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읽고
인공지능 시대, 읽기와 쓰기의 생성(generation)을 다시 생성(becoming)하다:
《인공지능은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읽고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변화는 물론 경제기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면서 교육분야도 예외 없이 배우고 익히는 학습과정을 촉진시키는 교수학습 패러다임을 흔들어놓고 있다. 문제는 인공지능 기술이 가져올 기술결정론적 변화에 주목한 나머지 장밋빛 미래를 예측하거나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적 리터러시를 배울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공지능이 몰고 오는 변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영상이나 이미지가 대세인 시대,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리터러시의 방향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했던 김성우 저자가 이번에는 《인공지능은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일과 학습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려는 관련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기에 인공지능과 함께 하는 읽기와 쓰기의 변화,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바꿔나가는 리터러시의 의미를 비판적로 재조명하는 책이라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책과 눈이 맞으면 단순히 읽었다고 하지 않고 읽어버렸거나 읽고 말았다는 고백을 망설임 없이 하게 된다. 인공지능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지금 여기서의 우리들의 삶을 성찰해 보고 읽고 쓰는 창작의 본질적 의미가 인공지능이 관여되면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문해력을 개인적인 역량으로 간주하지 않고 관계론적 역량으로 재해석한다. 문해력은 “개인의 머릿속에 쌓여 있는 정적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역동적 실천”(51쪽)이자 “특정 공동체와 조직에 분산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 새롭게 조합되며, 구성원들의 문해력 발달과 전인적 성장을 돕는 집단의 역량”(51쪽)이다. 문해력에 대한 이런 재정의와 재해석은 인공지능을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나 기술을 익혀 일의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제고하는 기능적 리터러시를 넘어 인공지능이 일상적 삶은 물론 사회경제적이고 생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근원적으로 살펴보고 자신을 둘러싼 관계적 변화에 날 선 관점으로 바라보는 비판적 리터러시와 성찰적 리터러시로 새롭게 개념변경을 요구한다. 개념이 변경되어 재개념화 되면 감춰진 세상이 새롭게 열리고 그 개념이 품고 있는 세계를 이전과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개념은 자기 생각과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기도 하다.
질문을 바꾸면 관문도 바뀐다
저자는 우선 질문부터 바꾸자고 제안한다. 인공지능 시대 어떻게 하면 기술진화 속도를 따라잡으며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부가가치를 드 높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질문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다. 즉 지금 여기서 우리는 읽고 쓰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나 리터러시 생태계의 근본적 변화 속에서 읽고 쓰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잘 돌 볼 수 있을까로 바꿔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를 활용하는 접근논리는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내느냐가, 하루를 어떻게 읽어내고 기록하느냐가, 어떤 이야기를 건네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느냐가, 어떤 삶의 가치를 지켜내느냐가 시대를 선언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보다 더욱 긴급하고 중요하다는 사실”(59쪽)을 강조한다. 인공지능의 몰고 올 미래에 대한 준비를 강조할수록 과장된 메시지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과거에 대한 암묵적 망각이 은밀하게 강조되는 사이에 현재는 언제나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그럴 때마다 기술적 탁월성이 끌고 가는 화려한 변화의 그림자에 파묻혀 기술적 영향력으로 생기는 본질적 변화의 뒤안길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물론 질문이 중요하지만 좋은 질문을 던져놓고도 이에 대한 대답의 질적 속성을 판단하는 심미안적 안목이나 비판적 사유 능력 없이는 좋은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인지를 알 수 없다. 좋은 질문은 자신이 관심을 두는 분야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갖추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는다. 전문지식의 깊이는 물론 배경지식의 넓이가 확보되어야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질문은 일방적이지 않다. 좋은 질문, 날카로운 질문, 뜻밖의 질문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갖추는 독립적인 역량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주변 상황과 만나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며, 전문지식이나 배경지식과의 부단한 대화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정곡을 찌르거나 전반적 상황을 정리하면서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질문을 던질 수 없다. 질문은 탈맥락적 공간에서 단순히 질문 주체의 호기심이나 열정만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질문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질문하는 방법이나 기법을 가르치는 경우, 생각만큼 개 대했던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이유는 질문은 기법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지식과 배경지식의 심오한 깊이와 풍부한 넓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질문은 독립적인 공간에서 외로운 탐색의 결과 생기는 개별적 호기심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적 화두의 태생적인 배경이나 사연을 기반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역동적인 관계망 속에서 잉태되는 사회적 합작품이다. 즉 질문은 개인의 독립적 역량의 산물이 아니라 질문을 장려하고 촉진하는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관계론적 역량의 부산물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현실 속 인간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평균으로 수렴되지 않는 개성과 몸 그 자체이며, 다양한 사회경제적·정치적·기술적 특성을 지닌 구체적인 사람들”(25쪽)이 인공지능과 함께 어떤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미래 사회 변화추세나 기술발전 동향에 비추어 읽기와 쓰기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예단하기보다 “타인에 의해 선언된 시대에 규정당하기보다 우리가 희망하는 시대를 직조하는 읽기와 쓰기의 가능성을 탐구”(65쪽)하고, “저 먼 곳의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 정의하는 인공지능을 고민”(65쪽)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예를 들면 인공지능 시대에 질문이 중요하다는 주장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과연 질문만 잘하면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아낼 수 있는지를 다시 질문을 던져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프롬프트로 질문을 잘 디자인해서 인공지능에게 요청한 답에 흐뭇해하면서 감탄사만 연발하다가 우리가 잃고 있는 읽기와 쓰기의 진면목은 무엇인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관점의 변화가 도구를 사용하는 습관과 관습도 파괴한다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을 결정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일상적 삶은 물론 사회경제적인 측면과 교육적인 측면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구적 관점에 비추어 본 인공지능은 양날의 칼처럼 사용자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두 얼굴을 지닌 실체로 인식된다. 저자의 인공지능에 대한 관점은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적 변화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다각적인 측면의 긍정적 순기능을 포함 역기능적 폐해나 한계 또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는 시각이다. 비판적 관점에 비추어 본 인공지능은 러시아의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의 주체와 대상을 매개하는 인공물이나 도구의 중재(mediation) 개념에 주목하게 된다. 작가(subject)가 인공지능이라는 중재도구(mediational tool)를 활용하여 책이라는 대상(object)을 만들어 낸다. 중재도구인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혁신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고, 그걸 어떤 목적으로 누가 사용하는지에 따라 효율적인 창작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관점은 인공지능이 읽기와 쓰기에 미치는 리터러시 전반에 대한 사회문화적이고 교육적인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려는 노력이다.
“인공지능이 중재하는 행위·의미·관계가 각자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나아가 그 사회적 영향이 어떠할지는 예측하거나 일반화하기 힘듭니다”(343쪽). 인공지능이 바꾸는 미래가 독립적 인공지능 기술이 주체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일어나는 사회문화적 관계 맺음 방식의 변화이자 경제적 생산양식의 근본적인 전환에서 비롯된다. 교육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교육과 노동의 생태계 속에 새로운 비인간 존재가 자리를 잡아갈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새로운 도구를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새로운 비인간 존재와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법을 고민하는 일”(393쪽)이다. 인간만 주체적인 학습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발상에서 벗어나 인공지능을 비롯한 수많은 비생명체도 인간 학습자는 물론 다른 비생명체와의 관계에 서로 다른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로 파악할 때 인공지능이 포함되는 새로운 학습생태계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 인간 학습주체의 주도적 학습능력은 한 사람의 외로운 노력으로 생성된 산물이 아니라 인간 학습자와 직간접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창발적 상호작용 덕분에 생긴 부산물이다. 인공지능은 물론 주어진 환경이나 맥락적 조건이나 변수들의 우발적 마주침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예기치 못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계획에 없었던 새로운 의미가 탄생되고 뜻밖의 놀라운 문장이 단어들의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건축되기도 한다.
사람의 언어는 침묵이자 주저함이고, 끝맺지 못한 문장이자 떨림이며, 푹 숙인 고개다
프롬프팅 디자인만 잘하면 인공지능을 마치 나의 수족처럼 사용하면서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장된 주장을 주변에서 자주 만난다. 프롬프팅 엔지니어링이 앞으로 각광받는 새로운 분야라고 하면서 미래 인재의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으로 손꼽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과연 그럴까”라고 갸우뚱하면서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프롬프팅으로 인공지능을 통해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이 읽기-쓰기의 본령을 저버리는 일은 아닐까요? 우리가 글쓰기에 마음과 정성을 쏟는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뚝딱 던져줄 만한 텍스트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신속한 텍스트 생산의 과정에서 종종 잃어버리는 생각의 결·세심한 느낌·새로운 관점을 찾기 위해서는 아닌가요?”(267쪽). 텍스트는 한 사람이 몸담고 있는 콘텍스트에서 주체적인 고뇌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경험과 생각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탄생되는 인고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를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효율로 급조할수록 나의 주체적인 생각과 열정적인 문제의식이 담긴 텍스트는 실종되기 시작한다.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져 얻고 싶은 텍스트를 생성할수록 “인공지능을 통한 ”흐릿한 읽기 “나 ”뭉뚱그리는 쓰기 “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저자와 자기 사이를 깊게 파고드는 읽기·경험의 박동과 손끝의 떨림을 새기는 불가능”(267쪽)한 까닭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지 않는 다양한 사람은 저마다의 콘텍스트에서 나름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갖고 기대하거나 의도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다. 신체성이 삶의 현장성을 만나 일어나는 구체성의 글쓰기는 이미 공식화된 프로세스대로 정해진 단어를 배열해서 문장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다. “인간은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자리에 놓기보다 단어들 사이를 유영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끝없이 재정의하며, 그들을 시시각각 재배치”(130쪽)하는 와중에 문장을 건축하는 노동자다. 사람의 글쓰기는 자신이 겪어본 경험을 통해 생긴 감정이나 생각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 내는 단어를 고르고 배치한 다음 다시 고민하며 알맞은 단어들이 알맞은 곳에서 자기 본분과 역할을 수행하며 작가가 쓰고 싶은 의도를 반영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한다. 이때 기존 단어가 다른 단어로 바뀌기도 하고 단어의 배열이 바뀌어 이전과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언어는 자신이 겪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단어 선택에 따르는 고뇌나 망설임도 없다. 그저 수학적 알고리듬에 따라 통계적으로 정확한 단어를 선택, 필요한 위치에 처방할 뿐이다. 인공지능의 언어는 정확하고 매끄럽고 깔끔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어떤 단어를 어느 곳에 배치해야 되는지, 그 자리에 그 단어가 적합한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망설이며 주저하는 끈질긴 자기와의 싸움은 생략되어 있다.
인공지능의 언어에 고뇌하는 사람의 깊은 심리적 아픔이나 선택적 의사결정에 따르는 사고와 언어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쓴다는 것은 기계적 단어 선택과 통계적 처리의 문제가 아니다. “삶에 뿌리박은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웹상의 방대한 빅데이터가 아니라, 여태껏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자리에 맞는 적확하고도 온기를 담은 언어”(131쪽)다. 이때 인간이 선택하는 언어는 “침묵이고, 주저함이고, 끝맺지 못한 문장이고, 떨림이며, 푹 숙인 고개(132-133쪽)다. 사람이 선택한 단어에는 그 사람이 겪어온 삶의 깊이와 넓이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고, 결연한 용기와 멈출 수 없는 열정이 숨어 있으며, 통제 불가능한 감정이 단어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더욱이 사람의 글쓰기에는 글을 쓰는 주체는 물론 그 사람이 지향하는 또 다른 사람이나 사물은 물론이고 그 글이 탄생하는 상황적 맥락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담아 표현하려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사고와 언어의 유기적 결합”(135쪽) 또는 “텍스트와 사고가 변증법적으로 엮이는 과정”(136쪽)이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바로 기계적 글쓰기와 인간적 글쓰기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인공지능은 정보처리 기계이자 통계 엔진이다
“세계는 인간의 몸으로 끊임없이, 예고 없이,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스며들고 침투”(143쪽)하면서 “인간은 세계와 만나면서 몸을 변형시켜 나갑니다. 하지만 기계학습은 이런 몸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습니다”(123쪽). 사람은 몸으로 겪어내며 땀을 흘리지만 인공지능은 자신이 직접 겪어본 경험적 스토리가 없고 자기만의 서사도 없다. 땀을 흘리지 않는 “인공지능은 기계학습을 통해 다양한 데이터를 배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도 느낄 수가 없지요”(123쪽). 몸으로 느끼는 감정의 변화가 없는 인공지능은 자기만의 서사도 없고 언어도 없다. 인공지능의 언어는 주어진 문맥에 따라 몸이 감각하는 대화와 소통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변화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내뱉는 관념적인 머리의 언어다. 100% 다른 사람의 정보를 편집하고 가공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생성해서 보여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은 통계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개체(145쪽)이자 ”일종의 통계엔진이지 세계에 대한 설명과 논리적 추론을 하지 못한다”(107쪽). 수학적 알고리듬에 따라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나 생산성은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를 정도로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기계 학습을 통해 정보를 대량 생성한다.
인공지능은 숙맥이다. 숙맥은 눈치를 보지 않는다. 자신이 던진 메시지를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이해하는지를 알아치리지 못하고 사전에 알고리듬으로 짜인 각본대로 말한다. 대화형 인공지능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대화는 발화행위가 아니다. 주어진 맥락에 따라 시시각각 반응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의도나 의미를 주어진 상황적 맥락에 따라 바꿔나가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해나가는 사람이 대화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 “너 물 먹었니?”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 의미가 목이 말라서 진짜 물을 마셨는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질문인지, 아니면 극심한 경기침체로 회사마다 구조조정을 하면서 인원은 감축할 수밖에 없어서 정리해고당했는지를 물어보는 질문인지를 인간은 알아차린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Did you drink water?”라고 번역해서 말할 뿐이다. “적확한 단어의 선택은 이전 텍스트를 적절히 이해할 때 가능(155쪽)한 까닭이다. 인간의 모든 텍스트는 콘텍스트의 산물이기에 콘텍스트가 달라지면 동일한 텍스트도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된다.
“인간은 과거의 데이터가 보여주는 압도적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언어를 새롭게 주조하는 이해”(156쪽)를 보여주면서 타성에 젖은 언어, 점성으로 달라붙은 습관적인 언어 사용 방식에서 벗어나 아직껏 사용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시시각각으로 입력되는 외부의 신호나 기호, 사건과 사고의 의미를 보다 적확한 언어로 번역하면서 어제와 다른 문장을 건축하고 의미를 찾아낸다. “기계가 과거의 축적으로 현재를 인식한다면,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로 가는 자신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잠재의 세계에 천착하는 경향”(156쪽)을 보이는 이유도 계획된 각본이나 전통적인 매뉴얼에 따르는 습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의 가능성과 능력에 안주하지 않고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욕망이 새로운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끌어당긴다. 마치 밀개와 끌개가 서로 밀고 당기면서 인공지능과 다르게 인간은 경험과 언어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면서 삶의 얼룩을 무늬로 변신시키는 부단한 수고와 정성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속도의 생태계가 읽기와 쓰기의 밀도를 잡아먹는다
“인간은 깊이의 존재라면 인공지능은 너비의 존재”(114쪽)다. 수직적 깊이를 추구하는 인간의 사유체계는 수평적 확산 측면에 비추어 보면 인공지능을 능가하기 어렵다. 인공지능은 프롬프트 명령을 받는 순간 수평적으로 데이터를 검색, 선별, 편집, 가공해서 연결성이 높은 단어와 문장을 기계적으로 학습한다. 너비의 존재인 인공지능은 읽기와 쓰기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종래의 글쓰기를 구성하는 ‘읽기→쓰기’의 방향성은 생성형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에서 ‘쓰기→읽기’로 변화”(192쪽)된다. 뭔가를 쓰려면 읽어야 된다는 전통적인 창작의 발상이 인공지능 기반 쓰기에서는 무너진다. 특정 주제와 관련된 글을 쓰려면 글감을 확보하거나 색다른 발상의 전환을 위한 다양한 관련 자료를 읽어야 하지만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에서는 프롬프트로 명령을 주면 입력된 주제와 관련해서 순식간에 글을 써서 보여준다. 그 글을 읽으면서 수정 보완 명령을 입력하는 대로 글을 대신 써주는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 방식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면 어떤 문제나 한계가 노정될까. 읽지 않고 대신 인공지능에게 글을 써달라고 명령할수록 “타인의 글을 하나하나 읽고 무엇을 배울지, 저자의 핵심의도가 무엇인지, 자신의 글에 어떻게 녹일지를 궁리하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경험과 지식·생각과 마음을 탐험”(193쪽)하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또 다른 문제는 긴 글이나 두꺼운 책을 읽고 요약하고 정리하는 능력도 인공지능에게 아웃소싱할수록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을 선별하는 판단능력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복잡한 생각의 핵심과 정수를 끄집어 나의 생각과 언어로 정리하고 구조화시키는 사고 능력도 실종될 수 있다.
“휘몰아치는 속도를 잠재우고 반짝이는 눈으로 세계와 대면하고 자신을 돌보며 위로하는 읽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199쪽). 미디어가 주도하는 삶의 속도변화를 감당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고 떠밀려 내려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가공한 정보에 휩쓸려가고, 다른 사람이 요약하고 정리한 결과물에 중독되어 나만의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침묵과 숙성의 시간을 갖기 어렵다. “심장의 울림·마음의 떨림과 텍스트를 읽는 일이 공명할 수 없을 때, 필자가 펼쳐 놓은 복잡다단한 감정의 지형과 미묘한 사건의 전개가 독자가 구획하는 좋아요/싫어요·재미있어요/지루해요의 이분법 속에서 말끔하게 삭제될 때”(199-200쪽) 삶과 교육이 중심을 잡고 만들어가는 리터러시의 진정한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속도의 생태계”가 숙고하면서 사색하는 읽기와 쓰기의 시간을 잡아먹을수록 “각각의 속도는 읽기와 쓰기의 밀도에 어떠한 영향”(201쪽)을 주는지를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생산성이나 속도가 구체적인 삶에 뿌리박고 전개되는 읽기와 쓰기의 밀도를 대체하는 심각한 위험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은 생성(becoming)없이 생성(generation)한다
“생성(becoming)없는 생성(generation)의 확산을 경계”(69쪽)하거나 “‘되기’ 없이 ‘만들기’에 골몰하는 사회·체화 없이 외화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회”(70쪽)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지 않으면 생성형 인공지능이 생산한 텍스트의 의미를 재음미하지 못하고 인공지능의 글쓰기는 글 쓰는 주체와 객체, 사고와 언어,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나 변증법적 교섭을 통한 창발적 생성(becoming)없이 기존의 방대한 빅데이터 언어 창고에서 늘 새롭게 생성(generation)할 뿐이다. “생산성은 과정을 지우고 효율성은 가치를 압도하며 텍스트 생성 ‘마법’에 대한 경탄은 읽고 쓰는 노동의 기쁨과 슬픔(23쪽)이 희석될 수 있다. 과정에 투입되는 고뇌와 몸이 구체적인 현장성과 만나 땀으로 일궈가는 신체적 과정성이 방대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텍스트를 대량 양산하는 생산성을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콘텍스트와 무관한 텍스트의 허망함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본질을 보려는 눈을 가릴 것이다. 진정한 읽기와 쓰기가 이루어지는 경험과 언어의 유기적 순환을 끊어버리고 폐쇄적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된 텍스트를 편집해서 만들어내는 또 다른 텍스트가 글쓰기의 효율성을 대변할 때 느리고 더딘 비효율적 과정을 통해 땀과 눈물에 젖은 문장건축 노동의 진정한 의미는 실종되기 시작한다.
“이미 생산되어 있는 단어들의 연쇄가 담아내지 못하는 세계를 탐색하는 일의 가치”(474쪽)를 드높이고 “데이터화되지 않았던 세계를 텍스트화하는 작업, 즉 ‘world’(세계)에서 ‘word’(언어)를 이끌어내는 일의 중요성”(474쪽)을 더욱 강조하고 실천에 옮길 때 생성형 인공지능의 ‘생성(generation)’이 갖는 치명적인 한계나 문제점을 또 다른 ‘생성(becoming)’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릴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생성은 쓰기 전에 더 좋은 텍스트를 깊이 읽으면서 낭독도 하고,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어 노골적으로 다 보여주는 정보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삶으로 앎을 평가하고, 삶에서 몸으로 겪은 경험적 깨우침을 몸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고단하고 지루한 노동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생성(generation)’의 속도가 ‘생성(becoming)’를 압도할 때 우리들의 깊이 읽기와 신체적 신뢰성이 살아 숨 쉬는 에토스가 살아 숨 쉬는 글쓰기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필요하다.
생성 속도가 이해 노동을 대체한다
“인공지능을 사용해 빠르게 글을 생성한다고 해서 해당 글의 내용을 우리가 체화”(341쪽)하지 않으면 나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텍스트로 탄생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진공관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직조되는 논리적 사고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텍스트는 텍스트 생성에 관여되는 다양한 조건과 환경을 배경으로 도구나 기술이 매개되거나 사회적 관계 맺음 속에서 몸과 마음이 주어진 콘텍스트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체화 속에서 탄생되는 마주침의 산물이다. “텍스트를 벼리는 일은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고, 타인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자, 글을 읽고 써내는 일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고민”(418쪽)하는 의미를 띠는 까닭이다. “인간의 언어학습은 경험의 총체와 연관을 맺고 진행”(118쪽)되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의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거대언어모델은 텍스트, 즉 글을 통해 언어”를 배우기 때문에 “거대언어모델이 학습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경험 즉, 시간·공간·관계·주변환경과 물건, 온도·조명·소음·음악·상대의표정·말하는 사람 간의 거리·제스처·몸의자세·이동·목소리의 질감과 크기·말의속도·키나 덩치등 대화 참여자의 신체적 특성 등을 포함하는 상호작용의 총체와는 거리”(119쪽)가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생성속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기술이 있더라도 이해를 위한 노동이 없다면 좋은 글을 탄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206쪽).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할수록 텍스트를 생성하는 속도가 빨라져도 생성하기 위한 읽기나 생성된 텍스트를 읽기의 속도를 기술로 가속화시킬 수 없다. 특히 저자가 숨겨놓은 의미의 껍질이 두꺼울수록 단숨에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곱씹어먹으면서 소화시키는 일정한 시간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주어진 텍스트는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심장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특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생성하는 인공지능의 노동 강도는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그 글의 의미와 가치는 물론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어진 데이터를 수평적으로 검색, 편집한 결과에 대해서도 윤리적 책임감도 없는 인공지능의 텍스트 생성은 과연 누구를 위한 생성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산유수의 텍스트는 분명 인간의 언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없습니다”(418쪽). 텍스트 생성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지만 텍스트에 담긴 인간적 고뇌의 밀도나 강도는 점차 줄어들고, 텍스트 생성 기술이 발전할수록 텍스트에 담기는 콘텍스트의 복잡성이나 애매성은 거세된다.
인공지능의 텍스트는 결과(생산성)가 과정(성)을 삭제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작가 되기의 조건, 즉 “작가의 형식적 정체성은 문법적 규준과 스타일적 상수들이 가진 굳건함의 밖에서만 진정으로 성립”(414쪽)한다는 말은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의 작가 되기는 결격사유가 될 수밖에 없다. 문법에 맞는 스타일과 형식을 갖춘 문장을 무한 생성하는 인공지능의 텍스트에는 가장 중요한 에토스가 빠져 있다. 에토스는 작가가 살아오면서 몸으로 겪어낸 내공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고유한 품성이나 겉으로 봐도 믿음직스러운 신뢰성을 말한다. 즉 에토스는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냉철한 판단력을 지칭하는 신언서판(身言書判)과 비슷한 맥락을 품고 있다. 에토스는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생기지 않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나 미덕을 갖춘 최고 경지의 전문성을 지칭하는 아레테(arete)를 기반으로 발휘되는 선의(eunoia)가 만드는 합작품이다. 에토스가 살아 숨 쉬는 텍스트에는 기존 텍스트를 모아 다른 텍스트로 편집하거나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나오지 않고, “쓰기를 언어와 세계를 씨줄과 날줄로 엮는 연대의 과정으로 볼 때라야 글은 삶이 되고 삶은 글”(435쪽)이 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나오는 윤리적 판단력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에토스가 살아 숨 쉬는 텍스트가 생성되려면 기존 텍스트를 재구성하거나 분해 또는 조립하는 과정보다 “날 것 그대로의 삶을 텍스트로 ‘번역’해보는 작업”(436쪽)이나 “텍스트에서 텍스트를 낳는 기호적 전환이 아니라 비-텍스트에서 텍스트로 변신하는 존재론적 변환의 경험”(436쪽)이 축적되어야 한다. 자신의 일상이 살아 숨 쉬는 텍스트의 텃밭에서 일어나는 우발적 마주침을 적확한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기존의 노동을 삭제하고 경험의 체화를 축소하는 인공지능의 사용”에 반하는 저자의 집념과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드는 텍스트가 탄생된다. “결과가 과정을 삭제하는 경향 나아가 과정을 귀히 여기는 관점을 무시하는 습속의 강화”(453-454쪽)와 ‘생산성(productivity)’에 몰두하는 결과 중심 리터러시에서 벗어나 ‘과정성(processibvity)’을 강조하는 리터러시로 거듭날 때, 조금 부족하고 틀리더라도, 조금 느리고 답답해도 자세를 낮추고 사람과 삶이 말하고 싶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고단한 아름다움의 꽃이 필 수 있다.
“생성된 텍스트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해당 텍스트와 독자,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다면 글이 우리 몸과 마음에 스미도록 하는 정성과 노동이 밴드시 필요”(341쪽)하다. 몸과 마음에 스미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는 정보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파편화된 관념의 부산물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쓰기는 단어를 하나하나 고르고 세심하게 배치하는 일”(342쪽)이라면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텍스트는 글 쓰는 주체의 고뇌에 찬 결단과 결정이 만들어가는 배치의 산물이라기보다 거대한 언어모델이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배열하는 자동화의 산물이다. 깊은 고심 끝에 단어의 배치를 순간적으로 바꾸면 생각지도 못한 의미의 연쇄가 갑자기 급습하면서 새로운 생각의 지도를 그리는 문장이 건축된다. 글 쓰는 주체가 어떤 도구나 장비의 도움을 받아 어떤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창발적 상호작용을 거듭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텍스트가 얼마든지 탄생된다. 그 텍스트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익숙한 단어의 낯선 조합으로 의미심장한 문장이 직조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연쇄가 언어적 점성과 관성을 깨뜨리고 또 다른 문장으로 건축되기도 한다.
인공지능의 텍스트는 결과(생산성)가 과정(성)을 삭제한다
지금 여기서 인공지능의 기술적 가능성과 도구적 효용성이 지향하는 생산성 담론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물론 한 개인의 독립적 역량으로 바라봤던 전통적인 리터러시 개념을 재개념화 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critical meta-literacy)를 제안한다. 전통적인 리터러시 관점의 관행적 사유를 되돌아보고, 속도의 생태계에 매몰되어 결과가 과정을 대체하는 생산성 담론을 비판적으로 탐색하며, 앎과 삶이 분리되어 따로 노는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 삶으로 앎을 생성하고, 살기와 읽기와 쓰기가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는 생태학적 리터러시로 나아가자는 주장이 바로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한 개인의 독립적 노고의 산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공동으로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인공지능이 품고 있는 방대한 데이터는 수많은 개인과 조직이 오랫동안 축적한 수고의 대가로 누리는 기술적 산물이자 다른 사람의 데이터를 일방적으로 탈취하여 독점 제품화시킨 자본화된 지식의 축적이다. 인공지능이 발휘하는 기술적 탁월성에 감탄한 나머지 인공지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태학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발전하는 기술적 정교함에 인간은 언제나 압도당하기 일쑤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광물과 에너지를 재료로 다종다양한 노동을 투입하여 만든 노동지능이며, 그런 노동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정성·궁리와 피땀·때로는 차별과 착취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식”(403-404쪽)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가 활성화될 때 리터러시를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다양한 조직과 자원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적 역량이자 관계적 행위로 재개념화 시킬 수 있으며, 개별적 경쟁력을 표준화된 점수로 측정하고 평가하는 인간 중심적 담론에서 벗어나 윤리적이고 생태학적인 성찰을 기반으로 다양성을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비인간도 포함되는 행위자 네트워크 개념으로 재정립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는 “우리 몸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다른 몸과 동식물 그리고 대지와 바다를 어떻게 대하는가·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로 증명”(498쪽)된다.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는 기술발전의 속도와 능률복음이 전하는 달콤한 미래의 손짓에 몸을 맡기지 않고, 인공지능 기술이 매개하는 구체적인 일상적 삶의 방식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읽기와 쓰기의 본령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 역사적 경각심의 발현이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려는 자본의 유혹적 메시지가 담고 있는 권력의 원형을 비판적으로 조명해 보고, 지금 여기서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변화 양상의 근본적인 동인을 파헤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일상의 작은 변화에 주목하며, 몸으로 읽고 쓰며 나누는 생명의 연대망을 구축하자는 제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