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절대음감이 엄청난 음악적 능력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절대음감이 음악과 관련이 있는 능력인 것은 맞지만, 절대음감 = 음악 능력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은 11.5cm고 색깔 RGB값은 41, 35, 118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지는 않습니다. 저울 없이도 소금을 31g 만큼 집고 쌀을 187톨 잡을 수 있다고 해서 훌륭한 요리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디자이너나 요리사가 되는 데에는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니까요. 훌륭한 음악가가 되는 데에도, 음 높이를 아는 것 외에도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훌륭한 작곡가 중에는 절대음감이 아닌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저는 절대음감이고, 솔직히 음감 자체도 좋습니다. 음감은 제가 음악하는 데에 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 음들이 다 들리니 음악이론이 이렇게 적용되는지 이해하기도 편했습니다. 연주도 바로 할 수 있고요. 하지만 기준음 없이 어떤 음인지 아는 능력, 그러니까 상대음감이 아닌 꼭 절대음감이었어야만 도움이 되는 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음악을 키까지 기억하기 쉽다’, ‘노래에 화음 넣어 부를 때 음 진행이 아무리 요상하더라도 올바른 음을 낼 수 있다’ 외에는 딱히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대음감이기 때문에 불편한 점들도 꽤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노래방에서 고음이 안 올라가서 키를 낮추려니 노래 부르기가 헷갈린다.
이건 아래 경우들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키보드 transpose 기능을 못 쓴다.
밴드를 하다보면 키를 바꾸곤 합니다. 예를 들어 Eb키에서 Gb키로 바뀌었다고 합시다. 절대음감이 아닌 사람은 그냥 키보드에서 transpose 기능으로 +3하고 전에 연주하던대로 연주하면 됩니다. 하지만 절대음감인 사람은 transpose 기능을 켜면 D를 치는데 Gb이 나오니 헷갈려 합니다. 번거롭지만 아예 머릿속에서 키를 옮겨서 연주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래서 저는 밴드할 때 보컬이 키 바꾸자 하면 상당히 거슬려합니다 :)
기타에 카포를 끼고 치면 혼란스럽다.
위와 마찬가지로, E코드를 잡았는데 Ab코드 소리가 나면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래서 바레코드를 많이 짚더라도 카포 없이 연주하곤 합니다. 그리고 카포를 끼더라도 그냥 음을 신경 안쓰면서 적어놓은 코드만 보고 치면 좀 낫습니다.
이조악기는 더 혼란스럽다.
Bb 클라리넷이나 F 호른처럼, 악보상의 음과 실제 음이 다른 악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transpose가 무조건 걸려있는 키보드를 치듯이 헷갈리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이조악기는 연주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결론을 요약하자면, 1) 절대음감은 음악적 능력과 동일하지는 않다. 2) 도움이 될 때도 있다. 3) 하지만 오히려 불편할 때가 많다. 이렇게 세가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