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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容器)를 깨뜨릴 수 있는
용기(勇氣)가 필요하다

나만 모르는 7대 용기(勇氣) 북돋우기 비밀 처방

용기(容器)를 깨뜨릴 수 있는 용기(勇氣)가 필요하다

나만 모르는 7대 용기(勇氣북돋우기 비밀 처방


1. 내려가는 용기그만 올라가고 이제 내려가자

내려감이 곧 올라감이다용기는 오름 욕망에 반론을 제기하는 반기(反旗)


위로 향하는 결정보다 아래로 내려가는 결단이 더 중요하다. 등산하겠다는 각오보다 하산하겠다는 결심이 더 중요하다. 올라갔지만 잘 못 내려오다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등산보다 하산, 이륙보다 착륙 과정에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우리는 지금까지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사실 올라가겠다는 말은 곧 성공하겠다는 다짐과 결의의 다른 표현이다. 올라가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나머지 내려가는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진정한 용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는 패기보다 내려갈 시점을 판단해서 결단을 내리고 내려가는 의기(意氣)다. 내려가는 용기는 실패해서 또는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서 실망하고 어쩔 수 없이 내려가는 포기가 아니다. 내려가는 용기는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 한 보 후퇴하거나 또 다른 기회를 엿보기 위해 잠시 힘을 비축하는 결연한 판단이다. 잘 내려가지 않으면 영원히 올라갈 수 없다. 내려가지 않으면 외부적 힘에 의해 갑자기 추락한다. 추락하면 영원한 패배자로 전락한다. 추락하기 전에 내 힘으로 내려가야 다시 더 높은 곳을 향하는 꿈과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내려감이 곧 올라감이다.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더 이상 올라가는 노력에 반대하고 내려가겠다는 결단, 즉 상승 욕망에 반기(反旗)를 들고 스스로 하강하겠다는 반론의 제기가 진정한 용기다.



2. 비우는 용기그만 채우고 이제 비우자

비움이 곧 채움이다용기는 새롭게 탄생하는 계기(契機)


지금까지 참 많은 책을 샀다. 제목이 끌리는 책, 내용에 호기심이 가는 책, 그리고 누군가 추천해준 책을 주로 산다. 책은 읽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 주요한 원천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책을 놓은 곳이 없을 정도로 곳곳에 산더미처럼 책이 싸여 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산 책 중에서 읽지 않고 언제나 책이 꽂혀 있는 한 장소에서 늘 거기에 있는 책을 펴 보다. 내용이 진부한 것도 많았다.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버리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뭔가를 습득하는 학습도 중요하지만 버리는 학습(unlearning)은 더 중요하다. 버려야 빈 공간이 생기고 거기에 채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창조적으로 파괴하지 않으면 이전과 다른 창조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특히 과거의 관행과 답습으로 사고의 관성을 만들어내는 고정관념이나 통념은 통렬하게 없애야 한다. 새로운 학습을 가로막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색다른 발상을 가로막는 지식을 무용 지식(obsolete knowledge)이라고 했다. 버리고 비우는 용기(勇氣)가 있어야 새로운 지식을 채울 수 있는 용기(容器)를 만든다. 용기(容器)를 비워야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는 용기(勇氣)가 생긴다. 비움이 곧 채움이다. 용기는 나를 비우고 이전과 다른 나로 재탄생하는 계기(契機)다.



3. 낮추는 용기그만 높이고 이제 낮추자

낮춤이 곧 높임이다용기는 나를 낮추고 상대를 품는 온기(溫氣)


나의 인격을 높이고 몸값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필요하다. 개인의 결단과 용기가 없으면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갈 수 없다. 나를 높이는 노력이 잘 못 보이면 자기 과시로 보일 수 있다. 무조건 자신을 높이 세우고 성취하려는 용기는 만용이다. 진정한 용기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한계를 인식할 때 생긴다. 무지를 깨달으면 겸손해지고 한계를 알면 무조건 도전하지 않는다. 자기 자랑이나 잘난 체로 상대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언행을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상대가 이런 언행을 일일이 지적해주지 않는다. 속으로 이런 사람은 더 이상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만 줄 뿐이다. 늘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누구나 범하는 실수다. 나를 높이는 다른 방법은 상대를 높여주고 나를 낮추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나를 낮추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높아지는 경우다. 자세를 낮추면 자격은 올라간다. 춤을 출 때도 나를 먼저 낮추면 상대를 더 안정적인 자세에서 높여줄 수 있다. 소싸움 할 때도 자세를 최대한 낮춰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낮춤은 비굴함이나 자기 비하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드높이는 역설적인 자세다. 자리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높이려는 노력에서 벗어나 자격을 갖추는 겸손한 노력을 통해 자세를 낮추면 기회가 찾아온다. 그때 그 자리에 오르면 저절로 높아진다. 내가 나를 높이는 노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높여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나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 낮춤이 곧 높임이다. 낮추면 가장 높이 더 치솟을 수 있다. 용기는 나를 낮추고 상대를 감싸 안을 때 따뜻한 정이 흐르는 온기(溫氣)다.



4. 놔주는 용기그만 붙잡고 이제 놔주자

놔줌이 곧 붙잡음이다용기는 갖고 있던 것을 과감하게 놔주는 포기(抛棄)


집중은 몰입의 즐거움을 불러오지만 집착은 애착의 괴로움을 불러온다. 집중보다 집착이 심할 때 사람은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 너무 많은 욕망에 사로 잡혀 있음에도 우리는 잘 모르고 살아간다. 날이 갈수록 나를 부추기는 욕망은 점점 더 늘어나는 세상에서 집착에서 벗어나 집중할 수 있으려면 지금 잡고 있는 것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를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붙잡아서 내 곁에 놓고 싶어 하는 지나친 욕심이 사람을 늘 피곤하게 만든다. “지구의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을 충족시킬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간디의 말이다. 문제는 필요해서 붙잡았는데 그것이 도를 넘어서면서 필요한 것을 더 가지려는 집착과 탐욕을 불러온다. 이제 그만 붙잡고 잡고 있는 것을 놓아주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양손 가득 뭔가를 잡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돌볼 여유도 생기지 않는다. 내가 잡고 있는 놓아야 비로소 빈손으로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여우도 생긴다. 잡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즉 ‘잡음’이 많아지면 내면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잃어버리고 마음속에 ‘잡음(雜音)’도 심해진다. 붙잡고 있는 것을 과감하게 놓는 순간 새로운 기회도 생긴다. 포기하지 않으면 다른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진정한 용기는 포기다. 포기해야 기회가 생긴다. 포기는 열망하는 꿈을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포기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지금 집착하려는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자는 적극적 권장이다. 



5. 도망치는 용기그만 고집부리고 이제 도주하자

도주가 곧 도약이다용기는 과감하게 도망칠 수 있는 백기(白旗)


용기는 전통적으로 한계에 도전해서 도약하려는 과감한 결단을 의미했다. 도전하지 않으면 도약할 수 없다는 인식이 용기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이었다. 도전으로 도약할 수 있지만 때로는 도망이나 도주로 새로운 도약을 꿈꿀 수도 있다. 도망간다는 이야기는 지금 여기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싫어서 택하는 수동적인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도망치는 용기는 이전과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웅비의 날개를 펼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이다. 도망칠 수 있는 용기는 기존 체제의 틀 안에 거주하면서 안주를 추구하는 현상 유지적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기존 틀에 갇혀 타성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가 바로 도망치는 용기가 품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중앙이나 중심부로 진입하려는 용기보다 중앙에서 벗어나 변방으로 도망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다. 중심으로 진입해서 기존 생각의 틀에 동화되는 전략보다 변방으로 탈주해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잉태하려는 변화를 추구하는 용기가 도망치는 용기다. 세상 사람 눈치 보느냐고 상황과 판세가 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체면 차리느냐고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서 도망치지 못할 때, 배에 탄 사람은 공멸할 수밖에 없다. 아사다 아키라의 《도주론》에서 주장하는 메시지다. 지금 여기서의 삶이 분명 가슴 뛰는 삶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의식한 나머지 내 생각과 판단대로 과감하게 탈출하지 못할 때 따라오는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차일피일 미루면서 호기를 기다리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난국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곤궁에 빠지기 전에 도주하지 않으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도주가 곧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선택이다. 용기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도망치며 스스로가 선택하는 백기다.



6. 떠나는 용기그만 머무르고 이제 떠나자

떠남이 곧 만남이다용기는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전기(轉機)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아갈수록 익숙한 세계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서 살아간다. 안주가 곧 안락함을 제공하고 편리함에 물들어 살다 보면 낯선 환경에 부딪히며 살아가지 않으려는 타성과 관성이 생긴다. 사람이 변화를 거부하는 계기가 바로 살던 대로 살아가려는 관성이 생길 때부터다. 관성이 생기면 관습과 습관에 젖어 살고 타성이 생기면서 웬만한 노력으로는 관성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변화를 추진하기 어렵다. 진정한 용기는 편안한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보려는 사고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이런 점에서 용기는 여기서 저기로 떠날 수 있는 결연(決然)한 패기(覇氣)다. 떠난다는 이야기는 물리적 공간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나는 길도 떠나는 길이다. 가까운 인간관계를 벗어나 다른 관계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도 떠나는 일이다. 익숙한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낯선 사고가 충돌하는 전공 밖의 세계로 경계를 넘나드는 일도 떠나서 만나는 색다른 마주침의 세계다. 떠남의 목적은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색다른 세계와 마주치는 데 있다. 마주침이라는 자극을 주기적으로 받지 않으면 색다른 깨우침은 물론 뉘우침을 얻을 수 없고 가르침도 생기지 않는다. 지금 여기를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전기(轉機)도 마련할 수 없다. 떠남이 곧 만남이다. 여기를 떠나는 순간 이제껏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만난다. 이전과 다른 세계를 만나려면 지금 여기를 떠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7. 나누는 용기그만 독차지하고 이제 나누자

나눔이 곧 나아감이다

용기는 더불어 살아가는 정기(精氣).


창조는 독창성에서 발원되기도 하지만 협동의 창의성에서 발현되기도 한다. 독재나 독차지에서 생각의 발로가 비롯되기보다 내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다름과 차이가 충돌할 때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아이디어가 잉태되기도 한다. 독재는 다름과 차이를 말살하는 독약이나 다름없다. 이미 충분히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욕망은 끝을 모른다. 욕망이라는 열차는 과속을 할 뿐만 아니라 멈출 줄을 모른다. 이제 그만 독차지하고 갖고 있던 것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려는 노력이 전개될 때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발품을 팔아서 베풀수록 품격도 올라간다. ‘베풂’이 곧 품격이다. 베풂은 상대의 아픔을 품는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은 폼 잡지 않고 품는다. 폼 잡는 사람은 용기라기보다 만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나눔이 곧 나아감이다. 나누려는 용기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정기로 작용한다. 용기는 나를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생기(生氣)이자 힘든 순간에도 꿋꿋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원천 에너지를 제공하는 정기(精氣)다. 사람은 내 것을 남과 나눌 때 행복이 배가됨을 느낀다. 나누면 내 것이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가된다. 나눌수록 생기가 돌고 화기애애해진다. 나눔이 상대를 행복하게 만들고 그 행복한 기운이 다시 나에게 선순환되면서 없었던 기운도 새로 생긴다. 용기는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발버둥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용기는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남을 위해서 기꺼이 나누려는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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