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지 않는 인공지능 앞에서 되돌아보는 인간지성의 마지막 희망찬가
머뭇거리지 않는 인공지능 앞에서 머뭇거리는 까닭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인공지능 앞에서 되돌아보는 인간지성의 마지막 희망찬가
머뭇거리고 멈춰 서서 생각해야 의미가 잉태된다. 끊임없이 흐르는 정보 더미 속에서는 뭔가를 끝맺기란 쉽지 않다.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방향을 점검하고, 흐르는 의미를 붙잡고 새로운 가능성과의 접목을 시도해야 끝맺음이 생기고 이전에 없었던 삶의 매듭들이 우여곡절을 품고 뭠춰선다. 디지털과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데이터 홍수가 예고도 없이 일상을 집어삼켜도 무엇이 떠내려갔고 어디로 휩쓸려 가고 있는지 조차 모른 채 더 많은 정보의 신세계로 손가락의 자유를 즐기며 끊임없이 어디론가 이동한다. 어딘가에 늘 바쁘게 들르지만 거기 거주하거나 머무르며 고요와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지 않는다. 대화의 친구는 언제나 접속된 정보가 주는 자극이다. 자극이 강렬할수록 무의식적 반응도 빈번하게 일어나며, 그 와중에도 혼미한 정신을 주워 담으며 다른 사이트로 이동하려는 본능은 이미 기능적 수준을 능가한 상태다. 시키지 않아도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켜고 관성이 이끄는 곳으로 다가가 접속을 시작한다. 접속이 잦아질수록 보다 많은 정보에 접목되지만 이질적 정보와의 창조적 접목을 통한 새로운 지식의 창조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수평적 넓이에 무너진 수직적 깊이의 안타까움
그렇게 많은 정보에 접속하고 궁금해서 물어보면서도 현대인들은 순식간에 대답해 주는 챗 GPT를 비롯 생성형 인공지능의 반응을 깊이 있게 성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또 다른 정보를 보면서 그것이 전해주는 찰나적 의미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출근하고 퇴근한다. 찰나의 순간에 머물렀다 바로 사라지는 정보의 뒤안길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정보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낸 채 손가락의 자유를 유혹한다. 지금 당장 클릭해서 맛을 보라고. AI가 순식간에 전해주는 인간의 물음에 대한 답변 역시 인간의 고뇌와 머뭇거림 속에서 잉태된 의미의 밀도가 잠겨 있지 않다. 정보와 정보가 부단한 접속사로 연결되어 끝맺음 없이 무차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런 정보를 단속적으로 체험하면서 더 자극적인 정보를 찾아 디지털 삼만리를 달리며 검색하며 사색(思索) 하지 않고 사색(死色)이 된다. 일정한 물리적 장소(place)에 거주하지 못하고 사이버 공간(space)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신체적 접촉감을 잃은 지 오래다. 자기 신체가 구체적인 삶의 터전에서 겪어보는 경험적 깨달음이 연속적으로 이어질 때, 내 삶의 고뇌의 깊이가 스며드는 나만의 서사를 창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간다.
《심리정치》를 쓴 재독 철학자 한병철에 따르면 본래 ‘지능’은 ‘사이에서 고르기(inter-legere’를 의미한다고 한다. 지능은 언제나 시스템 내에 저장된 수많은 데이터와 데이터 사이에서 가능한 무한한 선택지를 시스템 내부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즐기며 고를 수 있을 뿐이다. 지능은 시스템 내재적 논리를 따라 다양한 경우의 수를 동원하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지능에게 스스로 외부를 향하는 자유는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결국 인공지능도 인간이 외부적 자원이나 재료를 새롭게 입력해주지 않는 이상 완전히 다른 발상을 통해서 생성할 수 없다. 기존의 시스템 내부자원을 활용한 생성일 뿐 시시각각 부각되는 완전히 새로운 자원과의 창발적 상호작용을 통해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지능은 수평적 확산을 통해 인식의 넓이를 추구하지만 지성은 수직적 심화를 통해 인식의 깊이를 심화시킨다. 전혀 엉뚱한 생각의 근원은 수평적 확산보다 수직적 깊이에서 나온다. 지성은 지능처럼 ‘사이에서 고르기’를 멈추고 사이를 탈출하여 전혀 다른 차이를 생성하는 이단의 선택지를 향해 몸을 던진다. 시스템 내재적 자유의 한계를 뛰어넘어 낯선 외부와의 전혀 다른 접속을 통해 우뚝 솟아오르는 차원이 다른 생각을 잉태해야 참을 수 없는 수평적 확산을 막고 견디기 어려운 수직적 심화를 통해 깊게 뿌리박은 사유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냄새만 풍기는 노골적인 정보, 향기를 퍼뜨리는 암시적 이야기
인공지능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사람도 사람이 원하는 답을 찾는 인공지능도 조급하고 부산하며 불안하다. 고요함이 머무를 시간도 공간도 없다. 사람도 정보도 여기서 저기로 건너뛰고 훑고 지나가며 뭔가에 홀린 듯 황급하게 쫓기듯 쫒으며 안절부절못하지 못한다. 머뭇거리며 의미의 깊이를 생각해 볼 여유가 없으니 유유자적하며 생각의 흔적을 남길 수도 없다. 의미를 찾아보고 의미가 생겨야 의미심장해지고, 그 의미의 중력이 무거울수록 깊이 파고들어 수평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정보 더미에서 벗어나 수직적 깊이를 추구하며 우뚝 솟아오를 수 있다.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삶, 뭐든지 황급히 맛만 보고 건너뛰는 즉흥적인 삶에 길고 느리며 여유로운 고요와 고독을 붙잡고 고뇌한 인간도 시간도 공간도 없다. 뭐든지 짧게 스쳐 지나가며 질주하는 단속적인 삶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질색(窒塞)만 부를 뿐 어제의 경험적 깨달음이 오늘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지속성은 아예 발 디딜 틈조차 찾지 못한다. 온갖 정보가 유혹하는 ‘냄새’만 스쳐 지나가며 진동할 뿐 은은하면서도 은근하게 스며드는 ‘향기’는 없다. 답을 찾는 사람도 답을 찾아주는 인공지능도 즉각적인 섬광처럼 신속하게 대응할 뿐 즉흥적으로 임기응변력을 발휘하여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하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할 수 없다. 사색이나 사유는 즉각적인 섬광에서 나오지 않고 머뭇거리며 뒤척이다 발생하는 진한 여운에서 감돈다.
어둡게 가려져 베일에 싸인 부분을 알고 싶은 호기심과 더불어 지적 모험을 전개하는 와중에 공부가 되고 깨달음의 변주가 시작된다.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고 거리를 유지한 채 아니 뒷걸음질하면서 그 신비에 싸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적이 있는가? 그 아름다움의 정체는 언제나 거리를 유지한 채 신비한 베일에 쌓여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디지털과 AI가 제공하는 정보의 바다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노출되어 있고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거리가 유지되지 않는다. 묻는 즉시 머뭇거리지 않고 답변을 제공하는 편리한 정답의 텃밭에서 정해진 로드맵을 따라 사육으로 길러지는 가축처럼 준비된 디지털 사료를 무의식적으로 취식하면서 인공지능이 원하는 인간지능이 체계적으로 양육당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 모르는 부분, 불확실한 영역, 미지의 세계가 베일에 가려져 있고, 그곳에 이르면 뭔가 새로운 깨달음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라는 암시적인 서사가 없어지고 있다. 적나라한 정보가 노골적으로 자기 몸을 보여주며 지나가는 행인에게 끊임없이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정답을 지금 즉시 다 보여주지 않으면 불편하고 불안하다. 기다리고 머물러 숙성시킬 시간이 없다. 다음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해야 되기 때문이다.
사유는 머뭇거리며 더디 돌아가는 우회축적에서 생기는 기적
당신은 ‘주택(house)’에서 ‘사료(feed)’를 드시나요, ‘집(home)’에서 ‘식사(food)’를 하시나요? 오늘의 주택은 영육이 공감되는 거주의 장소place)가 아니라 그저 잠시 머무르다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공간(space)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주를 거듭하는 ‘주택의 나’는 내가 주택을 소유한 게 아니라 주택이 나를 소유한 역전현상이 일어나며 단순한 입주자에 지나지 않지만, 장소에 머물며 영육을 충전하는 나의 집에서 살아가는 거주자는 내가 집을 소유하는 수준을 향유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니 몸과 마음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식사를 하지 못하고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억지로 입에 집어넣는 끼니인 동물적 사료를 먹고 있다. 음식만 사료가 아니라 매일 접속으로 연결되는 정보도 일종의 디지털화된 고기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온하고 고요함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음식을 나눠 먹을 때, 시간은 멈춰 서서 공간 속에 거주한다. 그때 의미는 흘러가지 않고 한 장소에 머물며 공감과 공명을 일으키는 서사가 탄생된다. 그 서사 속에는 같은 시공간을 나무며 거주했던 사람들의 집단적 의식이 공명을 일으키며 녹아들어 가 있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공통된 의식이 스며들어있다. 이야기가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진정한 사유는 언제나 곡선의 물음표를 먹고 산다. 개미가 먹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무한궤도의 곡선상에서 방황을 거듭하다 먹이를 발견하는 순간 직선의 느낌표를 품고 짧게 달려간다. 곡선의 길이가 길어야 직선의 느낌표가 품는 감동의 강도가 더 높아진다. 하지만 현대인은 곡선의 사유 속에서 머무르며 어제와 다른 사유를 잉태하지 못한다. 직선으로 날아오는 노골적인 정보는 이해타산을 따지며 바로 계산을 시작한다.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에서 “에로스가 없으면, 사유의 걸음은 계산의 걸음으로, 바꿔 말해 노동의 걸음으로 전락한다. 계산은 벌거벗었다. 계산은 포르노적이다”(108쪽)라고 말한다. 정보는 노골적으로 계산하고 이해타산을 따지지만 서사는 에로틱하고 암시적이다. 정보는 의미의 껍질이 다 벗겨져서 더 이상 사유할 수 있는 거리가 없어서 너무 가까이서 충동적 자극만 제공해 줄 뿐이다. 하지만 나만의 서사는 의미가 두꺼운 껍질 안에 감싸 안겨 있어서 멈춰 서서 그것의 의미가 탄생된 사연과 배경을 그런 의미가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맥락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야기나 서사가 걸어가는 발길을 멈춰 서서 사유하는 기반이 되는 까닭이다. 사유는 머뭇거리며 더디 돌아가는 우회축적에서 생기는 기적이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일직선상의 직선주로에서는 오로지 지능이 이해타산을 따지며 잔머리를 쓸 뿐, 깊은 사색의 여정으로 빠지지 않는다.
소유할수록 소진당하는 정보, 소유할수록 향유할 수 있는 이야기
“정보는 그것이 새로웠던 순간이 지나면 그 가치가 소진된다. 정보는 그 순간에만 살아있고 그 순간에 자신의 전체를 내맡겨야 하며 한시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야기의 경우는 다르다. 이야기는 소진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자신의 힘을 모아서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428쪽). 발터 벤야민의 《서사·기억·비평의 자리》에 나오는 말이다. 소진되는 정보를 보면서 소진되는 현대인들은 고요함을 잃어버렸고 고독하지 않고 어딘가에 무한히 접속되어 있어도 언제나 외롭다. 소진될수록 사람들은 더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운 사람이 매일 먹는 음식이 데이터 고기다. 디지털 감옥에서 매일 먹는 데이터 고기에 사육당하는 디지털 원주민은 자신도 모르게 지금 살아가는 삶의 터전에 거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공간으로 이주한다. 거주하면 지루하고 이주하면 순간은 자유롭다. 하지만 순간의 자유를 만끽하고 도취될수록 다른 사람의 정보가 품은 유혹의 손길에서 속박당한다. 정보를 소유할수록 소진당하지만 이야기나 서사를 소유할수록 삶은 진한 여운과 잔향이 남으며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정진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왜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답을 양산하는 것일까? 뭔가를 물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즉시 답을 주지 않으면 머뭇거리면 기다리거나 참지 못하고 다른 질문을 던진다. 하나의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 답에 담기는 의미와 의도가 무엇인지를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가운데 더 좋은 해답을 찾아보려는 인간적 고뇌가 뒤따라야 한다. 질문은 질문하는 한 사람의 정답이 찾아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그 질문이 품고 있는 시대역사적 문제의식을 같이 물어보는 탐문이자 이제껏 열어보지 못한 창문을 함께 찾아보자는 요청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질 때 탄생되는 경이로운 사유
인간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와 더불어 기술이 발전할수록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차 많아지면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수록 인간은 좌절하고 절망한다. 회복할 기미나 능력도 없어지기 시작한다.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인다. 너무 오랫동안 몸을 쓰면서 신체성을 단련하지 않으니 인간의 정체성마저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인공지능과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그 답의 신속성과 경이로움에 감탄하는 나머지 내 몸을 움직여 직접 겪어보는 가운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뭔가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는 안간힘을 쓰지 않는다. 이제 신체는 특정한 맥락을 기반으로 사유하지 못하는 탈맥락성과 탈신체성으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탄 기분이다. 느리게 반추하며 때로는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더딤, 더듬거리는 부족함이나 미완성의 미덕 속에 피우는 꽃이 진한 향기를 띠고 오랫동안 멀리 잔향으로 퍼진다. 망설이며 기다리고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거친 사유는 단련이 되며 부단한 다림질을 통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의연하게 맞서는 용기가 발현되는 것이다.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원하는 정답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더 빨리 원하는 걸 질문으로 만들어 인공지능에게 물어볼 것이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생각으로 전환하기 위해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지 않고 더 많은 정보를 찾아 더 빨리 다른 공간으로 움직이며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 정보와의 접속을 즐길 것이다. 손가락 접촉으로 다가오는 촉각의 광란에 도취되어 거리감 없이 바로 눈앞에서 내가 원하는 정답을 찾아내는 신세계에 물들며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시각을 잃어버리고 있다. ‘촉각’이 손가락의 자유로 광분의 도가니탕을 내 마음대로 즐길 수 있게 해 주지만 신체가 뭔가에 접촉하며 느끼는 ‘촉감’은 상실되고 사물을 먼 거리에서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은 물론 시야 자체가 한없이 좁아지고 일정한 틀에 갇혀 다르게 생각하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자극보다 손가락으로 느끼는 촉각에 의존해서 거리 감 없이 무한대로 나에게 급습하는 정보에 휘말리면서 거리를 두고 뭔가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만사의 위대함에 놀랄만한 여유가 없어진다.
지혜는 인내와 기다림을 먹고 자라는 늦둥이
“미는 망설이는 자이며 늦둥이다. 미는 순간적인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유한 빛이다”(110쪽).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에 나오는 말이다.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경이로운 아름다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그 미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스며드는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다. 미는 즉각적인 자극과 흥분을 동반하는 느닷없는 침입으로 생기지 않는다. 쏜살같이 달려가서 과녁에 꽂혔지만, 진정한 미는 과녁을 향해 매진하는 화살들의 분투노력과 과정에서 보여주는 치열함이다. 아름다움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 위장막 사이로 스며들어 드러나는 신비한 느낌으로 결정된다. 갑자기 이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정말 세상에 없는 새로운 인식을 무한 생성하고 있는 것일까? 인공지능이 산출하는 경이로운 산물에도 불구하고 경외심은 왜 생기지 않는 것일까? 손가락 끝의 자유로운 유영(遊泳)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검색해서 찾아내는 정보에 휩쓸리는 디지털 원주민은 왜 자유롭게 자유형으로 정보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진정한 사유는 사건이 만드는 사연의 산물이어야 하는데 사건이 없어지니 저마다의 고유한 사연도 같이 없어지는 반면에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정보에 사고는 종속당할 뿐이다. 정보가 디지털화될수록 물리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함께 일정한 공간 안에 거주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거나 바라보며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어딘가로 떠내려간다.
컴퓨터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계산을 잘 해내고 복잡한 문제도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정답을 찾아낸다. 계산과 연산, 추론과 요약능력은 이미 인간지능을 초월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지성은 안절부절못하며 조급해하거나 황급히 어디론가 이동하는 속도와 지능적인 계산 속에서 발아되지 않는다. 지혜는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불확실성 앞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어제와 다른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판단착오를 줄이려는 애쓰기, 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을 먹고 자란다. 논리적 흐름을 이탈하고 지금 여기를 탈주하면서 이전과 다른 낯선 배치를 겪어보면서 생기는 마주침이 그윽한 향기를 품은 깨우침으로 솟아오른다. 지금 당장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지만 이전과 다른 시도와 탐색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전경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배경에 비추어 헤아려보고 주변 맥락을 함께 살펴보면서 가끔은 뒷걸음질 치는 일보후퇴 속에서 어제와 다른 시야가 확보될 때 시선이 달라지고 시각도 바뀌면서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가 탄생될 수 있다. 지식으로 지시하는 인공지능을 능가해서 지혜로 지휘하는 인간지성의 탄생은 느긋한 멈춤과 머뭇거림 속에서 사유가 깊어지는 가운데 비로소 발아되는 그윽한 향기가 남기는 부산물이다. 촉급함보다 느긋함, 조급함보다 여유로움, 신속한 이동과 질주보다 수줍은 머뭇거림과 멈춰 섬, 직선주로에서 달리는 속도보다 곡선적 우회로에서 생기는 밀도감과 뒤늦은 뒷걸음질, 노골적인 드러냄보다 암시적 신비와 베일에 쌓임 속에서 지능을 능가하는 지성, 지식을 뛰어넘는 지혜의 향기가 우리들의 앞날을 밝게 비추는 서광으로 다가올 것이다.
고난이 깊어질수록 개발되는 고난이도 예술
인공지능이 던져주는 답안의 신기함에 굴복당한 나머지 인공지능의 저변을 움직이는 논리적 계산과 연산기능만도 못한 인간지능으로 전락하기 전에 주어진 대상이나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며 관계없는 것을 관계있는 것으로 밝혀내는 구조적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인공지능이 배달해 주는 자료나 정보 꾸러미를 받아먹다 알고리듬만도 못한 논리기계로 전락할 수 있다. 친구가 결혼을 하거나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는 희로애락의 순간에도 인공지능에게 축하편지나 애도사를 써달라고 부탁, 순식간에 써다 주는 축하문이나 애도사에 감탄을 넘어 경탄에 마지않는 습관에 길들여질수록 오랫동안 친구와 살아오면서 겪은 인간적 느낌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는 인문학적 사유는 천박해지고 결국 인공지능 없이는 어떤 글도 스스로 쓰지 못하는 인간작문 기계로 전락할 수 있다. 쉽고 빠른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 위에서는 사유가 작동하지 않고 논리적 오류나 함정에서 벗어나는 계산과 연산만 관여된다. 지능은 계산하고 연산을 통해 정답을 찾아주지만 머뭇거리고 뒷걸음질 치며 멈춰서는 가운데 다른 대안을 깊이 사색해 보는 우회도로에서 잉태되는 지성을 능가하지 못한다. 단속적으로 끊어지며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접속과 손가락 접촉만으로는 아득하고 아늑한 느낌을 품고 있는 인공지성은 탄생되지 않는다. 지성으로 창조되는 지혜는 꾸준함과 집요함 속에서 물고 늘어지는 인내와 기다림을 먹으며 어제의 경험과 연결되면서 지속적인 깨달음의 향연이 연속될 때 탄생되는 대체불가능한 신체적 느낌의 산물이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인공지능이 알려준다고 해도 시시각각 바뀌는 날씨와 기상조건, 그리고 산세와 등반가들의 정신적이고 신체적 상태에 따라 등반지도는 언제나 다르다. 쉽고 빠른 길이나 매뉴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어렵고 험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고행을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을 쓴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언어의 에베레스트’라고 비유한다. 헬리콥터 타고 쉽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사람은 위험함을 무릅쓰고 악전고투 끝에 에베레스트 정산 등반에 성공한 사람의 경험적 깨달음의 차이는 설명을 거부할 정도로 신체적 각성의 강도가 다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좋은 등반 처방전을 주어도 결국 인간적 노력과 경험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언어의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고통이 따르지 않으면 언어가 우리를 버리고 타성에 젖은 언어로 천박한 사유체계를 어제와 비슷하거나 동일게 증축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좋은 번역 안을 던져주어도 어떤 단어를 어떤 맥락에서 써야 독자는 물론 문맥에 등장하는 화자들의 관심과 의도를 적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지를 고뇌하는 머뭇거림과 간절한 바람은 인공지능의 번역 안에 들어있지 않다. “물 먹었니?”를 “Did you drink?”로 바로 번역하는 인공지능은 “너 조직에서 잘렸니?”로 번역되는 고맥락 언어의 중의적이고 맥락적인 의미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번역하는 맥락적 사유가 없다.
손가락 접촉으로 얻어낸 정답은 신체적 접촉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현장에서는 하나의 가상현실일 뿐 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무리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 원하는 정답을 얻어냈어도 특수한 상황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모범답안일뿐, 단독적이고 고유한 상황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일리 있는 의견과 주장일 뿐이다. 지름길로 알려준 처방전을 언제 어디서 적용하는지에 따라 일리 있는 해답이 될 수도 있고 무리가 따르는 오답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신체성이 구체성과 만나 이루어지는 느낌과 감각적 각성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각인되지 않는 지혜다. 지혜는 지능으로 계산해서 생기는 산물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도전하고 시도하면서 자기 숨결을 느끼는 사색적 머뭇거림 속에서 비로소 탄생되는 부산물이다. 갑자기 나타난 빙벽이나 바위산 앞에서 악전고투 끝에 산에 오르는 고난이 깊어질수록 고난이롤로그: 머뭇거리지 않는 인공지능 앞에서 머뭇거리는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