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햇살 그리고 미소
스톡홀름의 초겨울은 가혹하리만큼 날씨가 좋지 않다. 관광하기 보다는 조금 걷다가 대부분 시간을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미술관 등 내부에서 보낸 지난 이틀이었다. 거세게 부는 바람. 더 이상 차가울 수 없을 수 없을 것 같은 아침 냉기. 길을 걸어가는 행인들 위에 켭켭히 쌓인 안개.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바람. 도심을 가로지르는 많은 수로와 운하에서 낚싯줄을 바다에 던져 낚시하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의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밖으로 나와 낚싯줄을 꺼내놓게 하였는지 궁금했다. 오늘 같은 날이 낚시 하기 좋은 날일 지도. 아마도 바닷속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은 차분할지도 몰랐다. 물고기에겐 이 겨울이 따뜻할지도 몰랐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카페에 들어가서 창가 좌석에 앉았다. 커피 한 잔을 놓고 두세 시간은 그대로 창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바깥에서 추위에 긴장한 근육 때문에 온몸에 피로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두꺼운 겨울 신발을 뚫고 들어오는 이 한기를 혀를 내두르면서 밖을 쳐다보았다. 지나다니는 사람 다들 하나같이 검은색의 두꺼운 재킷에 군화 같은 부츠를 신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의 수필집을 꺼낸다. 몇 번이나 읽었는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책의 겉 부분이 많이 닳아있다. 헤세가 말하는 여행에 대한 몇 가지 글과 그가 했던 연애 경험을 쓴 글을 읽는 사이에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아직 마시지도 않은 커피에서 나던 따뜻한 김은 이내 사라지고 없다.
물에 젖은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눈의 모양을 했지만, 비가 내리는 것처럼 땅바닥에 닿자마자 모든 것을 촉촉하게 만들어버리는 눈. 눈으로 내려왔다가 비가 되어 생을 마치는 그 결정들. 그렇게 액체로서 대지에 바로 흡수되는 순간을 계속 보고 있자니 콘크리트의 도보 블록이 눈을 빨아들이는 흡입구라도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손님이 들락날락하며 여는 문 사이로 강한 바람이 들어와 지금 바깥의 온도를 상기시켜준다. 바람은 잦아들고, 눈의 결정이 커지는 듯싶다. 그러다가 이내 점차 확실한 눈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내린다. 간혹 관광객들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떨어지는 눈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점심을 먹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늘색이 약간은 어두워지는 거로 보아서는 일몰 시각이 점차 다가오고 있는듯하다.
그런 눈이 내리는 도시의 한구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사이에 카페 앞 도로 앞으로 휠체어를 타고 부모의 도움을 받고 지나가는 한 어린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눈과 비에 젖어 미끄러운 표면 때문에 천천히 이동 중인 와중에 휠체어에 탄 소녀가 잠시 어머니에게 무언의 말을 걸더니 휠체어를 멈추었다. 몸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 소녀. 머리를 덮고 있는 모자를 제치니 아주 어린 순수한 얼굴이 나타난다. 하얀 피부와 약간 붉은 색의 볼살. 그리고는 이내 장갑을 벗는다. 그리고 그 소녀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떨어지는 함박눈을 손에 받는다. 초점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기만 하는 그녀의 손을 어머니가 잡아 움직이던 그 두 손을 모아 가만히 둔다. 함박눈이 떨어져 소녀의 두 손에 닿는다. 어머니는 말한다. 올겨울의 첫눈이란다. 그 소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띤다. 커다란 햇살. 햇살의 존재를 잊은 지난 며칠의 이곳에서 본 태양. 따뜻한 남쪽 나라의 태양보다 더 환한 그 미소. 거리를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에 내려앉은 짙고 두꺼운 얼음의 겨울을 보고 있노라니, 이 소녀가 이 도시의 모든 미소를 다 훔쳐 온듯싶다. 굳게 닫힌 그들의 입에 걸린 자물쇠. 귀까지 올라간 입꼬리와 웃음소리. 그것이 그렇게나 나에게 인상적이었을까. 그곳에 앉아 한동안 소녀의 미소를 한 동안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