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보여행 강화나들길 3코스, 4코스

2일차

by 김기만


오늘은 온수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하는 3코스이다.

강화가 고려가 대몽항쟁을 하면서 39년 동안 도읍이 되었고 그때의 권력자들의 무덤이 있는 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규보 선생의 묘도 지나간다. 아울러 이웃에 전등사도 있다. 전등사는 나들길 위에 있는 사찰이 아니나 온수 공영주차장에서 1시간 이내에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지만 이번 길에서는 제외하였다.


온수 공영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이다. 여기에서부터 길을 잃어버리고 동네를 헤집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을 한다. 이 길인가 하고 찾아가 보면 아니다. 저길 인가 하고 찾아가 보면 아니다. 결과는 우리가 착각을 한 것이다. 길을 헤매었지만 다양한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온수 성공회 성당을 확인하고 나서부터 헤매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溫水里聖堂)은 1906년에 건립된 대한성공회한옥 성당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용마루 양끝에는 연꽃 모양으로 된 곡선미를 살린 돌 십자가가 달려 있다. 성당 주보 성인이 성 안드레아라서 성 안드레아 성당이라고도 한다. 한옥성당 옆에는 2004년에 축성된 새 성당이 있어 담아 보았다.

성공회의 지역아동센터 건물이 붉은 벽돌로 예쁘게 되어서 담아보았다.

우리에게 고려의 유적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될 것이다. 어디를 다녀도 한강 이남에 있는 신라, 백제, 조선의 문화가 우리에게 익숙하고 고구려 유적의 경우 아차산 등에 있는 고구려의 보루를 보았을 뿐이다. 고려시대의 유적은 대부분이 현재 개성 인근에 산재해 있고 서울을 반경으로 하였을 때 볼 기회가 없었는데 처음으로 강화에서 접한다. 고령궁지에서 궁지만 있었고 고려의 유적이 아닌 조선의 유적만 확인하였다.

이제 이 길에서 고려의 유적을 보게 된 것이다. 이규보 선생의 무덤이다. 학교를 다닐 때 이규보 선생에 대하여 고려시대의 문장가였다는 것을 배웠다. 묘 앞에 상석과 장명 등이,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과 석양(石羊) 1쌍, 묘갈이 배치되어 있다. 묘 주변의 석물 중 문무석은 당시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며, 석양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고려시기의 조각이다. 묘와 약간 떨어진 곳에 재실이 있다.

이규보 선생은 1241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 무신정권이 강화로 항목을 위하여 도읍을 옮긴 이후 사망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규보에 대한 평가는 참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일제강점기 시절 문인들에 평가를 하는 것과 도일하다고 할 수 없으나 무신정권에 빌붙어 산 문인으로 볼 것인지 탁월한 문인인지 등에 평가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 선생의 자료 중 그래도 후세에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은 "동명성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을 하지 않고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작품은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 등이 있으며 국선생전은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유적을 처음 접하면서 석물과 묘의 크기 등이 관심이었다. 조선시대의 고관대작의 묘와 비교해 보았을 때 고려가 강화로 피난을 온 사항에서 만들어진 무덤이라서 그런지 그렇게 크지도 않고 소박하면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령의 왕릉이라고 하는 가릉, 곤릉 등에 비하여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고령의 왕릉을 확인할 수 있다. 왕릉도 피난시절 만들어서 그런지 소박하다고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을 하면 고려가 몽골과 화친하기 전까지는 황제국이다. 왕릉이 아니라 황릉이다. 그래서 개성에 있는 능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강화도에 있는 능을 기준으로 조선의 능보다 실용적으로 조성하였다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 번째 만나는 왕과 관련된 능은 곤릉이다. 곤릉은 고려 22대 강종(康宗)의 비(妃) 원덕태후(元德太后)의 능이다. 하지만 당시가 피난시절이라 그런지 왕릉이라기보다는 사대부 집안의 능에 비하여 초라하다고 할 수 있다. 원덕태후 유씨는 신안후(信安候) 유성(柳城)의 딸로 강종 원년(1212) 황후에 책봉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하였고, 고종(高宗)을 낳았으며, 고종 26년(1239)에 돌아가니 시호를 원덕태후라 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고려시대 왕릉의 제도에 따라 묘역에 4단으로 단이 구획되어 있으며 관리 소홀로 봉분이 붕괴되고 주변 석물들이 없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로 석릉이다. 무인정권에 의하여 폐위된 희종의 능이다. 희종은 최충헌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되어 강화 교동에 와 있다가 고종 24년에 승하하여 이곳에 안정되었다고 한다.

폐위된 왕의 능이지만 문인석과 묘비가 있다. 복원 시 상감청자가 나왔다고 한다.

곤릉이나 석릉 모두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확인할 수 있고 전체가 진강산 산자락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는 강화도 하면 마니산만 생각하는 데 진강산도 있다. 어쩌면 진강산은 간척하기 전 강화본도에 있었던 것이고 마니산은 이웃 섬에 있어 마니산 산자락에는 이러한 능이 없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진강산은 강화 6대 산의 하나로 전한다. 조선 시대 진강현의 진산(鎭山)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 정상부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는 이산을 강화나들길과 관계가 없지만 다른 코스를 하다가 시간이 남아 3시간 남짓 걸려서 올라가 보고 괜찮은 산이며 알려지지 않은 강화도의 산으로 품고 있다.


진강산 자락에 가톨릭대학교 강화캠퍼스가 있으며 나들길을 걷거나 등산객들이 학생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어서 그런지 학교로 들어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놓았다.


마지막으로 가릉이다.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되어 있다. 이곳이 3코스의 종점이다. 고려 24대 원종의 황후인 순경태후의 능이다. 순경태후는 충렬왕을 낳았다. 국권이 풍전등화가 되었을 경우 어디에나 어려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배계층이라고 해서 국권이 풍전등화 되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가릉은 충렬왕이 자기의 모친의 능인만큼 왕이 되고 난 후 나라가 안정이 되고 난 후 능공사를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4코스는 이제 아쉽기도 하지만 추위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3코스까지는 진강산 자락을 지나면서 북서풍을 진강산이 막아주었으나 이제는 외포리 선착장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멀리 석모도가 보일 뿐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몸으로 체험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가릉을 벗어나서 진강산을 끼고 둘레길을 걷다가 나들길은 해변으로 가기 위하여 정제두 선생 묘를 지난다. 정제두 선생은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이다.


강화에서는 양명학의 강화학파를 이끈 학자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묘도 관리하고 이를 나들길에 포함시켰다. 자료에 따르면 정제두는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도 비판하면서 양명학의 확립에 전념하였다.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윤순(尹淳), 김택수(金澤秀), 이광사(李匡師) 형제 등이 정제두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정제두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고 한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제두 선생 묘를 지나서 이건창 선생 묘 방향으로 간다. 오늘의 나들길은 지소적으로 우리의 인물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묘이다. 이건창 선생의 묘라고 하지만 특이한 것은 없다. 이 사람의 업적 이런 것이라도 좀 정리하여 두었으며 한다.


이제는 강화도의 서쪽 해안이다. 석모도가 멀리 보인다. 2016년 당시에는 석모도를 가기 위하여는 외포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가야 했으나 지금은 연륙교가 완공이 되어 다리를 건너면 된다.

건평 나루에 도착하였다. 건평 나루는 건평항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천상병 시인이 건평 나루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지은 시 귀천이 유명하다. 박재상 시인이 유작으로 발표한 것인데 사실은 4년 넘게 행려병자로 지내어 행방불명 상태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다. 강화군에서는 2018년 그를 기리기 위하여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귀천(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건평 돈대까지 바람을 안고 걷는다. 1월의 매서운 추위가 얼굴을 때린다. 겨울산을 다녀보았지만 바닷가 바람이 더 센 것 같다. 건평 돈대를 우리가 걸을 때 복원을 위하여 발굴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동 과정에서 유사시 적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불랑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불량기는 우리나라의 화포와 달리 포문으로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전통 화포와 달리 16세기 유럽에서 전해진 서양식 화포의 일종으로 현대식 화포처럼 포 뒤에서 장전을 하는 후장식 화포다.


돈대까지 걸으면서 바다와 육지가 접하는 지역에 방죽을 만들고 그곳에 민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상태에서 물을 보관하고 있는 상태를 보면서 이 곳 사람들은 간척된 땅의 논농사를 위하여 이렇게 노력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논농사에서 물이 중요하다는 것은 삼남길을 걸으면서 호남지역에 낮은 언덕에 논농사보다 밭농사를 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나지막한 언덕이지만 관개수로를 구축할 수 없었기에 밭농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도 이러한 관개수로를 위하여 곳곳에 저수지를 만들고 봄철 농사철까지 민물이 바다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을부터 겨울까지 최대한 물을 확보하고 있었다.


돈대를 지나 외포리 선착장까지 해안도로를 바람막이도 없이 걷는다. 아무것도 없고 단지 바다를 보고 바람이 얼굴을 감싸므로 해안도로의 한쪽에서 뒤로 돌아서서 걷는다. 자동차가 오는지 슬쩍슬쩍 보면서 걸어본다.


이제 외포리 도착한다. 나들길을 걸으면서 외포리는 참 많이 왔다고 할 수 있다. 외포리에서 출발하는 섬 지역으로 출발하는 배를 타기 위하여서도 왔고 외포리가 출발점이거나 종점인 나들길 코스가 많기 때문이다.


외포리의 조그마한 식당에 들어가서 따뜻한 어묵 국물로 몸을 녹이고 차량을 회수하기 위하여 순환버스를 타고 온수 공영주차장으로 간다. 강화의 좋은 대중교통은 시간이 약간 걸리지만 순환버스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