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승부:
‘명승부’는 ‘공부’가 결정한다!

당신의 공부는 노동입니까, 놀이입니까?

공부와 승부: ‘명승부’는 ‘공부’가 결정한다!

당신의 공부는 노동입니까, 놀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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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맹자는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지(learn) 않거나 다시 배울 수(relearn) 없는 사람, 그리고 이미 배운 것을 창조적으로 폐기하는 학습(unlearn)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한 말이다. 과거에는 새로운 지식을 한 번 습득하면 지식의 생명주기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변화가 극심하게 전개되면서 지식의 생명주기는 급속도로 짧아지고 있다. 이 말은 이미 배운 기존 지식의 효용가치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되다 곧 소멸된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기존 지식, 고정관념, 상식, 타성이나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을 부단히 재학습 하는 노력을 전개하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 대열에서 낙오자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공부를 단순히 외부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공부는 노동으로 하는 공부다. 노동으로서의 공부는 자신은 하기 싫은데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공부다. 노동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재미와 의미가 있을 리 없다. 이에 반해 공부를 놀이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자기다움을 찾아 즐겁고 신나게 공부하는 사람이다. 공부하는 과정에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으며 공부로 일어난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변신이다. 당신은 지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를 노동으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부하는 과정이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로서의 공부를 하고 있는가? 승부수를 띄우고 자기만의 색깔로 명승부를 연출하는 사람은 놀이로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공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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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공부는 호기심의 물음표로 시작하는 질문이다.


공부는 어제와 다른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감동의 느낌표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기계도 질문할 수 있지만 호기심으로 질문하는 동물은 오로지 인간뿐이다. 이제 정답을 찾는 모범생 육성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는 모험생 육성으로 교육적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은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한 지 오래다. 인간은 질문하고 기계는 대답한다. 인간은 어제와 다른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존재하고 기계는 인간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인간은 기계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질 때 인간의 존재 이유는 더욱 확실해진다. 김승희 시인의 ‘신의 연습장 위에’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 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물음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하나의 물음표다. 공부는 직선의 느낌표(!)를 발견하기 위해서 곡선의 물음표(?)를 마음속에 품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영원한 미완성(美完成)이다.


❷공부는 몸으로 깨닫는 육체노동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달리는 250Km 마라톤에 출전했던 경험이 있다. 120Km 지점까지는 잘 달렸지만 거기까지였다. 전날 저녁을 잘 먹지 못한 상태에서 힘든 레이슬 펼치다 만난 모래 언덕은 나에게 커다란 장벽이 아닐 수 없었다. 힘겹게 오르다 굴러 떨어지면서 죽을 고비 앞에 사투를 벌이다 결국 레이스를 포기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체험적 지혜를 깨닫게 해 준 사하라 사막 마라톤은 나에게 진짜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계는 한계에 도전해봐야 몸으로 알 수 있다는 깨달음,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말라는 소중한 명언은 한계에 도전할 때 몸으로 한계를 깨달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값진 깨달음의 결과다. 이런 점에서 공부는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이해하는 정신노동이 아니다. 오히려 공부는 좌충우돌하며 몸으로 느끼는 체험적 깨달음의 과정이다. 공부는 견디기 어려운 역경을 색다른 경력으로 만드는 고난 극복과정이다. 몸으로 깨달은 지혜는 직접 가르칠 수 없다. 오로지 당사자의 몸이 따르는 고통 체험을 통해서만이 체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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❸공부는 낯선 마주침이다.


사람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낯선 상황과 우연히 마주치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이 내 눈앞에서 펼쳐질 때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침에 출근했는데 사무실에 뱀이 기어 다니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평상시와 같은 방법으로 책상에 앉아서 근무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마주친 뱀은 낯선 자극임에 들림 없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것을 리좀이라고 했다. 나무뿌리가 옆으로 뻗어나가다 다른 나무뿌리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낯선 접목이 일어나는 현상을 리좀이라고 한다. 낯선 사람과의 마주침, 낯선 환경과의 마주침, 낯선 책과의 마주침이 나를 바꾼다. “네가 만나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독일의 문호, 괴테의 말이다. 결국 내가 하는 공부란 이전과 다른 사람을 만나 인간적인 자극을 받고, 늘 가보던 곳과 다른 곳에 가서 체험적 자극을 받으며, 낯선 책과 만나 지적 자극을 받는 과정이다. 낯선 마주침에서 깨우침을 얻는 과정 속에서 각성과 통찰이 일어난다. 색다른 환경과 마주칠 때 새로운 깨우침이 일어나고 뉘우침을 얻으며 가르침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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❹공부는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이다.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체험하지 않고는 가슴으로 느낄 수 없다. 공감이 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직접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는 잘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었을 때,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고생하는 사람의 삶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처럼 세상을 살아본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차가운 이성을 공부를 통해서 연마했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어서 탄생한 인재가 바로 ‘재수 없는 천재’다. 공감은 머리로 이해해서 생기는 능력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이 되어 직접 체험하는 과정에서 체득되는 미덕이다. 뭔가 잘못했을 때 두 손을 머리에 대고 반성하지 않고 가슴에 대고 반성한다. 진정한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방법은 학교에서 많이 배웠지만 가슴으로 생각하는 방법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할 때 계산이 시작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공부도 타자의 아픔에 발 벗고 나서는 측은지심을 배워 공감하는 방법을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다. 공부는 역지사지를 넘어 나와 상대가 하나가 되는 공감이다. 공부를 통해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되는 이유다.


❺공부는 생각 너머를 생각하는 상상이다.


공부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한 후 그것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를 밤잠을 설쳐가며 다양한 상상을 연결시켜 나가는 이연 연상(二連聯想)의 과정이다. 상상력은 타자의 아픔을 사랑하는 가운데 발아된다. 상상은 연상이다. 연상할 게 없으면 상상력도 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와 연상하는 세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영복 교수의 이야기다. 예를 들면 아파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아파트 평수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남이나 강북 중에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ㅡ뜨거운 햇살을 등지로 힘든 노동을 해본 사람이면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구릿빛 얼굴의 노동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아파트라는 단어와 무엇을 연상하는지가 그 사람의 아파트에 대한 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있는 증표다,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생각을 이어가는 상상력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창조의 원동력이다.


❻공부는 나를 발견하는 실존적 축제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나만의 색다름을 찾아 나다움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색달라지면 저절로 남달라 지지만 남달라 지면 색다름은 없어진다. 공부는 색다름으로 나다움에 이르는 자기 발견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남달라 지려고 노력하다 나만의 색깔을 잊어버렸다.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주는 색다름보다 남과 비교되는 나의 남다름을 드러내기 위해 평생을 남과 경쟁하고 비교하는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만의 색다름을 찾은 사람이 가장 나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며, 그 사람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색다름이 곧 나다움이며, 나다움이 곧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그래서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추종하거나 모방하지 않고 가장 자기 다운 멋과 스타일을 창조하려고 노력한다. 고전을 남긴 음악가, 화가, 작가는 모두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한 사람이다.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공부의 마지막 의미는 나만의 색다름을 찾아 나답게 살기 위한 자기 탐구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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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덕분’에 ‘본분’을 잃지 않고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각성제다. 진정한 공부는 생각의 ‘고치’ 안에 안주하고 있는 고정관념을 망치로 깨부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래서 공부는 망치다. ‘망치’는 망치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창조의 도구다.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으로 만들어진 ‘얼룩’이 아름다운 작품의 ‘무늬’로 탄생한다. 얼룩진 삶에서 묻어나는 삶의 향기가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된다. 부단한 자기 변신을 통해 어제와 다른 나를 만나는 혁명,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 모두가 평생 멈추지 말아야 할 공부하는 삶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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