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보여행 강화나들길 2코스

1일차(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

by 김기만

1코스를 마치고 아쉬움이 가득한 가운데 2코스로 향한다.

강화나들길을 걸으면서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강화터미널에서 순환버스가 1번과 2번이 있고 1번은 왼쪽으로 순환, 2번은 오른쪽으로 순환하여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걸으면서 강화의 다양한 역사를 볼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더 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갑곶돈대에서 포대도 보고, 박물관도 관람한 후 이제 초지진으로 향한다. 강화는 요새인 만큼 돈대가 곳곳에 있다. 이러한 돈대를 스탬프로 찍는 것도 하나의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강화의 돈대를 정리한 자료를 찾아보니 참 많다. 민통선 이남 지역의 돈대만이라도 스탬프를 이용하여 찍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본다.

저 돈대에 포대를 설치하고 접근하는 적에게 포탄 공격을 하면 구식 전쟁에서는 천하무적의 요새가 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신식 전쟁에서 포탄이 1km 이상은 기본이고 소총도 유효사거리가 3-400m 되니 구식포는 유효사거리가 3-400m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포를 쏘면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암초가 곳곳에 있다.

오늘 2구간은 실제로 관리되고 있는 돈대는 갑곶 돈, 용당돈, 화두돈, 오두돈, 광성돈, 용두돈, 손돌목돈, 덕진돈, 초지돈이다. 이곳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지나갈 것이다.


다리미 선착장을 지나는 데 장어촌이다. 배는 고픈데 장어는 느끼하다고 할 수 있으나 먹고 싶다는 욕망은 있지만 그래도 운동하려 와서 친구랑 둘이서 아내들을 두고 장어를 먹기에는 부담감이 있다. 지나친다. 강화의 장어는 강화군청에서 말하기를 해안가의 바다 갯벌을 막아서 만든 어장에서 남서해안의 양만장에서 길러낸 1kg당 2~3 마리 되는 크기의 장어를 구입하여 갯벌어장에서 75일 이상 자연 순치시킨 장어라고 한다. 갯벌 냄새와 비린내가 거의 없고, 고소한 맛과 담백한 맛이 다른 장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는데 먹어보지 않아서 그 품평을 할 수는 없다.


장어촌을 지난 후 용당돈대다. 숙종 5년에 쌍은 49개 돈대 중 하나로 가리산돈대, 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북서와 남동방향은 강화외성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4개의 포가 설치되었고 건물지가 남아 있다.

강화외성이 있다. 강화외성은 고려 강화 도읍기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 영조 때 강화유수 김시혁의 건의로 벽돌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전성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지만, 강화 전성은 지금 겨우 2백여 미터 정도 남아있어 그 희소성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오두돈대 남쪽 아래의 음식점 주차장 해안가 성곽에서 볼 수 있다.

이제는 배고픔을 해결하여야 한다. 사실 어디에나 도시락을 들고 산행을 하고 도시락을 들고 둘레길을 걷는다. 하지만, 둘레길은 그래도 근처에 식당이 있어 해당 지역의 경제활성화를 위하여 식당을 이용하는 일이 많다. 강화도 첫날인 만큼 길을 지나면서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고 누구나 찾는 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이동을 계속한다.


화도돈대를 지나 오두돈대에 도착하여 유적지 탐방 계속이다.

오두돈대는 지형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오두)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으며 원형으로 지어졌으며 지름이 32m에 달한다. 동남쪽에 오두 정자터가 있다. 곳곳에 화남 고재형의 시가 있다. 강화도 곳곳을 노래한 것이다.


오두동(鰲頭洞) -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


一村花樹列成庄 꽃나무로 동산 이룬 오두리 마을에선,

於讀於耕日月長 글 읽기와 농사일로 세월을 보내네.

最愛此中丹桂籍 그중에서 소중한 일은 과거에 급제한 일이니,

永承雨露放餘光 나라 은혜 길이 이어 큰 빛을 발하리.

광성보에 도착하였다. 광성보의 안해루를 기점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신미양요 때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고 한다.


어재연 장군도 이곳에서 전사를 하여 무명용사 순국추념비도 있고 어재연 장군 추모비도 있다. 영남길을 걷다 보면 어재연 장군 생가가 있는데 그분이 여기서 순직을 한 것이다. 신미양요 당시 오늘 마지막으로 도착할 초지진으로 미군이 상륙하여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는데 조선군은 열악한 무기 때문으로 참패를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쌍충비도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대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순수절비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 62cm의 양면비로 1873년 건립한 것이며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의 순절비인데 폭인 177cm, 너비 58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대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도 있다. 용두돈대는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 위에 만들어진 돈대이다. 외성에서 100m의 통로로 연결돼 있으며 신미양요 때 파괴되었다가 1970년대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용두돈대 앞이 염하강이라고 하는 강화해협에서 물살이 가장 빠른 손돌목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용두돈대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곳에서 어떻게 방어를 할 수 있지 적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데 하였는데 강화도가 간척되기 전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곳은 옹성이 되는 것이다. 돌출부에서 적의 공격을 미리 확인하고 미리 공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손돌목을 지나면서 손돌목에 대한 전설을 보았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해 초지(草芝)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이때 손돌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뒤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몽고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을 죽이자 적이 뒤따라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다. 왕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해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날은 10월 20일이었는데, 그 뒤 이 날이 되면 손돌의 원혼에 의해 매년 추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에 이를 ‘손돌바람’이라 하고, 이 여울목을 ‘손돌목’이라 하였다. 이로 인해 어부들은 이 날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평인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손돌설화)]


광성보를 지나면서 입장료를 내었는데 초진진에서 출발한 나들길을 걷는 사람들은 돈을 내지 않았도 되었다. 무엇인가 불합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불공정하다고 한다. 차라리 돈을 받지 말든지 아니면 관리를 잘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제 덕진진이다. 덕진진에도 입장료를 받으니 친구가 말하기를 이거 나들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강화를 여행하면서 입장료를 내는 것이네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강화도에서 나들길을 걷는 여행자들에게 정액권을 발부하고 그들에게 그 정액권으로 입장을 시키면 일거양득이 아닐까 생각한다.

덕진진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고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덕진진을 거쳐 초지진에 도착하니 성벽 위의 노송이 불빛을 받아 더욱 독야 청정하다. 초지진은 효종 때 구축한 요새로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이곳이 격전지라고 한다.

멀리 있는 등대에서 강화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에게 암초가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바다 위에 초지대교의 불빛은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다리만이 보일 뿐이다.

하루 동안 1코스와 2코스를 걸으면서 강화는 역시 야외박물관이라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고려궁지만 보았지만 고려시대와 관련된 유적은 보지 못하고 조선시대의 유적만 보았다.

3코스에는 고려시대와 관련된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