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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차 Oct 11. 2021

비대면 강의와 조별과제

사람과 부딪히는 것을 싫어한다. 다년간의 통학 경험을 통해 사람과 물리적으로 부딪히는 일이 싫어진 것은 물론, 새로운 종류의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은 늘 내게 어려운 과제였다. 초, 중, 고등학교 때야 인간관계라고 할 만한 것이 같은 반 친구뿐이라 생각을 나누고 친해질 시간이 충분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가치관도, 배경도 다른 사람과 빠르게 친해져야 하는 상황이 많이 생겼다. 조별 과제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조별 과제 '빌런'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어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치는 게임 <조별과제 시뮬레이터>  


다들 집중하기 어렵다고, 효율이 떨어진다고 불평했던 온라인 강의도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지난 학기에는 (있는 힘껏 피한 결과) 한 개의 강의가 조별 과제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비대면 소통으로 편리하게 협업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대면한 상태로 어색한 침묵을 견딜 필요가 없고, 다들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바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통학시간이 긴 사람으로서, 조별 과제를 위해 따로 시간을 빼서 학교 근처에서 만나는 번거로운 일이 없어졌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은 사람과 부딪히며 살았던 일상이 그립다고 했지만, 나만큼은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학기가 끝날 때쯤, 조원과 대면하지 않으면 조별 과제에 대한 책임감도 그만큼 줄고, 사회적 태만(Social Loafing)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4학년이 되어서인지, 비대면으로 조별 과제를 진행해서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이전만큼 조별 과제에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연락에도 잘 답하지 않았고, 발표 2주 전에야 본격적인 자료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여건에서 최악의 조별 과제 빌런을 만났다. 수업은 물론 중간과제를 위한 토론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그런데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만은 강력하게 밝혔던 그는 어떤 것 하나 제때 제출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발표자를 자처하더니 발표일에 나타나지 않는, 조별 과제의 악몽이 현실에 펼쳐졌다. 



원래대로라면 이 답답하고 억울한 일을 친구와 만나 털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고, 조원들에게도 나의 불만을 잘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멘탈 붕괴’의 상태에 빠져 있을 틈 없이 부지런히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다음에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피곤함에 절어 탄 지하철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끔찍한 발표가 일어났던 공간을 벗어나 숨을 돌렸을 것이다.


코로나 19 확진자 수가 급증하고, 자격증 시험도 병행하며 2학기 내내 칩거하던 나는 조별 과제로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누군가와의 만남을 염원하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싫어해 마지않던 등하굣길 불특정 다수와의 만남이 그리워질 줄이야. 


온라인 강의로 늘어난 시간을 정말 행복하게, 알차게 쓸 수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늘 학교에 관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쓰니, 혼자서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꾸준히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처럼 글은 쉽게 쓰이지 않았다. 몇 달 동안이나 찾아온 슬럼프에 어떤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 채 괴로워하는 나날이 더 많았다. 


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내 글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서 쓰인 것들이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을 보며 나를 알아가고 있었다.  

끔찍했던 조별 과제는 소중한 관계를 떠올리게 했고, 더 끔찍했던 통학 길을 그리워하게 했다. 여전히 사람과 부딪히는 일은 어렵지만, 사람이 싫어서 사람을 공부하려 심리학을 선택한 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사람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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