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소통 속도에 치중하고 있습니까, 소통 밀도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소통과 융통: 자세를 낮추고 소통하면 융통해진다
당신은 소통 속도에 치중하고 있습니까, 소통 밀도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내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들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고민은 내가 한 이야기를 얼마나 알아들을까 라기보다 과연 내 이야기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들어줄까에 있다. 특히 세대 차이가 많은 사람, 나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관심이 달라서 코드가 잘 통하지 않을 거 같은 사람에게 뭔가를 이야기하거나 그들이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읽을 때 더욱 고민은 깊어진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말을 하고 좋은 말로 책을 썼어도 청중이나 독자가 내 이야기를 보자마자 귀를 막아버리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언제나 존재한다. 과연 인간은 어떤 경우에 밖에 있는 정보를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를 어떤 기준과 근거로 판단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소통의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빈도는 잦아지고 있지만 과연 소통의 밀도와 강도는 더욱 강해지고 있는지 역시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던 차에 평소에 즐겨 읽는 일본의 우치다 다쓰루가 엮은 《지적 성숙 학교》라는 책에서 놀라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아래 글은 《지적 성숙 학교》에 쓴 저자의 〈어떻게 말을 전달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게 하자〉를 토대로 내 생각을 가미해서 작성한 글임을 밝혀둔다.
우치다 다쓰루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인다’라기보다 불필요한 정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기능을 갖고 태어난다고 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 잠시만 생각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면 나에게 봐달라고 요청하는 정보 호객군들이 나에게로 날아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 많은 정보 중에서 나는 특정한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반응한다. 나머지 정보는 나와 무관한 노이즈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나와 관계있다고 판단하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노이즈를 어떻게 순식간에 알아내는 것일까. 우치다 다쓰루에 따르면 “‘노이즈’의 판정 여부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이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실행되어 버린다”(25쪽). 우리 안에 필요한 정보인지의 여부를 순식간에 판단하는 스캐닝 장치가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경험상 가장 강의하기 어려운 대상은 나보다 연령대가 낮은 청소년이다. 그들은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경험으로 다른 공부를 해왔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과 직업관을 비롯 인생관이 정말 다르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할 경우 백전백패다. 이들은 주의집중 시간도 짧을 뿐만 아니라 성인층이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는 대상과 전혀 다른 것에 재미를 느끼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친구들을 어떤 방식으로 내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미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로 소통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우선 강연장 분위기를 보면 몸으로 반응이 온다. 오늘 강연은 정말 쉽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온몸으로 각인된다. 머리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껴진다. 이럴 때 비장의 무기가 바로 청중들의 몸에게 물어보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몸에게 물어본다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이야기를 머리로 들으면 이분법적으로 ‘잘 알았다’ 또는 ‘잘 모르겠다’ 둘 중의 하나로 대답해야 한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있다’, ‘없다’의 디지털로 나눠버리는 것은 뇌의 일이고 뇌의 취미이고, 뇌의 의무다”(32쪽). 머리에게 물어보면 금방 대답한다. 하지만 몸으로 들었다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처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뇌에 비해 몸은 판단을 나중으로 연기하는 선택지가 있다고 한다. 머리로 대답할 수 없고 오로지 몸으로 느낌을 감지해야 뒤늦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관건이다. 예를 들면 “봄이 완연하게 우리 곁에 온 것이 느껴지나요?”라는 질문은 머리로 대답할 수 없고 몸에게 물어봐야 한다. 하지만 몸은 뇌가 대답하기 전에 뭔가 정보가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서 몸은 판단을 유보하고 추가 정보를 더 요구한다. 추가 정보를 더 요구하는 몸은 말 그대로 몸 달아서 자신의 몸에게 물어본 사람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몸이 달아오른 청중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는 주의를 집중하고 추가 정보를 전해주는 강사에게 온 신경을 기울여 들어보는 수밖에 없다.
몸에게 질문을 던지면 몸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문제는 어떤 정보가 내 몸이 요구하는 정보인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내 몸이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귀로 들어온 모든 정보를 그대로 몸에게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정보도 이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뇌가 주로 노이즈를 걸러내고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자세로 임했다. 이제 전세가 역전되어 추가 정보를 요구하는 몸이 노이즈를 걸러내는 기능을 멈춰달라고 요구하는 상태로 변해버렸다. 여기까지 오면 강사는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청중은 강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청중은 강사의 이야기를 들었어도 무슨 이야기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우치다 다쓰루에 따르면 “‘뜻을 잘 모르겠는’ 화법이 ‘구석구석까지 다 이해되는’ 이야기보다 더 생산적일 수 있다. 그것은 몸이 들었다는 증거이기 때문”(34쪽)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다 알아들었다는 이야기는 거꾸로 생각하면 더 이상 당신에게 배울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들어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상태라야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소통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사람들끼리 알면 커뮤니케이션은 끝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저자는 그래서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전부 다 이해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히려 “왠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35쪽)의 상태, 즉 정보 부족으로 맞는지 틀리는지 좋은지 나쁜지를 판정할 수 없어서 추가 정보를 더 들어봐야 알 것 같은 상태가 저자가 상정하는 청중이나 독자의 이상적인 상태다. 이런 상태가 되려면 청중 자신의 몸에 질문을 던져 몸이 개방상태로 열려있어야 한다. 청중이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경우는 강사가 청중에게 매우 유익하거나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서 공감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청중이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의 진위나 옳고 그름에 대해 즉시 판단할 수가 없어서 자신의 몸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37쪽). 머리로 대답할 수 없는 몸에게 묻는 질문을 받았을 때만 인간은 몸을 개방상태로 열어놓고 자신의 몸에게 물어본다. 저자에 따르면 몸에 묻는다는 자세를 취할 때 “자신의 신체 기억 저장고 속을 더듬어 찾아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모니터를 시작한다”(39쪽). 이때부터 청중은 딴짓할 시간 없이 몸이 요구하는 결핍된 정보를 메꾸기 위해 이미 내 몸 안에 보유하고 있는 정보에 비추어 상황판단을 하거나 어떤 정보를 추가적으로 더 수집해야 될지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진정한 소통은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능력이다
우치다 타츠루의 다른 책, 《어른 없는 사회》에서 그는 의사소통능력을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일부러 하기”(181쪽)로 정의한다.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상대와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불통 상태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의사소통 능력이란 의사소통을 원만하게 진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불화와 맞닥뜨렸을 때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능력”(183쪽) 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내는 능력”(187)이라고 말한다. 이런 능력은 대부분 매뉴얼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진정한 소통능력은 매뉴얼에 없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매뉴얼에 나와 있는 처방을 무시하고 난감한 상황에서도 시급히 결단을 내리고 과감하게 대처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대부분의 상황은 이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긴급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곤란한 상황이다.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소에 하지 않던 자세와 태도는 물론이고 생각과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 중에 마트에서 반찬거리를 산 다음 계산을 하고 있는데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투로 뭔가를 계속 물어보는데 당사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냥 카드를 주면 그것으로 계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카드로 계산을 하면서 뭔가를 자꾸 물어보는 데 도무지 내가 못 알아들으니까 점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기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점원이 계속해서 자세를 낮추고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해서 점원이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를 기어코 알아내려고 했다. 지극한 정성과 진심 어린 자세로 당신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못 알아듣고 있으니 제발 천천히 다시 한번 이야기해달라고 간청했더니 우편번호를 물어봤다는 것이다. 특정한 제품 종류별로 어떤 지역에서 어떤 물건을 많이 사는지 파악하기 위해 우편번호를 물어봤는데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어서 더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식료품 가게에서 반찬거리를 사는데 우편번호를 물어볼 것이라는 상상은 전혀 하지 않았기에 더욱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하고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포기했으면 점원과는 영원히 불통되었을 뻔했다. 하지만 저자는 자세를 낮추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에 하지 않았던 행동, 시간을 내서 더욱 낮은 자세로 진심으로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가갔더니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몸의 언어를 실었을 때 상대방의 신체가 메시지에 담긴 신체성에 반응한 것이다. 사람은 몸의 고뇌가 실종된 머리에서 만들어진 언어에는 머리로 반응한다. 그런데 딜레마 상황에서 온몸으로 생각하면서 신체에 담긴 고뇌를 메시지로 전할 때 상대 역시 몸으로 전해지는 신체성의 메시지가 공명한다. 그때 주관과 주관을 넘어 간신체성의 공감 대역이 생긴다. 신체를 낮추는 겸손이 상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알아내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나아가 신체가 담긴 메시지를 신체로 받아들이는 놀라운 소통의 기적이 시작된다. 소통 기술을 활용해서 속도를 높이고 빈도만 높이려 하지 말고 진정한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소통으로 가까워지는 신체언어를 밀도감 있게 전달해서 소통으로 전해지는 의미의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모색할 때 우리는 소통으로 더욱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