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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연구자가 숙지해야 될
15가지 연구 철칙

다르게 살아가는 삶만큼 다르게 읽고 쓸 수 있다


삶의 연구자가 숙지해야 될 15가지 연구 철칙:

다르게 살아가는 삶만큼 다르게 읽고 쓸 수 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바라보라그러면 내가 걸어갈 물길을 발견할 것이다


1. 지금 내가 어떤 딜레마 상황에 빠져 있는지를 감지하는 위기의식, 내가 앞으로 연구를 통해 해결하고 싶은 문제의식, 연구를 통해 달성하고 싶은 목적의식이 없으면 연구는 영구히 해도 아무런 성과가 나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나는 왜 공부하는가? 무슨 공부를 해서 무엇을 달성하고 싶은가? 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정체성의 위기는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하면 공부하는 과정은 수시로 흔들릴 수 있다.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공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연구가 수단이 될 때 거기서 얻어지는 모든 결과물은 한순간에 이루어낸 성과일 뿐이다. 진짜 공부는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득 깨닫는 각성이다.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연구를 통해서 밝혀내려는 삶의 진실이 어떤 모습일지를 알 수 없다. 연구가 끝날 무렵 비로소 연구를 통해 해명하고 싶은 세상의 진실이 진면목으로 다가온다.



2.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나보다 앞서서 길을 걸어간 선각자의 삶을 모방하되 따라가지 마라.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갈수록, 그들이 앞서 성취한 연구 성과를 바라볼수록 깊은 좌절감과 자괴감에 빠진다. 밤새 읽어도 끝이 없고 읽고 나면 어느새 새로운 논문이 세계적인 저널에 끊임없이 게재된다. 비교하되 비참해지지 않는 방법은 부지런히 앞서 걸어간 선각자들의 연구 성과물을 읽으며 그들이 놓치고 지나간, 간과해서 무시했던 틈새영역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연구자는 전지전능한 만물박사가 될 수 없다. 저마다의 강점이 있는가 하면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높은 봉우리만 있는 산은 없다. 봉우리가 있으면 반드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계곡이 있다. 그 계곡을 파고들면 봉우리로 치솟지 못하고 잠재된 가능성의 텃밭이 존재한다.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비상할 수 있는 전초기지를 만날 것이다. 거기서 비상하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꿈을 꾸는 게 바로 연구자의 갈 길이다.



3. 연구는 전문 연구자만이 하는 직업적 활동이 아니다. 세상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분야에서 연구자다. 직장인은 직장이 연구현장이고 교사는 가르치는 학교 현장에 바로 연구현장이다. 법조인은 자신이 만나는 원고와 피고가 바로 연구대상자이며, 건축가는 건축현장이 바로 자신의 연구현장이다. 소설가는 일상이 연구대상이며 시인은 당연함에 갇힌 고정관념과 통념의 세계가 바로 연구현장이다. 연구하는 과정이 곧 삶이며 연구를 통해 삶을 바라볼 때 이전과 다른 앎이 탄생된다. 그런 앎이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다. 질적 연구자는 연구를 통해 삶의 질을 드높이는 연구자다. 질적 연구자가 지향하는 삶의 지향점은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질적 연구자로 거듭나는 변신을 도와주는 데 있다.



연구현장의 아픔을 사랑하라그러면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4. 책상에서 많이 읽고 생각하는 활동 못지않게 연구자의 문제의식 개발에 도움이 되는 활동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현장에 가서 관심을 갖고 둘러보고 들여다보고 파고들어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현장이 답이 아니라 현장에 답이 있다. 그게 바로 정답(正答)이 아니라 현답(現答)이다. 정답은 책상에 찾을 수 있지만 현답은 현장에 가야 찾을 수 있다. 질적 연구는 현장과 맥락을 무시한 연구를 증오한다. 현장에 찾은 현답(現答)이 바로 현답(賢答)이다. 현답(賢答)은 책상에서 실험해서는 찾을 수 없다. 오로지 몸을 던져 현장으로 잠입하고 파고들어야 비밀을 알 수 있다. 신체성이 개입되지 않는 앎일수록 관념적 주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질적 연구자는 앎의 기원과 기반을 격전의 현장, 삶에서 찾아내 다시 삶을 바꾸려는 혁명가다.



5. 실험실에서 통제하고 조작하지 말고 현장으로 뛰어들어라. 현장에 가야 현실을 만날 수 있고 현실 속에 진실이 잠자고 있다. 진실을 캐내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한다. 진실을 캐내려는 발버둥 속에서 진리가 드러난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나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연구결과를 대량 양산하는 공장 문을 닫아야 우리 현장이 바뀐다. “파리 앞다리의 움직임이 파리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백날 해봐야 파리 앞다리를 알길 없고 더구나 파리를 이해할 수 없다. 파리를 알고 싶으면 파리가 살아가는 현장에 가야 한다. 거기서 파리와 친구가 되지 않는 한 파리를 알 길이 없다. 파리는 질적 연구자에게 발견을 기다리는 독립적 개체나 실체가 아니다. 질적 연구자와 함께 특정한 상황적 맥락 안에서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연구현장의 일부다. 연구대상이 연구현장에서 분리되는 순간 분리수거되는 쓰레기로 전락할 수 있다.



6. 관념적 ‘지식인’, 독수공방(獨守空房)하는 ‘쥐식인’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연구자, 실천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연구자가 되는 길은 관성의 늪으로 얼룩진 현실을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된다. 현장관찰이 현장을 변화시키는 통찰을 불러온다. 통찰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나오기보다 행동하는 가운데 어제와 다른 각성이 부각되면서 탄생된다. 탁상공론을 일삼는 관념적 지식인,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꼰대형 지식인에 빠지면 세상의 지식은 물론 자신이 만든 지식도 쥐굴에서 혼자 야금야금 먹는 쥐식인의 먹이로 전락한다.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설명과 처방이 아니라 기술과 이해를 기반으로 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무지몽매함에 일격을 가하는 일이다. 철저하고 집요한 기술을 통해 현장의 이면에서 숨죽이고 있는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현장을 획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수는 지적 자극제가 바로 질적 연구자가 창조해야 될 연구물이다.



읽어라그러면 세상을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


7. 읽기는 다르게 쓰기 위한 전초전이다. 내가 다르게 읽은 만큼 다르게 쓸 수 있다. 읽기의 목적은 어제와 다르게 쓰기 위해서다. 읽을수록 사고의 깊이도 성숙해지고 깊이 있는 사유체계가 구축된다. 읽지 않고 읽어낼 수 없다. 읽은 만큼 쓸 수 있고, 읽고 소화시킨 만큼 내 생각으로 축적할 수 있다. 읽어야 연구대상이나 현장을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 읽지 않으면 읽히고 읽으면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 읽지 않고 경험에 의존하고 상식에 의지할수록 연구자는 통념에 갇히고 고정관념에 눌려 타성에 젖어들게 된다. 읽은 만큼 개념적 사고력도 신장되고 기존의 생각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사고방식도 생긴다. 



8. 읽되 가급적 낯선 분야, 색다른 관점, 대안적 접근, 융합적 시각을 갖고 있는 논문이나 책을 읽고 글을 쓴 사람의 문제의식을 읽어내라. 나와 다른 분야와 마주치지 않으면 다른 깨우침이나 내 생각의 편협함을 깨달을 기회가 없어진다. 읽되 글 쓴 사람의 아픔과 사연과 배경이 무엇인지, 이전 논문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썼는지를 염두에 두고 읽어라. 나와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갖고 있는 낯선 논문을 읽어야 낯선 문제의식이 잉태된다. 낯선 저자의 색다른 문제의식을 만나지 않는 한 내 생각은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고 현재를 고수하려고 한다. 내 생각의 한계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낯선 개념을 만나 그 개념이 탄생된 문제의식과 함께 개념 체계를 이전과 다르게 구축하려는 노력이 바로 색다른 논문을 쓰기 위한 기반 작업이다. 안락지대를 벗어나 낯선 세계로 뛰어들어 뇌세포에 충격을 주는 낯선 논문을 많이 읽어라. 



9. 읽지만 말고 읽으면서 메모하고 읽고 나서 정리해라. 논문을 쓴 사람의 문제의식은 무엇인지, 논문에서 주장하는 핵심 주장은 무엇인지, 그래서 나는 이 논문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보면서 메모해라. 차곡차곡 정리한 논문 요약이나 비교하고 분석한 결과가 차후 내 논문 작성에 큰 디딤돌이 된다. 창작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논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많이 읽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이 정리하며 읽는지가 중요하다. 읽은 걸 정리하지 않으면 무엇을 읽었는지, 어디서 무슨 내용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보다 기록이 오래간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은 맴돌지만 무슨 내용을 읽고 무엇을 배우고 깨달았는지를 알 수 없다.



느낀 대로 쓰고 쓴 대로 실천하라그러면 현장이 바뀐다


“기득권의 타성 속에서 특권을 누려온 언술의 터를 허물고 새롭고 위험한 가능성의 틈을 내는 것이다. 시작(始作)으로서 시작(詩作)은 습관의 두께에 대한 향수를 포기하고 낯선 출발점을 다시 찾는 것이다. 시작(詩作)은 시작(始作)이다”(김영민, 2020, p.434).


10. 이빨은 썩지만 글발은 썩지 않는다. 학자는 말발로 세상을 달콤하게 유혹하는데 길을 찾기보다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치밀하게 글을 쓰는 글발로 생각의 발로를 만들어가는 데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학자의 필살기는 자기만의 언어로 글을 쓰고 논문을 작성하는 스타일에서 나온다. 글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얼룰과 무늬, 문제의식이나 위기의식과 목적의식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글을 쓰려면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하고 고독하게 고립감을 유지해야 한다. 연구현장을 시끌벅적하지만 거기서 얻은 결과를 정리하는 곳은 외로움이 사무치는 고독한 연구실이다. 잔머리로 요령 피우거나 남의 글을 표절해서 쉽게 쓰려는 생각은 아예 쓰레기통에 버려라. 글은 집 짓기나 밥 짓기처럼 오랜 시간 숙성과 숙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11. 어떻게 쓸까? 계속 고민을 거듭할수록 머리는 하야지고 뇌세포는 작동을 멈춘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초고는 무조건 머리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쓴다는 대사가 나온다. 생각이 정리된 다음에 쓰겠다는 다짐은 영원히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오히려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놀라운 체험을 해볼수록 생각이 쓰기를 불러오는 게 아니라 쓰기가 생각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글쓰기는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다. 새로운 생각을 도출해서 쓰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체험적 통찰과 수많은 책과 논문에서 만났던 저자의 문제의식이나 독특한 주장이 융복합되면서 또 다른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습관적으로 밥 먹듯이 써라. 쓰는 습관이 글쓰기를 쓰기의 명인으로 만들어준다. 글쓰기는 정말 쓰다.



12. 틀에 박힌 언어 사용 방식을 부정하는 글쓰기를 시도하라. 타성과 고정관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언제나 틀에 박힌 일상의 반복으로 보인다. 색다른 경험이 낯선 통찰력을 주는 표현으로 바뀌려면 언어적 점성에서 벗어나 낯선 언어로 생각의 얼룩을 무늬로 바꿔내는 고된 연습이 필요하다. 언어 사용 방식이 틀에 박히면 아무리 뛰어난 통찰력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글쓰기로 절대 표현되지 않는다. 쓰기는 연상이다. 연결되어 상상되는 이연 연상의 틀에 박힌 범주를 파괴하고 난생처음 조합해보는 단어를 연결해보라. 철학적 사유를 자극하는 다양한 개념을 공부하면서 기존 개념을 재개념화 시키는 가운데 색다른 개념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낯선 사유를 새롭게 구축해보라. 관성으로 물든 현실 세계가 탄성으로 거듭나는 관찰과 통찰이 언어적 변주를 시작할 것이다.



13. 논리적으로 쓰되 감성적으로 설득하라. 논문은 논리적이어야 하지만 지나친 논리(論理)는 무리(無理)가 된고 머리로 이해는 가나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쓴다는 또 다른 의미는 누가 봐도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의미다. 논문이 객관적일수록 객관을 뒤집으면 관객이 되는 것처럼 논문을 쓰는 주체의 주관적인 주장이 실종되거나 숨어서 숨죽이고 기다리다 사망한다. 논리적으로 옳은 연구결과이자 실제 문제 해결을 위한 논문이지만 현장에서 먹히지 않거나 설득력을 잃는다. 옳은 주장이지만 먹히지 않는 연구결과는 연구를 위한 연구의 결과 나온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먹히는 논문, 설명으로 이해가 되지만 설득력을 잃은 논문은 현장 변화로 연결되지 않는다. 현장의 목소리를 현장의 언어로 담아 전달하되 논리적 설명력과 감성적 설득력을 겸비해서 글을 써라. 감성적 설득력은 연구자가 직접 체험하면서 겪은 통찰력아 낳은, 살갗을 파고드는 문장으로 심장을 공략할 때 탄생된다. 



14. 쓰면 끝나는 게 아니다. 쓰고 나서 여기저기 가서 발표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계기를 의도적으로 잡아본다. 학술지에 한두 번 시도한다고 게재되지 않는다. 심사위원의 감정적 비판도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 초보 연구자의 설움을 안으로 삭혀라. 아쉬운 사람은 나다. 본질이 왜곡되지 않고 희석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라.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태학적 상상력은 언어를 매개로 논문의 형식에 얽매이는 순간, 연구결과가 함의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사장된다. 일차적으로 제도권에서 학술적 권력을 갖고 있는 지배 집단의 칼날을 통과해야 후속 연구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세상으로 나와 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 논문이 된다. 내 생각이 아무리 훌륭하고 문제의식이 독특하다고 할지라도 그걸 다른 사람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학술 권력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도 학자로서 걸어가야 할 진정한 미래는 아니다. 독특한 주장일수록 심사라는 이름으로 거세되는 문제의식의 칼날을 다른 출판 매체를 통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5. 연구자의 삶이 틀에 박히면 연구자가 쓰는 글이나 논문도 틀에 박힌다. 질적 연구자의 글쓰기는 학문적 연구결과물을 양산하기 위한 수단적 도구가 아니다. 질적 연구자에게 글쓰기는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면서 삶으로 앎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산물이다. 삶을 능가하는 책이나 논문을 읽을 수 없고, 삶을 능가하는 글이나 논문을 쓸 수 없다. 읽기와 쓰기는 정확히 살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삼각관계의 주인공이다. 읽기와 쓰기 능력은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읽는 독서법의 문제가 아니고 쓰기는 작문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읽기와 쓰기는 살기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어제와 다르게 읽고 쓰려면 어제와 다른 삶을 사는 수밖에 없다. 질적 연구자의 읽기와 쓰기는 질적 연구자의 삶과 뗄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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