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일과 층간소음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영화 <The Driller Killer>
소리를 얼마나 크게 키워야 할까요?젊고 가난한 예술가 Reno.
광기에 가득 찬 도시 뉴욕,
몇 달씩 밀린 월세와 전화요금,
마감일을 독촉하는 아트딜러,
무심한 듯 떠오르지 않는 영감,
그를 바라보는 불안한 눈빛의 여자 친구 Carol,
그의 가슴속 미쳐 날뛰는 버펄로.
그는 차기작으로 버펄로를 그리는 중이다.
호전적으로 돌진해 오는 버펄로의 불안에 휩싸인 눈동자. Reno를 닮았다.
그는 돈 문제로 불안해하는 Carol에게 버럭 화를 낸다.
원래 겁을 먹은 자는 목소리가 큰 법이다.
그림은 완성된 듯 보이지만 Reno는 아직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붓을 들었다 놨다 무의미한 반복뿐,
떠오르지 않는 영감과 다가오는 마감일에 미쳐가는 Reno.
때마침 아래층으로 이사 온 펑크 록 밴드.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연습의 혼을 불태우는 그들.
그나마 잡고 있던 정신줄이 불에 타 끊어져 버린 Reno.
그를 유혹하는 선반 위에 놓인 전동드릴.
그의 머릿속 맴도는 핏빛 환영들.
전동드릴을 손에 쥔 채 피에 흠뻑 젖은 자신의 모습.
빨간 바지를 입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드릴러 킬러 Reno.
께름칙한 전동드릴 소리와 뒤로 깔리는 음산한 사이버 펑크적 세기말 감성의 배경음악.
그는 뉴욕의 밤거리를 신나게 뛰어다니며 노숙자들이 보이는 족족 드릴로 쑤셔댄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위이이잉!
점점 활기를 되찾는 듯 똘망똘망해진 Reno의 눈동자.
왕성해진 식욕. 되돌아온 영감.
순식간에 완성된 그의 버펄로.
바로 이것이 하루키가 마라톤을 하는 이유.
예술가들이여, 몸을 움직여라!
기대에 찬 눈으로 안 입던 양복까지 차려입고 아트딜러의 반응을 기다리는 Reno와 Carol.
한 참 동안의 침묵 이후, 아트딜러, 속사포처럼 같은 단어를 반복한다.
It's worthless, worthless, worthless, fucking worthless, worthless,
분을 참지 못해 뛰쳐나가면서도,
worthless, worthless, worthless(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아무 반응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Reno.
그의 머릿속 자동 재생되는 전동드릴 소리.
결국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나간 Carol.
그의 머릿속 자동 재생되는 전동드릴 소리.
전화로 아트딜러를 집으로 부른 Reno.
Red or White? 무슨 와인을 사 올지 묻는 사려 깊은 아트딜러.
Worthless라 할 땐 언제구... 궁시렁...
Reno의 대답은 당연히, RED.
보조 배터리가 달린 허리띠를 졸라매고 전동드릴을 허리춤에 찬 Reno,
그는 마치 숙명의 라이벌과의 결투를 기다리는 서부의 무법자.
하지만 배경음악은 서부영화의 그것이 아닌 전동드릴 소리와 세기말 사이버 펑크의 그것.
Red wine을 품에 안고 집에 들어선 아트딜러.
적막함 속 불안감을 느낀 그 순간 달려드는 바로 그 소리.
위이이잉!
바깥에서 본 Reno의 집 현관문 머리 높이 위치에 튀어나와 있는 드릴 끝부분.
바닥에 흥건한 빨간 액체는 피인가 red wine인가!
Reno와 달리 다정한 남자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Carol.
잠자리에 들기 전 그녀는 샤워를 하러 가고 남자는 주방에 남아 차를 끓인다.
계속되는 불안한 적막함 속 힘차게 끌어오르는 주전자.
휴. 주전자 소리였구나, 하고 안심하는 순간, 위이이잉!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온 Carol.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누군가.
Carol이 침실의 불을 끄자, 스크린도 함께 암전.
완벽히 차단된 관객의 시각.
벌써 잠든 거냐며 칭얼대는 Carol.
고요한 정적 속 들려오는 침대 위 움직이는 Carol의 소리.
모두가 불안에 떨며 청각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던 중,
갑자기 나오는 엔딩 크레디트와 펑크록.
왜 우리는 전동드릴 소리를 기대하고 있었는가!
관객 모두를 드릴러 킬러의 공범으로 만들어버리는 기가 막힌 엔딩.
-Abel Ferrara 감독 영화 "The Driller Kill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