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기획사 대표의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으로 재확인하는 강간문화
피해자의 호소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며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 반대편이 입을 열자마자 ‘역시 꽃뱀이었군!’ 하며 기다렸다는 듯 손뼉 치는 세상이다. 어떤 남자들은 성폭력 피해 여성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해서라면 반대편의 의견이 코알라로 팥죽을 만들 수 있다는 헛소리라고 해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중립인 척 하지만 피해자가 꽃뱀이길 간절히 바라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당신들, 자신이 해 왔던 ‘연애’가 사실은 성폭력이고, 자신이 강간범의 위치에서 감정 이입하고 있다는 걸 직면하기 싫어서 피해자를 더욱 거세게 경멸해대는 당신들.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 없다. 오늘도 우리는 재판 하나를 졌으니까. 미성년자 강간, 카메라 이용촬영죄 등 모든 혐의가 무죄라고 한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7/11/08/story_n_18509570.html
아래는 그 당시 써서 보냈던 글 내용의 일부이다.
“대법원은 접견 서신의 내용과 여러 사정에 비추어 보았을 때, 피해자가 피고인의 성기를 입으로 빠는 장면을 갈무리한 사진만으로는 그 촬영된 동영상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되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촬영)에 대하여 무죄를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영상이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초기에 촬영된 것임을 생각해 주십시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된 영상은 원인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영상이 존재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성범죄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해자의 곁에 머무르려는 태도를 보였고, 피고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색색의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후반부의 여러 사정을 근거로 동영상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되었음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은 앞 뒤 순서가 바뀐 판단입니다.
성범죄 중 카메라 등 이용촬영 범죄의 비율은 13세~20세 청소년의 경우 전체 범죄 비율 중 12%로, 높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범죄 유형에는 미성숙한 아동·청소년을 기망·유인하여 성적 이미지를 제공받거나, 제공받은 이미지를 빌미로 협박, 강간 등 심각한 범죄로 발전하는 양상이 존재합니다. 하급심 판결문 사례조사에서 다수의 성폭력 사건이 사이버성폭력 사건과 연관성을 드러냈으며, 특히 아동청소년의 경우 피해를 입고도 부모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성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피해자의 사건은 이러한 카메라 촬영에 의한 사이버성폭력의 매우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로 보입니다. 성인인 피고인이 아동청소년인 피해자에게 연예인을 소개해 주겠다며 접근해 성적인 수치심을 주는 행동, 성행위 영상 촬영을 먼저 저지른 후 이를 폭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기로 협박하여 강간을 지속적으로 저지른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른 사회적인 잣대로 인해, 때로는 남성이 여성을 촬영한 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협박이 되기도 합니다. 피해자는 집과 학교에 자신의 피해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 피해자의 심리에 피고인이 촬영한 영상이 어떤 작용을 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순결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유효한 억압이 되고 있고, 특히 미성년자에게 가혹하게 적용됩니다. 설사 강간이라 할지라도, 어린 여성인 피해자가 남성과 성관계를 해 ‘순결을 잃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는 심한 압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만일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악감정을 품기만 하면 영상이 쉽게 유출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자연스레 피고인과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지 못하며 피고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사이버성범죄는 영상을 보는 제 3자에겐 피해자가 가해를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피고인의 성기를 빨고 있는 피해자의 모습에서 피해자의 진짜 감정을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밀폐된 공간에서 미성년자가 40대 남성의 영상 촬영을 명확하게 거절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것은 동등한 성인 간의 관계에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촬영이 이루어진 장소는 피고인의 집이었습니다. 피해자는 그곳에서 피고인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어떤 신변의 이상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피해자는 피고인과의 신체적, 사회적 위계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연기를 했을 수도 있고, 제대로 된 의사 표시를 전혀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상을 갈무리한 자료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촬영이 이루어진 이후, 피해자는 피고인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다른 공간에서 영상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강압적으로 촬영되었다고 분명히 진술하였습니다. 피해자가 촬영에 동의했다는 증거도, 동의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다면 피해자의 진술에 더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당시 피해자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자발적으로 40대 남성의 성기를 빠는 섹스 비디오를 찍었을 것이라는 발상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비록 피해자의 성적이 좋았고, 성교육을 받은 적이 있어 신빙성이 없다고 받아들여진 진술이긴 하지만 피해자는 키스만 해도 임신이 될 줄 알았다던 미성숙한 청소녀였습니다.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피해자는 피해자로 남기보다는 그냥 가해자를 사랑해버리기로 마음먹기도 합니다.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강간범과 연인 관계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자신이 피해를 당했다고 인정하여 괴로워하는 것보다 가해자와 사랑에 빠진 척하고, 가해자에게서 작은 보살핌이라도 받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좀 더 잘 행동하면 가해자가 자신을 강간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보인 애정의 표현을 피해자 특유의 어떤 기제도 작동하지 않은 순수한 애정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미성년자인 피해자는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았고, 계속된 강간으로 인한 불안정한 심리상태에서 임신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런 피해자보다 나이, 경제력, 신체능력 등에서 더 큰 권력을 갖고 있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촬영한 영상까지 쥐고 있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항목 중에서 어떤 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것일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의지하고, 피고인의 집에서 살기를 택했다고 해서 피해 사실이 거짓일 것이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가정 내 폭력에 반대하는 전미(全美) 연합(National Coalition Against Domestic Violence)에 따르면, 학대 관계를 떠나는 여성 중 85%는 다시 가해자에게 돌아옵니다. 가해자에게서나마 받았던 경제적 지원이 사라지면 피해자는 제대로 살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성인 여성도 경제적 문제 때문에 가해자를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임신한 미성년자인 본 피해자의 경우 어떠했을지를 생각해 주십시오. (후략)”
이젠 휴지조각이 돼버린 내 글을 참담한 마음으로 다시 읽는다. 이걸 졌다. 40대 남성과 15살 중학생이 섹스한 영상을 증거자료로 한 사건의 결론이 이렇게 됐다. 피해자가 “이건 강간이었다!”고 외치는데도 결국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서 그랬다.”는 40대 남성의 말을 믿어준다. 요즘 영포티 영포티 하던데, 늙어빠진 아저씨랑 어린 여자 맺어주는 드라마도 신나게 찍어대던데, 다들 너무 당당하고 솔직하게 중학생과 섹스하고 싶은 속내 드러내 가며 살 수 있어서 좋겠다. 그렇게 살면서 서로서로 이해해주고 무죄 판결해주고 등 두드려주면서 술 한 잔 하러 가면 진짜 꿀맛이겠다.
한샘 피해자도, 현대카드 피해자도, 이 사건의 중학생도 꽃뱀이 돼버린, 꽃뱀 아닌 여자 없는 오늘. 그 남자의 얼굴이 생각난다. 이어지는 술자리 끝에 나를 혼자 사는 집으로 데려가 강간하려 한 그 남자, 내 과거 직장 동료는 지금 뭐 하고 살까. 나는 그의 밑에 깔린 채 달콤하게 웃어줬었다. 그럼, 당연하죠. 오빠를 나도 전부터 좋아했죠. 나도 오빠 좋아해. 하지만 오늘은 생리 중이라서 너무 부끄러워요. 우리 다음에 꼭 해. 응?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 애교를 부려가며 그를 설득했던 밤. 반항하면 상대가 더 흥분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알았는지도 말할 날이 올까?) 무사히 살아서 그 집을 빠져나오고 싶었으니까. 그는 생리대를 확인하고 나서야 나를 놓아주었었다.
그 남자는, 그리고 그와 닮은 당신들은 경계하는 우리들에게 말해왔다. “야, 내가 널 뭐 어쩔 것 같냐? 너처럼 어린 여자는 여자로도 안 보여.”라고 비웃곤 했다. 밤길이 위험하니 나가지 말고 같이 있자고, 지켜주겠다고 나섰다. 남자를 다 잠재적 범죄자로 보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 그랬던 당신들을 진심으로 믿었던 결과가 이거다. 내가 지금 그 남자를 찾아가서, 이런 사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한샘 피해자 글 읽으면서 뭐 느끼는 거 없었나요? 오늘 이 판결은 어때요, 정당하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당신을 정말 좋아해서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아요? 징그러워. 아무도 우리의 말은 믿어 주지 않으니 당신들은 정말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연구소 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