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천천히 설명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과의 일은 원래 느린 일이다.

by 키튼

최근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분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원래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동안 나 혼자 감당하게 됐다.
둘이 있을 때도 일이 적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혼자가 되자 하루가 버거운 정도를 넘어, 정신이 조금씩 닳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외래를 보다 응급실을 보고, 입원 환자를 챙기고, 다시 설명을 하고, 또 결정을 내린다. 집에 돌아가면 이상하게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라앉았다.
번아웃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원래 나는 어르신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자주 오시는 분들에게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하고 안부를 묻고, 자식 이야기나 사는 이야기까지 조금씩 듣곤 했다. 그런 시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내과라는 일을 내가 좋아하게 만든 장면들은 대부분 그런 데 있었다.
그런데 환자가 몰리기 시작하면, 대화는 금방 부담이 된다.
내가 말을 길게 하면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쌓인다.
설명을 충분히 하고 싶어도 자꾸 시계를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문장 끝이 짧아진다. 어느 순간부터 진료가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해치워야 할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날 오신 분도 거의 아흔이 다 된 어르신이었다.
다리가 붓는다고 오셨다.
노인의 하지 부종은 늘 단순하지 않다. 심장일 수도 있고, 콩팥일 수도 있고, 혈전일 수도 있다. 아주 드물게는 숨어 있는 종양이 원인일 수도 있다. 문제는 원인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 검사할 것인지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환자 본인의 의지, 보호자의 생각, 연세, 이전 검사 여부, 설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하필 그 어르신은 혼자 오셨고, 귀가 많이 어두우셨다.
일단 상의 끝에 몇 가지 검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CT에서 췌장 쪽에 2cm 정도의 병변이 보였다. 단정적으로 큰일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괜찮다고 넘기기에도 애매한 소견이었다. 처음 보는 입장에서는 이전과 비교가 필요했고, 큰 병원에서 한 번 더 확인하는 편이 안전해 보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어르신은 더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처음에는 귀에 대고 또박또박 천천히 말씀드렸다. 그런데 설명해야 할 내용은 많고, 밖에는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고, 같은 말을 반복해도 전달이 잘 되지 않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시겠어요?”
“제 말 이해되세요?”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설명을 하고 있었다기보다 확인을 강요하고 있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사람 앞에서 자꾸 이해를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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