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F5 #1.] 임용고시 떨어지고 기자 된 썰

프롤로그: 노력충의 반란 첫 번째 이야기.

by 노력충의 반란

원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교실과 운동장이 내가 보는 세상, 내가 속한 사회의 전부라고 여겼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주한 세상에서 몰입해야 할 것은 공부였고, 자연스럽게 교사가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존재이자 내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존재가 선생님이었으니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을 회상하자면 공부도 열심히 독하게 했던 학생이었다. 어릴 적부터 내가 들어온 나에 대한 묘사는 대개 '독하다', '성실하다'라는 두 단어였다. 내신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내신 성적과 별개로 수능은 망했다. 그래도 정시 지원을 했다. 수시 전략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길만 뚫으면 되지 싶었다. 인문대학에 입학했다. 가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닳도록 열심히 했다. 중등 교원자격증을 따냈다. "OO야, 네가 교직 이수 대상자가 됐어"라는 조교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순간엔 뛸 듯이 기뻤다.


KakaoTalk_20250404_185645143.jpg 가르쳤던 귀여운 아이가 써줬던 귀여운 포스트잇. 격하게 고마웠다.


공개적으로는 3번, 나만 아는 횟수로는 5번 시험을 치렀다. 임용고시다. 2010년대 중~후반 지역 임용고시의 TO는 살인적이었다. 내가 치르는 전공에선 5명을 선발하는 데 1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해엔 1차 합격을 했다. 난 늘 열심히 하니까. 열심히 하면 다 됐었으니까. 생각보다 꿈에 빨리 가닿을 수 있겠다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공부에 올인했다. 노량진에 입성해 2년 이상의 시간을 고시원에 틀어 박혀 공부했다. 정말이지 닳도록 열심히 했다. 꼬리뼈는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를 만큼 상했다. 펜을 잡을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20대 초반에 터졌던 목디스크 덕에 목과 어깨의 통증을 닳고 살았다. 그 외에 부정출혈, 어지럼증, 온갖 아픈 것들과 내 몸에서 함께 동거했다. 상흔은 아직 내 몸에 훈장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맹세컨대 힘들지 않았다. 앉아서 공부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나에게. 공부만 하면 되니까. 몰입하면 되니까. 문제는 합/불로 나뉘는 고시라는 점이다.


칼바람에 피부가 뜯겼다. 동상 걸린 발은 보라색이었음. 중요한 건 통증이 아니라 오늘 모의고사 오답 정리였기에 참을 만했다.


2번째 시험 때는 답안지를 밀려 썼다. 시험장에 데리러 와준 부모님을 보자마자 "밀려 썼어"라며 통곡했다. 흥. 남들도 다 3번은 치른다고 하니까. 삼수하면 되겠지. 삼수를 치렀다. 1차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기대했기에 수업 실연과 면접 준비에도 열심이었다. 결과를 보고서는 물에 잠긴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족들로부터 카톡이 왔다. 뇌에 여러 생각들이 순차적으로 흘러갔다. '아 XX. X 됐다.' -> '엄마 아빠한테 미안해서 어떡해. 3년 동안 등 처먹은 딸 X. 나쁜 X. 합격도 못 할 거 부모 등골만 휘게 만들었네' -> '나 스물여섯이네. 어떡하지. 뭐 먹고살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가장 큰 갈림길은 '공부를 더 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였다. 나이 스물여섯까지 정식적인 사회 경험 없이 인생에서 단 한 줄기만 바라봐 왔던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고민하던 시간 동안 내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며 나를 돌아봤다. 매일 교보문고와 근처 도서관을 오가며 미친 듯이 책도 읽었다. 고시 생활을 하던 때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도 작성했다.


KakaoTalk_20250404_185651922_05.jpg 어느 날엔가는 머물던 고시원에 불이 났다. 찜질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했다는 코미디....


결론은 쉽게 내려졌다. 이제 그만하기로 했다. 결론은 간단했지만 이유는 많았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한 분야에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몸으로 느껴봤다. 나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안다. 나를 절벽까지 몰아붙여도 봤다. 나는 늘 내가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늘 열심히 하니까, 보통 노력이 아니라 노오오오오력을 해왔으니까. 그에 따르는 성과와 보상들도 그 노력에 비례해서 받은 것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폭망 했다. 그렇지. 그렇구나. 열심히 해도, 진심으로 정진해도, 안될 수도 있는 법이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사람이 있는 법이지. 골을 넣는 선수가 있다면 골을 먹히는 골키퍼도 있는 법이지. 자존심과 줏대는 옅어지고 겸손과 자존감이 찾아왔다. 또 하나는 삼수가 아니라 4수, 5, 6, 7, 8, 9, 10수를 한다면 언젠가 합격하겠지만 그 사이에 나는 20대를 훌쩍 지나 30대 중반에 다다를 텐데, 내 꽃 같은 20대. 어떡해,라는 생각도 있었다. 시간이 아까웠다. 이제 그만 접자. 그래서 접었다.


자연스럽게 '그럼, 이제 뭐 하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사회와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싶으며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살고 싶은지, 내 업의 대주제는 무엇인지. 나의 넥스트 스텝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나를 대표하는 단어들에 대해 고민했다. 공부하기, 꾸준함, 성실함, 교육,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글쓰기, 잘 듣기, 운동하기, 잘 놀기. 등등. 더 공부하고 싶은 것 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시간, 함께 취업을 준비하던 가까운 지인이 "OO야, 너는 리포터나 기자나 아나운서도 참 잘 어울릴 듯 해"라고 말했다. 마침 채용 공고에도 내가 지난달까지 무려 6년을 머물렀던, 그 직장의 이름이 올라왔다. 취재 기자. 기자? 기자? 오호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아하!" 하는 순간이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데 공을 들였다. 내가 기자를 준비한다는 것은 그 지인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면접까지 무사히 치르고, 합격 통보를 받고서야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그렇게 기자가 됐다. 내 인생 첫 번째 F5 버튼을 눌렀다. 소란한 문틈 사이를 지났다.


YLA 담임 교수님이셨던 분께 메일을 올렸다. 교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기자가 되었다고. 답장이 왔다.


"OO에게.

오늘 첫 출근은 어땠니?

내가 있을 만한 곳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니?

자기가 하고 싶은 어떤 목표를 정하고 오직 한 길로 가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네 말대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준비를 하고 도전을 했지만

결국 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 네가 느꼈을 좌절감과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까...

하지만 거기서 한 발을 더 내디뎌 임용고시, 교사라는 틀을 벗어난

네 결단과 용기에 대해서 박수를 보낸다.

너는 그 7년이라는 세월을 결코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니다.

청춘의 한 시기에, 네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다는

그것만으로도 훗날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너는 더욱 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절절하게 배웠을 것이다.

네가 교사가 되고자 하는 꿈은 교사라는 직업 자체를 선호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우리말과 글을 깨우쳐주고자 하는 네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꿈은 교사가 아닌 다른 어떤 길을 가더라도 장차 네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또는 직장생활을 마친 후라도 어려운 청년들을 위한 야학을 할 수도 있고, 국문을 모르는 노인들에게 배움의 기쁨을 줄 수도 있고 외국인들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네 꿈을 사라진 게 아니고 잠시 유보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당장은 새로 시작한 직장에서 신입사원으로서 열심히 배우고 자리를 잡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은 기자라는 의미 있는 자리에 열정을 쏟아야 할 때다."


KakaoTalk_20250404_185651922_02.jpg 창문 너머로 보았던 노량진 하늘. 탁하고 더러웠다.


"내가 있을 만한 곳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니?"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기자 생활을 하며 여기가 '내가 있을 만한 곳, 내가 있어야 할 곳이구나'하는 감정과 생각이 든 순간들이 있었다. 안정감, 혹은 이제야 내 것을 찾은 기분. 그 순간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고 싶다.

아무도 모르게 임용고시를 두 번 더 치렀다. 편집부 기자 수련생(?)을 거쳐 사회부에서 본격적인 기자 생활을 시작하며 더는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주변에선 계속 같은 시험을 치른 동지들의 합격 소식도 간간이 들려왔다. 한 번은 고시 생활 동안 나보다 10000000배는 게을렀으며 내 자료를 호시탐탐 탐내던 이가 합격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배가 아프지 않았다. 합격했구나, 아하. 그건 그렇고. 내일 기사 뭐 쓰지. 하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내 자리인 듯싶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