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 되면 가슴 한편에 고이 숨겨두었던 액자를 꺼내 닦아봅니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와 평생을 고생 속에 사셨고 위암에 시달리시다가 생을 마감하신 가슴 사무치는 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어느 날은 웃어주시고, 어느 날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꾸짖기도 합니다. 언제나 액자 속의 부모님 얼굴은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가 가신 세월의 얼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과거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온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강렬했던 감정의 파고가 몸속에 각인된 추억일수록 미래로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휩쓸려 잊히지 않습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셔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는 가끔 형과 누나들이 아버지 초상화를 보며 이야기해준 날들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계십니다. 그 기억이 흐릿하게 다가오다가 어느 날은 감정의 깊은 심연 속으로 스며들기도 합니다.
세상 어딘가에서 제가 오늘에 이르는 여정을 지켜보셨을 아버지. 저에겐 이 아버지라는 이름 석 자도 낯설기만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허공에 그려지기만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충북 음성으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폐교가 된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가면 아버지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있습니다. 우거진 잡초에 잠긴 아버지 비석을 만나러 가던 나날들이 줄어들긴 했지만, 비석과 제 마음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언제나 아버지 덕분에 오늘의 유영만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시켰고, 또 그렇게 굳게 믿고 싶었던 건 아버지 없이 자란 저에게 주는 위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씨도둑질은 못 한다’라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초상화 속의 아버지 모습과 나는 그렇게 닮아있습니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으며, 성격, 행동거지까지 신기할 만치 닮았고, 심지어 휘갈겨 쓰는 글씨체마저 빼닮았다는 가족분들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유전자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위대한 흔적이자 기적 같은 일임을 새삼 느낍니다.
물질적 자산으로 남긴 유산보다 글씨체에 담긴 신념과 철학, 미지의 세계를 향해 몸을 던지는 거침없는 도전 정신을 담아내는 글씨체 속에서 당신의 마음씨를 찾으며 당신을 불러봅니다. 무언의 흔적이지만 유언으로 남긴 기적보다 더 큰 울림으로 제 심장을 언제나 크게 두드립니다. 글씨에 마음씨를 담아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글과 말로 함께 살아갈 길을 밝혀보라는 유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봄에서 가을까지 각종 농사를 다 지어본 경험 덕분에 흙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생명력과 경이로운 기적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고추, 상추, 보리, 벼를 비롯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땀 흘리는 노동의 대가만큼 가을에 풍성한 결실로 가져다줍니다. 겨울에는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 마른 나뭇가지를 만나야 했습니다. 야생의 풀이나 땔감으로 쓰일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낫으로 정리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게를 지게에 짊어지고 날랐습니다. 지금도 지게와 낫은 내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지면서 한때 유년 시절을 보냈던 내 신체의 소중한 연장입니다.
겨울에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상추와 같은 채소 재배를 했습니다. 갑자기 폭설이 내리거나 예기치 못할 정도로 바람이 몰아칠 때는 밤잠을 설쳐야 했고, 비닐하우스를 지키며 밤을 지새웠던 기억도 그 어린 나이에는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여전히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따뜻한 추억입니다. 얼어붙은 손을 보잘것없는 입김으로 녹여가면서 온실 속에서 평온하게 자라는 채소들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는 야생에서 야성을 기르는 아이러니를 경험했습니다.
한때는 축구선수로 꿈을 키운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4학년 때부터 축구부에 들어가 매일 새벽 운동을 마치고 등교하는 고된 시간을 보낸 덕분에 오늘의 내가 갖게 된 기초체력이 생긴 원동력입니다. 운동화 살 돈이 없어서 고무신이나 맨발로 축구를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운동화를 신고 축구공과의 첫 마주침은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제 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맨땅에서 맨발로 마주친 축구공과 만든 수많은 주름은 똑같은 맨땅이지만 운동화를 신은 발이 축구공과 마주쳐 생긴 주름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철학자 들뢰즈가 아장스망과 다중체(multiplicity) 개념에 비추어 나의 어린 시절 축구를 했던 경험을 되살려보면 축구공이 맨발과 마주치느냐, 운동화 신은 신발과 마주치느냐에 따라 아징스망, 즉 배치가 달라지고, 배치가 달라지면 그때 생기는 주름도 달라집니다.
맨발로 땅에서 축구하던 익숙한 주름은 운동화를 신고 축구를 하는 또 다른 주름으로 바뀝니다. 이처럼 인생은 한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떤 조건으로 일을 하는지에 따라 아장스망이 달라지고 덕분에 다양한 주름이 축적되어 그 사람의 이름값을 하는 정체성이 생기는데 그게 바로 다중체입니다. 시름시름 앓던 인생의 주름이 나름의 정체성을 지니면서 한 사람의 이름값을 한다는 사실만 상기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 년 사계절, 매일 새벽에 일어나 축구 연습을 합니다. 산 중턱을 오르내리고, 나무 사이로 빠르게 빠져 다니고, 백마령 고개라는 곳까지 4Km를 거의 매일 뛰었습니다. 훈련에 조금이라고 게으름을 보이면 가차 없이 축구 코치 선생님의 불호령과 함께 처벌도 내려집니다. 한 번은 방학 때까지 매일 축구 연습하는 게 싫어서 무단으로 시골 누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거의 죽음에 가까운 혹독한 벌칙 훈련을 받았습니다. 산 중턱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정말 쓰러졌습니다.
힘든 훈련을 힘들게 받는 동안 나도 모르게 힘든 세상을 살아가며 버티는 힘이 길러졌습니다. 힘들어야 힘이 들어간다는 사실도 몸으로 확인하고 증명했던 경험이었습니다. 혹독한 훈련에 비까지 내리는 날이면 학교에 안 가려고 떼를 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방을 둘러메고 문 앞에 앉아서 찡찡거리며 어리광을 부리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받아준 적이 없습니다. 알아서 견뎌보라는 방목형 학습전략이었던 모양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중학교로 진학할 형편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한없이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무런 저항 없이 평생 농사나 지으면서 살아갈 운명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겨울에는 수렵을 통해 토끼를 사냥해서 잡아먹고, 봄에는 각종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자랐습니다. 여름에는 어로 생활을 통해 개울가에 가서 미꾸라지나 붕어를 잡아먹었고, 가을에는 들판의 개구리나 메뚜기를 생포해서 구워 먹었습니다. 이른 봄부터 모내기를 하고 고추를 심으며 농경 생활을 한 덕분에 수렵, 어로, 채취, 농경이라는 화두가 제 삶의 큰 이력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논 덕분에 어린 시절 책을 읽지 못했어도 책보다 더 소중한 상상력을 배웠습니다.
가장 하기 싫은 농사일 중의 하나가 한여름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논밭 일을 하는 농사일입니다. 그보다 더 싫은 농사일은 햇빛이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전에 새벽에 일어나 밭에 나가 잡초를 뽑고 흙을 북돋우며 일하는 새벽 노동입니다. 한여름 땡볕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농사일을 한다는 건 정말 극한 노동 중의 노동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몇 배 더 싫은 일은 잠을 설치며 일어나 새벽 찬 이슬을 맞으며 먼동이 터오는 시간을 벗 삼아 풀을 뽑는 새벽 농사였습니다. 낮에는 너무 더워도 걱정이고 너무 추워도 걱정입니다.
비가 안 와도 걱정이고 비가 너무 많이 와도 걱정입니다. 농사는 최선을 다한 다음 자연의 답을 기다릴 뿐입니다. 노력한다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농사입니다. 나의 노력이 자연의 흐름과 맞아떨어질 때 큰 성취감과 보람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을 안 하는 순간 결정적인 그 순간이 농사일 전체를 망칠 수도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물꼬를 터줘야 할 때 터주지 않으면 고이는 빗물에 벼농사의 앞날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각자 맡은 분야의 일을 적기에 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배웠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농사일에 전념하지만 늘 어두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던 게 딱 한 가지 있었습니다. 신작로 앞을 지나다니는 동기생의 중학교 등굣길을 멀리서 숨어 바라보면서 괜스레 서글퍼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같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저 등굣길에 왜 나는 없는 걸까? 그 동기들의 중학교 등굣길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부끄러운 꿈으로 늘 눈앞을 아른거렸습니다. 그래도 나도 언젠가는 학교에 갈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막연한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늘 불가능한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매일 엄습하는 좌절이 더해지면서 어린 농부의 손길은 언제나 차가운 좌절과 절망에 떨리기만 했습니다.
힘들게 용기를 내서 어머니를 설득, 1년 늦깎이로 중학생이 되었지만, 학교생활과 집안일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시면서 틈틈이 가게 보탬이 되는 장사를 하셨습니다. 가게에서 팔던 맛동산이나 꿀짱구가 너무 먹고 싶어서 몰래 훔쳐서 숨겨 놓고 먹다가 들켜서 혼났던 경험은 과자에 대한 안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쌈짓돈을 모아 가계를 꾸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살림을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겁니다. 당시 내가 손을 써서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는 묵묵히 논밭에 나가 농사일을 거드는 일뿐이었습니다.
중학교는 자전거로 왕복 8Km를 통학하면서 달밤에 비치는 시골 신작로 길의 낭만도 나름 즐기면서 가끔 시인이 되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비나 눈이 오고 추위가 급습할 때마다 느끼는 난감한 통학 길이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자전거에 몸을 싣고 3년을 다녔습니다. 그때만 해도 웬만한 자전거 고장은 스스로 고칠 수 있었습니다. 펑크 난 타이어를 바람을 넣고 물속에 집어넣은 다음 물방울이 치솟는 곳을 찾아 그곳을 다시 때우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버스로 통학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내 몸을 연료 삼아 움직이는 자전거 통학도 나름 매력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가장 서글픈 일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늘 소화불량으로 고생하시는 모습이 제일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무엇을 드시든 맛있게 드시지 못하고 늘 드신 음식을 소화하기 버거워 소화에 도움이 되는 소다를 식후에 입에 털어 넣은 안타까운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을 하얗게 지나갑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드신 소다는 결국 위암을 부르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약 한 봉지 드시지 않고 버티며 고된 일상을 몸을 무기로 버티다 끝내 건널 수 없는 다리에 직면하기를 수차례 반복하셨습니다. 안타깝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등을 두드려 드리고 어깨와 목 주위를 안마해드리는 적은 노력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속이 뻥 뚫릴 것 같다면서 흐뭇해하시는 모습은 가물에 콩 나듯 보기 드문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얼굴에 시름이 맺히고 주름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도 어린 아들이 그걸 막을 재간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는 금오공고를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학비도 면제해주고 졸업 후 취업도 시켜준다는 감언이설에 나에겐 최적의 탈출구이자 대안이었습니다. 운명의 장난으로 공부를 전교 석차 순으로 볼 때, 나보다 앞서서 조금 잘하는 친구가 원서를 써버린 덕분에 나는 차선책으로 수도전기공고에 입학하는 다른 행운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운명은 한순간에 결정됩니다. 만약 내가 금오공고를 갔으면 또 다른 인생 곡선이 그려졌을 겁니다. 팔자가 나를 다른 수도전기공고로 이끌은 덕분에 또 다른 운명을 만든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요. 당시 한국전력공사에서 운영하는 수도전기공고 역시 공부도 시켜주고 숙식 해결은 물론 졸업 후 취업까지 보장되어 나에게는 천혜의 혜택이 주어지는 최고의 대안이었습니다. 갈 곳도 없고, 학비는 물론 생활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의 나와 같은 시골 학생들에게 수도전기공고는 미래로 가는 관문을 열어주는 최상의 해결책이었습니다.
학교생활은 학교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군대처럼 일조-일석 점호도 취하고 불침번도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서야 했습니다.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여름밤, 홀로 어둠에 휩싸인 복도를 걸어 다니는 두려움은 어린 나이로 견디기 어려운 타향살이였고, 시골생활에 젖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첫 경험이었습니다. 기숙사 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선배들에게 당하는 구타였습니다. 이유 없이 거의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시간이 갈수록 꿈에 그리던 학교는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은 교도소 같은 곳으로 전락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했는지 멍든 허벅지 위에 다시 구타를 당해 시퍼렇던 부위가 시커멓게 변해도 그때는 힘없이 맞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공고는 다 이렇게 삼엄한 군기로 선후배 간의 넘을 수 없는 수직적 위계관계 속에서 절대복종하는 군대와 같은 분위기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습니다. 지금도 선배들을 만나면 솔직히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내가 맞은 매의 몇 배 이상을 몽둥이로 패고 싶은 심정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불타던 그때의 불길이 좀 잦아들기는 했지만 불타는 중심에서 타고 있는 앙심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정말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공고 시절의 기숙사 생활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은 아직도 시도 때도 없이 서러운 꽃으로 만발합니다.
가끔 외출허가를 받고 속리산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면 고향으로 향하는 설렘과 동시에 점차 기울어가는 집안에 대한 걱정이 교차하면서 언제나 이번 귀향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다닌 적이 있습니다. 장마가 심하면 떠내려갈 듯 앞마당으로 흙탕물이 흐르고, 쓰러져가 가는 화장실을 손볼 자신은 없고, 밤이 되면 천장에서 쥐들의 놀이터가 열리는 시골집은 나에게 안식처라기보다 잠시 머물렀다 빨리 탈출하고 싶은 슬럼가의 쓰러져가는 주택이었습니다. 어느 날, 도둑이 애지중지하며 기르던 소를 훔쳐 간 날에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고달픔의 눈물이 앞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소가 끌려나간 발자국에는 아직도 제 눈물이 흐르다 고인 시련의 아픔이 살갗을 파고들어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주야로 시끄러운 손님들의 술주정 덕분에 책 한 페이지 넘길 시간조차 없을 때, 공부하려는 내 마음 자체가 너무 화려한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죄 없는 노동이기에 거대한 삶의 무게를 둘 리는 수레바퀴에 시름을 실어 밖으로 내보낼 뿐입니다. 무겁게 짓눌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서울 개포동 수도공고 기숙사로 향하는 주말 저녁이면 어둠이 급습하는 저녁만큼이나 앞날도 무거운 어둠의 장막으로 수시로 가로막힙니다.
그럼에도 용돈 한 푼 쥐여주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내 머리는 이미 들어가 계산을 시작합니다. 대책 없이 무너져가는 우리 집은 도대체 누가 이런 작당모의 끝에 탄생시킨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손을 내밀어 건져낼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는 것인지, 나는 도대체 누가 낳은 것이며, 왜 이런 곳에 내던져놓고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 것인지,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만큼이나 신세 한탄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한탄은 나를 더욱 한심하게 만들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실린 가족사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돌봄의 따뜻함을 잊어버린 나는 언제나 차가운 손발을 스스로 단련하면서 한겨울의 추위도 이겨내고, 멸시와 괄시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가까운 사람들의 무관심에도 이해할 수 없는 앎의 깊이가 있음을 무심코 깨닫는 계기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따듯한 손길과 눈길의 무한한 사랑의 깊이를 가늠해보는 시간을 갖는 기회가 되었고, 힘든 시기를 버티는 나만의 사기 진작 방안도 스스로 강구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고2가 되던 어느 날 위독하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찾아뵈었지만 이미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나 안식처에서 영면하셨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없어졌고, 의지할 버팀목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린 날, 가기 싫은 용접기능공으로 향하는 객지의 고등학교 생활은 그때부터 설상가상으로 짙은 어둠의 터널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잔소리보다 믿음의 눈빛으로 나의 가는 길을 무조건 응원해주셨고,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늘 지금의 위치에서 강구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진통이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내색조차 하지 않으시고, 삶의 무게를 혼자 다 짊어지고 평생을 아픔의 뒤안길에서 남몰래 장막을 쳐놓고 혼자 감당하셨습니다. 모질게 다가오는 현실적 압박에도 굴하는 듯 굴하지 않고 노을이 넘어가는 서산을 바라보며 해가 뜨는 내일의 희망을 묵언이지만 심장을 두드리는 큰 울림을 가르치지 않고 큰 가르침으로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살아갈 날이 나에게는 그저 어둠의 장막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생긴 하나의 목표는 지금 여기서 다니는 고등학교는 졸업하자는 다짐입니다. 그나마 학교가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암담한 미래지만 취업의 문으로 데려다주는 지금의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밤늦게 용접을 하다 실습동에서 빠져나와 유독 빛나는 밤하늘의 별이 저에게는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용접봉이 녹으면서 튀는 불꽃에 잔구멍이 모래알처럼 생긴 작업복 속에는 여름에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겨울에는 따듯한 온기를 넘어 열기로 자랍니다. 3천 도가 넘는 전기용접 불꽃에 들끓어 오르는 짧은 과거의 회한과 살아갈 암담한 미래가 같이 녹아내리면서 뒤범벅으로 흘러넘치는 쉿 물로 함께 뛰어듭니다. 이질적 철판이 용접봉의 열기에 혼절이 되어 쉿 물로 뒤섞이듯 나의 과거와 현재도 미래가 부르는 서글픈 운명 속으로 녹아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오로지 불꽃만 튀기는 전기용접 실습실에서 가끔은 벗어나 밤하늘의 별을 벗 삼아 나눈 침묵의 대화가 견디기 어려운 그 시절을 감내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철판용접 기술 덕분에 지식용접의 노하우가 생긴 건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참으로 복잡한 가족사가 뒤엉켜 있어서 글로써 밝히기 가슴 아픈 사연들이 인생의 시기별로 곳곳에서 잠복근무하고 있습니다. 사연 속에서 깊은 사유를 키운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나에게 울분과 설움의 어중간한 지대에서 여전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튀어나오고 싶지만 억눌린 채 욕망의 물줄기가 흐르는 시간의 한 지점입니다. 고백으로 치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용서로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지도 않습니다. 참고 견디며 살아가면서 다짐과 결의로 극복하기에는 심정의 깊이가 너무 얕고, 의중의 심연에는 뿌리 없이 자라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뿐입니다. 기구한 운명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숙명도 아닙니다. 그냥 내가 거기서 태어나 여기서 지금 살아가는 유영만이라는 존재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 모습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고, 포기하고 싶은 인생도 질긴 인연의 끈으로 이곳까지 데려다 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릿발에 새겨진 탄생의 역사도 해가 뜨면서 녹아 없어집니다. 다만 녹아 없어진 그 자리에 담긴 흔적의 역사와 억눌림의 무게가 얼룩으로 번지기도 하고 무늬로 거듭나면서 부단히 현실로 살아 움직일 뿐입니다. 귀로 들은 폭력, 말로 번진 견디기 어려운 고달픔의 사연들이 생각의 촉수를 거느린 채 몸 곳곳에서 늘 꿈틀거립니다. 집중과 몰입이라는 미명으로 잠재우며 달래고 타일러서 무의식의 깊은 심연에 잠재웁니다. 당분간만이라도 살아 움직이는 지금의 이 정도 삶에라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스치는 바람에 시름을 날려 보냅니다. 상속받을 자산이 없는 덕분에 스스로 산에 오르며 운명을 개척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사실은 있었지만 복잡한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서 포기했습니다. 그 뒤로 가족은 가깝고도 먼 족보의 한 귀퉁이에 명맥을 유지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가상의 얼굴들로 남아 있습니다. 족보에 새겨진 나의 이름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가문의 전통이지만 족보 속에 새겨진 나의 이름은 경험하기 싫은 진통 속에서 오늘도 내일을 향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늦은 밤까지 용접 실습을 하고 기숙사에 올라와 잠을 청하는데 아래층에서 후배들이 광란의 밤을 보내는 노랫소리가 심한 소음으로 들렸습니다.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했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소음이 굉음에 가깝게 돌변하는 순간 내 마음도 들끓다가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옥상에 120명의 후배를 집합시켜 놓고 한 사람당 5대씩 600대를 몽둥이질했습니다. 몽둥이질을 지켜보다 맞기도 전에 기절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교장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학부모의 하소연이 담긴 탄원서 비슷한 문건이 전달되면서 전날의 후배 구타 사건은 무기정학으로 이어졌습니다. 내 인생의 오점이 남기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교실로 등교하지 않고 교무실로 등교해서 반성문을 쓰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 맞아보는 학교처벌로 무너지는 마음이 급류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방탕의 물줄기가 불빛에 그을려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석점호를 마친 다음 몇몇 동료들과 학교 담을 넘어 개포동 포장마차에서 소주와 동해백주를 마시며 회색빛 청춘에 앓음다운 얼룩으로 수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기는 동해 백주, 알콜 30도 정도 되는 술은 그 당시 소주보다 독한 술이었습니다. 나에게 닥친 시련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술이었습니다. 술을 마신다고 깊은 고민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불량학생의 터널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무기정학으로 반성하는 시간은 저에겐 모욕이었고 치욕이었으며 맨정신으로 버텨내기 힘든 고단한 수행시기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음주후 담 넘어 학교로 돌아오다 수위 아저씨에게 발각되고 음주 상태는 여지없이 들통났습니다. 개포동의 새벽을 향하는 밤의 적막이 수위 아저씨의 불호령으로 빙판의 얼음 깨지듯, 산산조각 깨지면서 개포동 벌판에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무기정학에 음주면 이제 갈 길은 딱 한 곳 뿐이었습니다. 퇴학입니다. 손바닥이 닳도록 빌었고 무릎이 깨지도록 조아렸습니다. 다행히 사건은 거기서 마무리되어 퇴학으로 가는 길은 간신히 면했습니다. 오늘의 유영만을 만든 은인 중의 한 분은 바로 그 당시 학교를 지키시던 수위 아저씨입니다. 그분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길을 잠깐 걷다가 다시 음주벽은 돋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선배들의 구타는 끝이 보이지 않고, 학교에 가면 이따금씩 터지는 조교들의 폭압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다시 일석점호가 끝나면 월담을 하고 은마 아파트 앞 포장마차에서 마실 돈이 부족해서 가게에서 어렵게 술을 사서 논두렁에서 새벽까지 깡소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때 너무 많이 마신 소주 때문에 지금은 소주를 마시지 못합니다. 그렇게 빈속에 들이부은 소주가 위에 들어가 힘든 회색빛 청춘을 위로해준 덕분에 위는 별 탈 없이 지금까지도 음식을 맛있게 받아내고 소화시켜줍니다. 한 번은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친구들과 작당 모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돈을 모아서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서 삼겹살집에서 1인분만 시켜놓고 구워먹다 주인에게 들통이 난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경험하면서 삼겹살에 대한 고통의 삼겹살이 몸에 새겨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전기공고를 졸업한 덕분에 예정된 취업전선으로 이어져 평택화력발전소에서 2년간 근무했습니다. 방탕의 길로 들어선 회색빛 청춘은 평택과 송탄의 밤무대에서 주연배우 행세를 하며 음주의 행렬은 한 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적막한 어둠으로 짙게 깔려 있고, 미래는 암담한 장막이 막막하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게 목표이고 내일을 향한 꿈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해가 뜨면 출근하고 해가 지면 퇴근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발전소 특유의 근무방식에 무조건 순응하며 늘 취해서 세상의 고뇌에 취했던 시절입니다.
발전소의 발전기는 24시간 돌아가야 전국을 밝힐 수 있고 공장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사람도 24시간 근무를 해야 해서 4조로 나눠서 근무시간을 바꿔가며 교대근무를 합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오후에 퇴근하는 1조, 오후에 출근해서 늦은 밤에 퇴근하는 2조, 늦은 밤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3조가 끝나면 4조가 되어 하루를 쉽니다. 이런 교대근무를 반복하다보면 생체 에너지가 고갈되고 삶의 리듬이 깨지고 나도 모르게 건강을 잃어갑니다. 각 조별 근무가 끝나면 어김없이 술집으로 직행, 고단한 하루와 인생을 실어 술을 마시지만, 오늘도 내일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후 늦게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할 때는 발전소 꼭대기 층에 올라갑니다. 거기에 올라가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저녁노을이 남양만을 수놓으면서 오색찬란한 인생의 한 순간을 만드는 장면을 만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어둠이 깔리면서 밤하늘은 다시 별들의 향연이 소리 없이 펼쳐지면서 새벽을 잉태하지만 나에게 잉태된 미래는 암담한 적막 속의 어두운 그림자뿐입니다.
그 후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기까지는 다른 글에서도 몇 번 밝혔듯이 고시행 기차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한양대 교육공학과에 입학했지만, 행복의 목적지로 가는 열차가 아님을 알고 중도에 포기하고 하차했습니다.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데려다 준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명언을 자주 되뇝니다. 스승님 덕분에 공부하는 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고, 교육공학의 본산지인 미국까지 유학가서 공부에 전념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다 저를 지극한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신 스승님 덕분입니다. 저에게 스승님은 부모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생계를 책임져줄 대안을 만들어주시고 앞날을 걱정해주시며 공부하는 여정에 열정을 더해주셨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 길 역시 저에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학비는 면제되고 생활비 일부도 지원받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정까지 아르바이트에 몸을 던지고, 밤늦게 퇴근, 새벽 5시까지 공부하다 잠깐 잠을 청한 다음 다시 주독야경(晝讀夜耕)하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늘 은행의 통장잔고는 두 자릿수를 왔다 갔다 하는 피 말리는 재무적 위기와 불안감 속에서 근근이 버티며 무사히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심리적 불안감과 위압감은 외부적 대안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몸과 같이 붙어 다닙니다. 힘들지만 다정한 친구로 데리고 다니며 보살펴야 할 나약하지만 지독한 감정입니다.
힘들고 견디기 어려울 땐, 새벽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플로리다의 밤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한번 도움을 누군가에게 요청했다가 심하게 거절 받은 뒤로부터는 살아가는 동안 절대로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말고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릴 때는 더 고개를 쳐들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흐르는 눈물이 역류라도 해서 다시 몸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습니다. 기분이 울적할 때는 없는 시간 쪼개서 차를 몰고 세인트조지 아일랜드 바닷가로 달려갑니다. 대서양 앞바다에서 파도가 몰고 오는 세월의 아픔을 하얗게 토해내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저녁노을이 만들어가는 황혼빛 바다와 함께 복잡한 머릿속을 희석시킵니다. 지도교수님의 전폭적인 지원과 아낌 없는 사랑 덕분에 비교적 짧은 시간에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유영만이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신 소중한 저의 스승님입니다.
박사학위 취득 후, 지인들 덕분에 삼성인력개발원에 입사해서 1995년 《지식경제시대의 학습조직》이라는 첫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직장인이 책을 내면 인세소득을 올리기 때문에 이중소득자가 되어 불법이라는 억지 논리가 있었습니다. 난관에 부딪치면 돌파구를 찾아 대안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인세를 받아서 불우이웃돕기에 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되는 방법보다 안 되는 이유를 찾아서 꼬투리는 잡는 안타까운 사람 모습에 크게 실망했지만 그래도 장애물 덕분에 책을 내는 길을 몸으로 알아냈습니다. 그 동안 나를 찾아준 사건과 사고 덕분에 나의 사유가 바뀌었고 사고방식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깨달음의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첫 출산한 책을 발판 삼아 끈질기게 노력하며 지금까지 100권의 책을 내는 작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도움과 은혜의 손길이 있었지만, 나의 존재가 품고 있는 자기보존 욕망을 넘어서 자아를 확장시키시려는 적극적인 노력과 능력, 즉 코나투스가 욕망하는 에너지 덕분에 지치지 않고 재미있고 의미있는 저술의 여정에 열정을 담아왔습니다. 여정은 언제나 완벽하게 끝나지 않는 미완성의 과정입니다. 그 여정 위에서 오늘도 어제와 다르게 여유 속에서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혼자 힘으로 버틴 지난 모든 순간들도 누군가 힘이 되어준 덕분(德分)이고, 내가 몸담았던 조직과 환경, 그리고 제도와 시스템 덕택(德澤)입니다. 덕분에 오늘의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되었고, 덕택에 모교의 유영만 교수가 되었습니다. 험난한 일들이 예기치 못하게 일어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급랑의 물결에 휩쓸려 표류도 하고, 서슬 퍼런 앙심의 한을 품고 밀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하얗게 질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다는 저의 살아가고 싶은 간절함을 받아주었습니다. 이제 앞날에 뭔가를 달성할 목표를 세우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습니다. 해오던 읽기와 쓰기, 그리고 강의와 강연을 언어를 벼리고 벼리며 감동을 주는 말과 글을 매일 모루 위에서 단련하는 삶을 습관으로 살아갑니다. 대단한 결심과 중후한 비전을 품지도 않습니다. 밥 먹듯이 운동하고 읽고 쓰면서 어제와 다르게 생기는 차이를 반복합니다. 그 반복이 반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족이 저를 낳아주었지만 저는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또 다른 가장으로 살아갑니다. 짧게 사시다 세상을 떠나셨지만 짧은 시간에도 제가 받은 부모님 사랑 덕분에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의 파고를 넘나드는 용기와 지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홀로된 어린 시절을 외로움의 우수에 젖어 들지 않고 고립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고독력으로 한 많은 세상을 살아오는데 정말 많은 사람이 베풀어 주신 은혜 덕분에, 오늘 100권째 책을 내면서 이런 감상(感傷)에 젖어 세상을 향한 감상(感想)에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주는 감동은 다 제가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 덕분입니다. 한 많은 시련이었고 역경이었지만 시험으로 주어지는 다양한 체험과 모험 속에서도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드는 저의 지혜 역시 당신들의 보살핌 덕분이었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고독력 속에서도 꾸준히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미덕을 베풀어 주신 부모님 덕분입니다. 오늘까지 저를 지켜봐 주신 덕분에 오늘의 제가 다른 사람에게도 작은 지혜를 베풀 수 있는 길을 터주었습니다. 오늘 그분들에게 100권째 책을 특별한 선물로 드립니다. 당신들 덕분에 이룩한 금자탑(金字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