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있어서 강화도는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중요한 곳이었으며 그 결과 야외 박물관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강화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곳은 전등사, 보문사 등의 사찰과 석모도, 교동도 등의 섬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말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역사가 있었고 운양호 사건 등에 따라 강화도는 방어를 위한 돈대 등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들의 주요한 여행지가 되고 있다.
전국체전이 있으면 강화동 마니산 참성단에서 전국체전의 성화를 채화하여 전 국민들이 TV로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을 보기도 하였지만 강화도 구석구석은 다녀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전등사에 있는 사고가 있었고 조선의 철종 대왕이 이곳 강화도령으로 알려져 있다.
도보여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걸어보고픈 길이 강화나들길이다. 산행에 식상할 때 우리들은 이 길을 걸었다. 2016년 1월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걷기 시작하여 따뜻한 봄이 시작되기도 전에 마쳤다.
1월 그 매서운 바닷바람을 안고서 걸어보니 왜 섬에 사는 것이 어려운지 알겠고 강화도에서 논농사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알았다.
1월이 시작되면서 산행을 하기보다는 그래도 의미 있게 한번 걸어보자 하여 강화를 들어가는 3000번 버스를 탔고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강화나들길에 대한 수첩과 안내지도를 받으면서 강화나들길을 시작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강화나들길 안내소는 강화버스터미널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도 시작이니만큼 1코스부터 걷는다. 1코스는 강화읍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시작하여 갑곶돈대 즉, 강화대교까지이다. 강화읍을 지날 때 1번이라는 푯말을 보면서 지나는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다. 어디나 처음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둘이서 서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을 하였으며 걷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리본이고 이것이 화살표이며 이것이 표지석 등등을 이해하기 급급했다고 할 수 있다.
1코스는 동문 > 성공회 성당 > 용흥궁 > 고려궁지 > 강화향교 > 은수물 > 북문 > 북장대 > 오읍 약수 > 연미정 > 옥개 방죽 > 갑곶 성지 > 갑곶돈대다. 첫 코스인 만큼 이를 찾아가는 것이 급급하다. 동문 근처까지 가서 이 방향이 맞는지도 혼란이 왔고 지도를 보면서 추적을 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성공회 강화성당을 지나면서 새로운 것을 보았고 용흥궁이 왜 그런지 모르고 지나갔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강화에는 성공회 성당이 있고 보존이 잘되어 있다. 그 이유는 1890년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고요한(C. J. Corfe) 주교를 비롯한 성공회 신부들이 1893년 강화도 갑곶 나루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성공회신학대학원도 강화도에 개교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도 강화읍과 온수리에 성공회 성당이 남아 있다고 한다. 첫 번째 보는 성공회 성당은 겉모양은 한옥이지만 그 구조와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을 따른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기와지붕에십자가를 올린 특이한 구조가 있어 무엇일까 궁금하였고 강화를 모르는 이에게는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었다고 할 수 있다. 강화가 야외박물관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 첫 번째 예이다.
성당 내부는 그날따라 개방이 되지 않아서 보지 못하였다. 다만, 영국의 대표 수녀가 이곳을 방문한 기념석이 있어 한국과 영국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란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용흥궁이다. 용흥궁이 무엇인지 몰랐다. 웬 궁이 강화도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철종 대왕이 강화도령이다.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궁이라고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처음에는 초가집이었으나 강화유수가 이를 용흥궁으로 명칭을 바꾸고 기와집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용흥궁 공원을 지나 고려궁지 앞으로 지나간다. 고려궁지 앞에서 천주교 성당이 있다. 강화성당 하면 인터넷에 찾으면 이곳을 안내한다. 앞에서 소개한 강화 성공회 성당을 가고자 하는 경우에는 강화 성공회 성당으로 찾아야 한다. 우리의 주류는 천주교 성당이기 때문이다.
강화는 몽고의 칩 입시 무신정권에 의하여 개성에서 강화로 옮겼고 39년 동안 사용한 곳이다. 고려궁지에 가면 고려와 관련된 시설이 있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측을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고려궁지에 대한 설명을 해 놓은 표지석에 있다. 표지석을 보면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할 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조선으로 넘어와서 왕의 행차 시에 머무는 행궁 외에도 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장년전, 만녕전 등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식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등이 남아 있다.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침입하여 문화재를 약탈하고 불을 질러 소실되었으나 복원되어 있는 상태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KTX를 수출하면서 한국에 장기임대 형식으로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준 것이 이 외규장각 도서이다.
이러한 결과 고려와 관련된 시설은 이곳에 남아 있지 않고 고려궁지가 된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 정부의 모든 것을 부정하듯이 전 왕조의 모든 것이 현 왕조의 건물로 대체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제 강화향교다. 강화향교는 역사가 깊다. 설명에 따르면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세워졌고 그 뒤 여러 차례 옮기고 복원하였는데, 지금 있는 위치는 조선 영조 7년(1731년) 유수 유적지가 옮긴 것이며, 남아있는 건물로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이 있다고 한다. 향교는 어디나 문을 닫아 놓고 있는데 이곳도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있다.
은수물 약수터를 지나 강화여자고등학교 뒤편의 언덕을 지나 산길로 조금 가니 산책로가 있고 북문이다. 진송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고려가 환궁할 때 모두 헐었으나 조선 전기에 성을 쌓을 때 복원되었으나 병자호란 시 청나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 숙종 때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강화읍민들에게 있어 북문성길과 함께 괜찮은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북장대로 올라가는 북문성길이 있다.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사양한다.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나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피할 수도 없다.
오읍 약수터를 거쳐 연미정에 이른다. 정자가 있다. 2016년도에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확성기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교란 전을 하였다. 연미정에 도착하니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소음이 들려왔고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북에서 확성기로 방송하는 것이었다. 월곳 돈대가 있는 곳이었다.
강화도와 육지는 그렇게 멀지도 않으면서 임진강과 한강이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로 흐르고 있다. 한줄기는 서해로 한줄기로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그것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하였으며 그곳에 세워진 정자를 연미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한양으로 배들이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간조시에는 못 들어가고 만조시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 근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갔다고 한다. 서해의 조수간만의 차가 워낙 커 이러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본다. 강화해협의 흐르는 물을 염하강이라고 하고 서해로 흐르는 물을 조강이라고 한 만큼 바닷물이라기보다는 강물처럼 바닷물이 흘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화도를 걷거나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바다 바로 옆에 물을 모아 놓은 곳이 있다. 이곳을 방죽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바닷물을 차단하고 민물을 모아 둔다. 강화도는 섬이고 간척한 땅이 많아서 논농사를 위한 물이 많이 필요한데 그것이 부족하니 민물이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바닷물이 육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죽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알 것이다. 왼쪽이 강화도의 옛 모습이고 오른쪽이 간척을 한 현제의 모습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는 간척을 하였다. 마니산이 있는 부분은 별도의 섬이었으나 현재는 간척이 되어 같은 섬이 되었다.
석모도, 교동도도 2개의 섬이 1개의 섬이 된 것이다. 1개의 섬이 되면서 그만큼 농토가 늘어났다. 옛날에 간척되지 않은 강화도를 공격하는 것은 힘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섬에 상륙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몽고가 강화도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갯벌에 군사가 상륙할 수는 없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갑곶돈대이면서 갑곶 성지다. 현재는 강화대교가 지나는 곳이다. 강화대교를 건너서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병인박해(1866~1871)로 성직자 12명 중 9명과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명인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신부를 배를 이용하여 천진으로 탈출시키고, 상해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는 2002년 강화도의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위쪽 동산에 '한국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하여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께 봉헌하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갑곶돈대가 1코스의 마지막이다. 강화군에서 설명한 자료를 보면 ‘돈대’란 평지보다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또는 성 안 높은 평지에 만들어진 포대를 말하며,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강화 갑곶돈대는 고려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온 뒤 몽고와 치렀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켜내던 중요한 요새로서 병인양요(1866년) 때는 프랑스군 6백여 명이 갑곶돈으로 상륙했고, 정묘호란 때는 인조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오기도 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갑곶돈대에는 천연기념물인 탱자나무가 있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라고 한다. 이 북방한계선을 이용하여 총을 들고 전쟁을 하는 현대전이 아닌 경우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였다고 한다.
강화 전쟁 박물관도 있다. 강화에서 입장권을 패키지로 판매를 하는데 왜 그런지 몰랐다. 전쟁박물관, 광성보 등을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은 단일권과 패키지권으로 판매를 하는데 우리는 단일권만 구매하여 강화 전쟁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강화는 야외박물관인 만큼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입장권도 있었으면 좋겠다.
코스의 마지막 지점이자 새로운 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하루에 30km 이상은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는 여기까지 와서 시간을 보니 14시 밖에 안되고 18km 정도 걸어 아쉽다. 그래서 다시 2코스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