들어선다. 2일 차에 우리는 걷는 데까지 걸어보자는 취지고 지난 회차의 걷는 거리 45km 근처를 걸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지하철을 타고 시작하고 지하철을 타고 복귀하였지만 이번부터 좀 더 멀리 서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이제는 지하철이 아닌 무궁화, 새마을호, KTX를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도시 간 이동은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교통체증에도 걸리지 않고 피곤한 몸을 휴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부하뇌동 둘은 영등포역에서 만나 병점으로 동시에 이동하면서 오늘 걸을 길에 대하여 이것저것 이야기해본다. 1일 차의 무용담도 이야기하고 우리가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지도 이야기해본다. 우리가 봄에 시작하였고 여름이 되면 도착하지 않을까 이야기해본다.
병점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용주사까지 이동을 한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이른 시간이다. 남들이 보면 사나이 둘이서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는가 보다 생각을 할 것이다. 그곳은 산도 없는데 고개를 가웃 하는 분도 있다. 용주사에 도착하니 용주사는 활짝 열려있지만, 우리가 용주사에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용주사는 하나의 기점이니 스쳐 지나간다.
용주사를 출발하여 동탄, 오산, 평택까지 걸어갈 것이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다. 이곳에 거주하지도 않았고 이 근처에 와본 기억이 없어서 더욱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일 차 병점까지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곳이어서 그래도 정감이 있었다.
용주사에서 남쪽으로 길을 재촉하다 보니 세마교에 도착하였다. 특별한 정취는 없다. 코스도 그렇게 길지는 않다. 시내를 가로질러 간 후 하천을 만나고 세마교에 도착하니 1구간이 끝났다. 속도가 많이 난다. 등산을 하는 것보다 평지를 걷는 것이다 보니 쉬운 것일까 하면서 우리는 걸었다. 세마교에서 이제 독산성을 향하여 걷는다.
등산을 주로 하는 우리가 만나는 산길은 그래도 쉽다. 남들은 그것이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는 쉽게 쉽게 올라간다. 오산시민들이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독산성이다.
화성시에서 안내하는 바에 따르면 "독산성(禿山城)은 독성산성(禿城山城)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1,100m이고 오산과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어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전락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백제가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5년(1592) 12월에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 주둔하며 왜군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서 경기지역으로 북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도 도성을 방어하는 한 축을 담당하였다. 한편,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께 4일 만에 성벽을 새로 쌓았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이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정조 16년(1792)에는 약 70일간 신축에 가까운 대규모의 수축을 진행하였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독산성에 대한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현재 성내에는 세마대(洗馬臺)가 있는데 “화성지(華城誌)”에 의하면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성안에 물이 부족함을 알고 왜군이 포위하였는데, 말을 산 위로 끌어다가 쌀로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자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으며, 이후 그곳을 세마대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문 내에 보적사(寶積寺)가 자리하고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화성시민 휴식터가 되고 있고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친 권율 장군의 이야기는 더욱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독산성을 뒤로하고 녹지축이 이어지면서 보적사 동탄 어린이천문대를 거쳐 삼림욕장을 지나서 계속 길을 가다 보니 금암동 고인돌 공원에 도착하였다.
강화나들길을 걸으면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고인돌군을 보았고 전남 화순에 있는 고인돌도 보았다. 강화도의 고인돌은 하점면과 양사면에 걸쳐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탁자식 고인돌을 볼 수 있다. 탁자식 고인돌이란 지하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시신을 노상에 안치하고 사면을 판석으로 가린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형태를 말한다. 전남을 여행하면서 전남 화순의 고인돌군을 보았는데 고인돌 안내판을 보면 전남 화순의 효산리와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96기(고인돌 287기, 고인돌로 추정되는 309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뤄 집중 분포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화성에서도 고인돌 지역을 제 나름의 공원으로 조성하고 학습장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오산 시민들의 휴식처인 맑음터공원은 본래 쓰레기 매립장이었지만, 오산시가 2005년부터 1365억 원을 들여 매립장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고 ‘맑음터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맑음터공원에는 인라인 스케이트장, 농구장, 배드민턴장 등이 갖춰져 있고, 자연형 폭포, 생태연못 등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였다. 오산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76m 높이의 전망대인 에코리움은 맑음터공원 주변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오산시의 명소이지만 올라가지는 않았다.
이제는 평택으로 진입을 한다.
무봉산 아래에 가곡리가 있는데 경주 이씨 상서공파의 집성촌이 있고 일본의 강점기시 이 마을의 6형제에 대한 이야기 있었다. 이들은 우리도 알고 있는 내용으로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위태롭자 명문가의 특권을 버리고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국권을 상실한 후 이화영, 이시영 등 6형제가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 무관학교를 세우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키워냈다고 한다. 이들은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후 6형제 중 유일하게 이시영이 돌아왔고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평택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모범이라고 안내를 하고 있었다.
평택의 옛 중심은 진위다. 진위에는 진위향교가 있다. 향교는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지 않다, 오늘도 문이 닫혀있다. 내가 향교를 찾아가는 곳 중 열려있는 곳은 10의 9는 닫혀있다. 일반국민들과는 완전히 단절된 장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위에 대한 설명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본래 고구려의 부산현(釜山縣, 또는 金山縣)이었고, 백제 때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 하였다가 신라 경덕왕 때 진위로 고쳐 수성군(水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는 그대로 따르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고 뒤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1398년(태조 7) 충청도 관할에서 경기도로 이속 시켰다. 1895년(고종 32) 진위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원군의 일부와 평택군을 병합하였으며, 1938년 평택군으로 개칭하였으며, 1949년에 진위면이 되었다."
지금은 진위의 왼쪽에 있는 곳이 중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못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위로 들어서면서 이곳에 있는 많은 공적비를 보았다. 공적비는 떠나가는 사람에 대하여 다분히 그 사람의 공적유무를 떠나 그 사람이 중앙 정계로 갈 경우 추후에 그 공적비가 있는 마을은 그래도 기억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담긴 비라고 본다. 그 사람이 한직으로 갈 경우 우리네 인심은 그렇게 좋게 처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공적비는 그 지역의 유명인사 등이 포함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위면 소재지가 있는 곳은 옛날의 영화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를 건너 산으로 향한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예전의 우리 조상들은 능선을 주로 이용하였기에 능선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평지에 진위가 있었고 그곳이 발달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산 능선을 걷는데 연세 드신 분들이 다정하게 걷는다. 이 동네에서 산행을 하시는 것 같다.
어느 정도 가니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젊은 친구들이 토요일을 맞아 능선을 걷는다. 이웃한 원균 장군묘를 거쳤다는 사실을 후에 알았다.
진위를 지나 원균 장군묘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삼남길을 걸으면서 처음 알았다. 저기는 가묘일 것이라고 본다. 원균 장군은 칠천량 전투에서 왜군에 패하여 숨진 것으로 나오고 그다음은 실제로 역사책에서 찾을 수 없었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영웅시하였고 그 대척점에 있는 원균은 나쁜 사람으로 모든 것이 알려진 상태였으며 간신배로 우리는 기억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선조가 이순신을 몰아내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후 원균에게 부산에 있는 왜군을 섬멸하라고 하였으나 원균도 이순신과 같이 전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결과 왜군을 섬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출천하지 않아 도원수가 태형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균 또한 선조에 의하여 임진왜란 전란 중에 전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어디에도 없었고 친척들이 고향인 경기도 평택에 가묘를 만들어 봉했으며 추후 평택시에서 이를 정비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조도 후에 미안하였던지 재위 중에 권율, 이순신 등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으로 추록하였다.
16년도 평택은 산전 벽해를 이루고 있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평택에 대규모 투자를 함에 따라 택지개발과 산업단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가면 길이 있는가 보다 하고 가보면 길은 없어지고 택지개발 중이고 저리 가면 될까 하고 가보면 산업단지 개발 중이다. 평택에 많은 돈이 들어오고 평택에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어 아파트는 우후죽순으로 올라갈 것이다. 평택은 배가 유명한 것 같다. 이웃한 천안의 성환지역의 배가 유명하여서 그런지 이곳도 구릉지역을 중심으로 배 과수원이 곳곳에 있다. 배꽃이 피어 있다. 하얀 배꽃이 그렇게 예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배 과수원을 지나면서 이 꽃 저 꽃을 사진에 담아본다.
반면 벚꽃은 어디에서 보나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집단으로 있을 때에도 그 풍취가 나지만 모퉁이 등에 나 홀로 있을 때에도 만개하였을 때 그 자태가 더욱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서도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그 사람의 흉륭한 자태가 나올 때도 있지만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도 몸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새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길원을 지나게 되었다. 삼남길을 안내하는 사이트에서는 "갈원은 삼남대로의 역원이 있었던 곳으로, 일찍부터 삼남대로의 중요한 요지였으며. 이 지역의 새마을운동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곳에 있는 옥관자정에는 인조 임금이 우물의 물맛이 좋아서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제 평택의 끝에 다가온 것 같다. 오늘 여정은 평택까지다. 평택까지 오면서 대동법 시행 기념비까지 걷기로 하였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다 하고 우리는 생각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오버를 하였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가 있는 곳은 현재는 약간 왜진 곳이다. 예전에는 이길로 많은 사람들이 다녔으나 현재에는 새로운 길로 사람들이 다니기에 그런 것이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안내하기를 대동법은 현물세였던 공납을 쌀로 납부하게 하여 임진왜란 이후 궁핍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탐관오리의 횡포를 막은 획기적인 제도였으며 애초에는 경기도에만 시행되었지만 잠곡 김육의 적극적인 활동 덕분에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될 수 있었고 김육이 죽은 후 이를 슬퍼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았고, 충청과 경기의 경계가 되는 이곳에 그를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한다. 아담한 정각이 이채롭다.
대동법은 물납 위주에서 쌀로 공물이 바뀌었다는 것이고 사실 당시에 쌀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았지만 그래도 현물이 아닌 쌀로 바뀌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사실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화폐 유통이 원활하였다면 화폐로 대체되었을 것이지만 조선시대에 화폐로 유통이 활발하였던 상평통보는 숙종때부터 주조, 유통된 사실에 비추어 선조, 광해군 시절에는 쌀로 이를 대체하였다는 것도 획기적인 것이라고 본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우리가 그 꼴이 났다. 평택 끝 경기도 끝까지 가서 오늘 일정을 끝내려고 하였는데 대동법 시행 기념비에 도착하니 거의 해가지고 있다. 이제 경기도 끝까지는 2km 남짓이다 저기 가서 끝을 내자 하고 둘이서 부하뇌동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끝을 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평택역으로 가서 서울로 복귀하여야 하였으나 그렇지 못하고 계속 걸었다. 4월 초 낮은 생각보다 짧다. 춘분이 지냈지만 그래도 낮은 7시가 약간 넘으면 어두워지고 우리가 갖고 있는 헤드랜턴에 의존하여 길을 걷어보았다. 하지만, 수렁이다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칠흑 같은 어둠은 찾아오고 조그마한 랜턴에 의존하여 길을 걷다 보니 경로도 잃어버린다. 핸드폰의 배터리는 다되어 가서 앱을 이용하여 경로를 찾기에도 한계가 있어 삼남길을 안내하는 표지에 의존하여 걸었다. 안성천교까지 가서 끝내야 한다. 천안시와 평택시의 경계에 도착하니 8시 30분이 넘었다. 여기는 처음이라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안성천위에 있는 다리에서 자동차들은 무섭게 지나간다. 빈 택시도 없다. 그냥 안성천교 위를 무심코 걸었다. 다리 위를 지나는데 인도도 없고 차도와 다리 경계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서 나왔다.
다리를 건너와서 오늘 걸은 거리를 보니 51km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하여 9시까지 걸었으니 13시간을 걸었다. 집에서 아내들이 전화를 한다. 도대체 이 시간까지 걸었다는 말이 되는야는 이야기다.
이것이 과유불급이다.
평택역에 도착하여 이제는 지하철이 아닌 도시 간 이동을 위하여 기차로 무궁화호를 탑승한다.
3일 차에 이 길에서 우리가 평택역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이 다리가 아니라 100m 아래에 있는 옛다리였다. 우리가 도착한 길은 새로 만든 다리로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았고 택시도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남태령에서 경기도를 벗어나기까지 2일이 걸렸다. 옛사람들은 이 길을 3-4일 걸려서 이동을 하였을 것인데 미친 짓을 한 것이다. 경기도에서도 10구간으로 나누었으며 그에 맞게 2구간이나 3구간을 나누어서 1일씩 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1일 5구간을 하였으니 말이다.
추후 이 길을 걷는다면 1일 3구간에서 4구간까지 하여 쉬엄쉬엄 걸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