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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까 May 25. 2021

생일 잘 보내기

 어제와 오늘 헬싱키 날씨는 최악이었다. 태풍 저리가라할 정도의 바람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머리가 아팠고 따뜻한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고 내가 하려던 것들을 조금씩 하고 있다.    

 어제는 혬의 집에 사는 이탈리아 친구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끼리 다 같이 박물관에 간다고 했다. 친화력이 뛰어난 이 집 친구들은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이름도 아직 외우지 못한 친구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기엔 내가 낯을 너무 많이 가렸다. 그래도 저녁때 케이크를 불 땐 꼭 오겠다고 말하고 혬과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비가 많이 와서 오랫동안 돌아다니지 못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늘 생일인 플라비아가 스스로를 위한 케이크를 사왔고 우리는 우리가 케이크를 준비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지만 그 집에서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본인의 생일은 스스로 축하 자리를 만드는 듯했다. 플라비아는 페레로로쉐와 피스타치오 맛이 나는 이탈리아식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한 조각씩 잘라주며 맛있게 먹으라고 했다.


 그 케이크를 먹으면서 헬싱키에서 보냈던 작년 내 생일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겪은 생일 중에서 가장 심란한 생일이었다. 우리 집안에서 생일은 아주 커다란 행사이고 생일이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사촌 언니, 사촌 동생 모두에게서 온종일 축하 전화가 온다. 외할머니는 내가 23살이 된 지금까지도 매년 전화로 생일 축하 노래를 완창하신다. 그래서 나에게 생일은 아주 거창한 날이었다. 그런데 내가 자라고 몸이 집을 떠나면서 나를 둘러싼 것들은 생일에 대해서 조금씩 무덤해져갔다. 갖고 싶었던 물건보다는 용돈이 더 좋았고 어쩔 땐 미역국을 못 먹을 수도 있었다. 다 자란 성인에게 생일은 작고 쉽고 빠른 것이었다. 대신 내 생일 전날이 공휴일이라 엄마가 기차를 타고 올라와 맛있는 걸 사주고 갔는데 엄마가 떠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더욱 어둡고 허전했다. 아마 엄마한테 나는 아직 덜 자라서 그럴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헬싱키에서의 생일 며칠 전부터 엄마는 생일을 핀란드 이역만리에서 혼자 보내서 어떡하냐고 안타까워했다. 나는 어른처럼 생일은 매년 있는 거고 올해는 핀란드에서 혼자 맞는 생일이니 나에게 아주 특별한 생일이라고 엄마를 달랬다. 엄마는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그 날 혼자도 아니었고 옆집 사는 언니가 만들어 준 미역국, 계란말이, 토달볶음도 먹었고 날씨도 좋았고 강에서 귀여운 오리도 봤다.


 그래도 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생일이 항상 가득 찬 하루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생일을 더이상 커다랗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아직도 나에겐 생일이 특별하기만 하다. 기분이 이상했던 건 학기가 끝나고 교환학생 생활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헬싱키를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나도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고 내내 추웠던 날씨가 따뜻하게 풀렸기 때문이었다. 생일과 겹쳤던 몇 가지 슬픈 이유들 때문에 나는 마치 내 생일이 망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플라비아가 스스로를 위한 자리를 만들고 스스로를 위한 케이크를 사서 나눠주는 걸 보며 나는 이제 내 생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것들로 갖춰진 하루를 만들려고 애쓰거나 나쁜 일이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생일을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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