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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튼 May 22. 2023

P처럼 살아보기

삿포로 한 달 살기-2

 우리 부부는 MBTI의 신봉자들이다. 한국에서 우리는 ’저 사람은 MBTI 앞글자가 I라서 내성적이구나. S라서 굉장히 꼼꼼하네. ‘ 라면서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질(?) 하곤 했다. 와이프는 ISFJ, 난 INFJ이다. 4번째 글자가 J라고 함은 둘 다 굉장히 계획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실 MBTI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이것보다 훨씬 함축하고 있는 뜻이 많은데 여기서는 거칠게 이야기해 보겠다)


 아무튼 우리는 무언가 목적이 있지 않으면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심할 때는 분초단위로 시간을 계획하고 목적을 빨리 달성했음에 흐뭇해하기도 한다. 무려 일 년간의 여행을 해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터라, 떠나기 직전 우리 둘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다. 물론 대충 큰 그림은 짰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었다. 주말을 이용해 일본에 갈 때는 근처 가장 싼 주차장 요금, 편의점에서 뭘 먹을지도 생각하던 나였다.

 


 

막상 일본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짠 계획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항상 무언가 변수가 생겼고, 계획은 수정되었다. 처음에 우리는 일본 횡단까지도 생각했다. “한 달을 사니까 일본을 북쪽에서 남쪽까지 기차 여행을 해봐야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마나 허황된 생각인지 깨달았다. 물론 그렇게 여행하는 분들도 많지만, 우리 둘의 체력은 저질 중의 저질이라, 일주일 짜리 홋카이도 코스로 축소했다. (나보다 J력이 높은 와이프는 JR 패스를 미리 끊어놓으려고 했지만, 극구 말렸다. 지금에 와서는 정말 잘한 선택인 거 같다)


 일주일자리 홋카이도 JR패스를 사용해서 홋카이도를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알아보니 이것도 꽤나 거창한 계획이었다. 홋카이도는 남한면적의 3/4 정도 되는 거대한 섬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목적지인 ‘하코다테’까지도 4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아직 홋카이도에는 우리나라 KTX급인 신칸센이 들어오지 않았다) 기차를 타기 직전, 배가 고파서 삿포로 역을 두리번거리니, 도시락 비슷한 것을 파는 것을 목격했다. 편의점 도시락보다 좋아 보이는 이것은 가격도 꽤나 사악했다. (한 개에 만오천 원 정도) 기차시간에 쫓겨서 충동적으로(?) 도시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연어알이 촘촘히 뿌려져 있는 도시락이었다.


결과는 대만족.


 몰랐는데, 에키벤이라는 일본의 문화 중에 하나라고 한다. (무식해서 죄송합니다) 차창 너머로 바다도 보이고 도시락을 까먹으니, 뭔가 호화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집에서 만오천 원짜리 도시락을 먹었다면 비싸다고 투덜댔을 텐데, 이곳만의 문화라고 생각하니 비싼 가격도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찾아보니 각 지방마다 특유의 에키벤을 판매한다고 한다. 삿포로의 에키벤은 연어알과 연어를 테마로 한 에키벤이 많았다. 아마도 이 지역의 특산물인가 보다.


 그렇게 하코다테에 도착하니, 하늘이 온통 우중충하고 조금씩 비도 내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쉬는 가게들이 많았다. 이곳은 주말에 영업하고 월요일, 화요일에는 쉬는 곳이 많다고 한다. 가고 싶었던 곳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야경을 보러 간 케이블카에서 오늘은 구름이 많아서 야경을 볼 수 없습니다는 팻말이 붙어있던 것이었다.


하코다테에서 야경을 못 보다니 이번 여행은 망했네.



터덜 터덜 내려오는데, 하나 둘 가스등이 켜지고 음산한 길거리의 분위기가 하나둘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주친 길거리는 너무 예뻤다. 파란 바다에 가스등이 켜진 옛날 길거리.



 왜 여행을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맛있는 음식, 좋은 호텔, 휴식.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도 좋지만, 여행을 가장 여행답게 해주는 것은 “우연”이라고 불리는 행운들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여행에 빗댄다. 여행 중에 같은 일이 일어나도 어떨 때는 고행이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태도이다. 받아들이는 것. 삶을 스치는 우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것.


말은 쉽다.

정말로 진귀한 능력이다. 이런 게 가능한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여행을 와서야만 이런 게 가능해지는 것 같다.

파란 하늘이 얼마나 예뻤는지, 쓸쓸한 길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




나는 내 직업을 사랑한다. 여행은 1년을 계획하고 있다. (더 늘어날지 줄어들지는 아직 모른다)

1년 뒤에 나는 환자들에게 좀 더 잘 웃어주고 싶다.


 그래서 영혼을 좀 더 채워서 돌아가야겠다.


<하코다테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lKVbLpZm6dA




i) 전망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구름이 잠깐 걷혀서 야경을 보았다. 기대를 안 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 감동적이었다.

ii)  조금 더 계획적인 분들은 하코다테 전망대 가기 전에 라이브캠이 있으니 현지 날씨를 확인해 보고 가시는 것을 추천드린다. (https://334.co.jp/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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