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으로 지시하지 말고 지혜로 지휘하라!
인공지능(지식)을 능가하는 인간 지성(지혜):
지식으로 지시하지 말고 지혜로 지휘하라!
인간지능이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하기 시작한다. 인간에게는 복잡한 기능을 인공지능은 아주 쉽게 처리하지만 인간에게 쉬운 과제를 인공지능은 애를 먹으며 진땀을 흘린다. 인간의 지능으로 축적한 지식을 인공지능은 잠도 안 자고 빠른 속도로 학습해서 잊어먹지도 않는다. 지식에 대한 정의와 개념은 학자마다 다르겠지만 정보에 인간의 체험적 통찰력을 추가하면 지식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식마저 인공지능이 딥러닝을 통해서 인간을 위협할 정도로 습득한다. 기계적으로 학습하면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을 능가할 수 없다. 인공지능이 쉽게 넘볼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지능을 넘어 지성, 지식을 넘어 지혜로 가는 길에서 그 능력개발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지식은 가르칠 수 있지만 지혜는 언어를 매개로 가르칠 수 없다 데에 있다. 지혜는 오로지 당사자가 다양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온몸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체득된다. 지식은 의도적인 학습을 통해서 창조되고 지혜는 삶의 다양한 사건과 사고의 우발적 마주침이나 각성 체험에서 생긴다(Knowledge comes from learning, Wisdom comes from living.- Anthony Douglas Williams)
사람마다 저마다의 삶의 궤적에 따라 피할 수 없이 사건과 사고를 만난다. 사건은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고 사고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당한 일이다. 사건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숨어 있고 사고(事故)를 당하면 사고(思考)가 바뀌기도 한다. 지혜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사건 속의 사연을 해석하고 우연히 당한 사고를 수습하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책상에 앉아서 생각만 해본 사람보다 온몸으로 겪으면서 많이 당해본 사람이 체험적 지혜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딜레마 상황에 직면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지금 당장 의사결정을 해서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지식은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혜는 위급한 상황이나 한 번도 마주쳐보지 못한 회색지대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책상에서 머리로 공부해서 습득한 지식이 격전의 삶의 현장에서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교과서적 지식은 많지만 결단의 순간에 지금 당장 어떤 의사결정을 해야 되는지를 모르는 책상 똑똑이(book smart)가 많은 이유다. 세상은 책상과 다르다. 일상은 책상과 다르게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부단히 창발 해내는 혼돈스럽고 불안정한 상황이다. 지혜는 창백한 책상에서 책을 읽고 머리로 생각하면서 부단히 숙고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지혜는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격전의 현장에서 무수한 시도 끝에 가뭄의 단비처럼 온몸으로 각인되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지식과 지혜는 어떻게 다른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알아보자. 우선 지하철에서의 자리 잡기를 예를 들어 알아보자. 지하철을 타자마자 사람들은 빈자리가 있나 없나 확인해보고 빈자리가 없으면 바로 금방 내릴 것 같은 느낌이 오는 사람 앞에 서 있는다. 금방 내릴지 안 내릴지는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금방 내릴 거 같은 사람은 가방을 갑자기 챙긴다는지, 노선도를 자꾸 확인한다든지, 아니면 뭔가 행동거지 표정이 불안한 사람이다. 이처럼 아무런 의미 없이 산만하게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자료라고 한다. 이런 자료를 일정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을 갖고 체계화시키거나 구조화시키면 정보가 된다. 이런 정보를 갖고 생각해보니까 어떤 사람이 금방 내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 사람 앞에서 서 있었다. 예측대로 이 사람은 다음 역에 내렸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리고 내가 앉으려고 하는 순간 예기치 못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해서 자리 잡기에 실패했다. 빈자리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잽싸게 자리를 옮기고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를 자신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실패 체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갖고 있는 정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이다. 기존 정보에 나의 깨달음이 추가되면 지식이 된다. 이런 지식이 축적되면서 다양한 지식 간 놀라운 융합이 일어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감적 통찰력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지혜다. 지혜로 발전하면 이제 들어오는 지하철 소리만 들어봐도 몇 번째 칸에 빈자리가 많을 거 같다는 예언력도 생긴다. 법정 스님에 따르면 지식은 밖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밖으로 생긴다고 한다. 지혜는 지식이 단순히 축적된다고 생기지 않는다. 지혜는 내가 보유한 지식으로 다양한 실험과 모색,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체험적 깨달음이 축적되는 가운데 생긴다
두 번째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을 직업 중에서 원으로 끝나는 직업과 가로 끝나는 직업의 차이점을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상담원, 판매원, 안내원, 승무원, 은행원, 교환원, 취재원. 집배원처럼 ‘원(員)’으로 직업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이에 반해 평론가, 정치가, 사상가, 연출가, 비평가, 작곡가, 예술가, 조각가, 건축가, 문학가, 미식가, 탐험가, 수필가, 여행가, 저술가, 창작가처럼 ‘가(家)’로 끝나는 직업은 어떤 차별화된 특징을 갖고 있을까? 원으로 끝나는 직업은 남의 집으로 출근하는 사람이다. 이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은 주로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일원(一員)이 된 사람이다. 일원이 된 사람들의 직업적 특성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이다. 물론 직업에 따라 다양한 딜레마 상황에 직면하면서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원이 된 사람들의 전문성은 주로 지식과 경험이 축적돼서 생긴 산물이다. 이들은 주로 반복해서 하는 일이 많다. 그렇다 보니 이들 세계에서는 매뉴얼이 소중한 업무지침이자 기반이다. 이에 반해 ‘가(家)’로 끝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집이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주로 남의 집으로 출근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자기 마음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가로 끝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독창적 노하우나 체험적 지혜를 지니고 있다. 원으로 끝나는 직업에 비해 창의적인 사고력이 요구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하는 특유의 스타일이나 칼라를 지니고 있다.
지식과 지혜를 구분하는 실례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네 가지 눈에 비추어 설명하면 쉽에 이해될 수 있다. 이외수 작가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에 보면 사람에게는 네 가지 눈이 있다고 한다. 육안(肉眼)과 뇌안(腦案), 그리고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이다. 육안은 자료, 뇌안은 정보, 심안은 지식, 영안은 지혜를 보는 눈이다. 첫째 ‘육안’은 물리적으로 얼굴에 붙어 있는 눈이다. 육안은 사물의 물리적 특성을 보는 눈이다. ‘육안’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 사물의 물리적 특성을 보는 눈이라면 ‘뇌안’은 사물의 과학적 특성을 분석하는 눈이다. 콩을 보면서 콩이 까맣거나 동그랗다고 보는 눈은 ‘육안’이지만 콩의 종류별 영양성분이 달라서 각각 다른 요리 재료로 사용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눈은 '뇌안‘이다. 햄버거를 보면 침이 나오는 것은 육안이 작용한 것이고 햄버거를 먹으면 살이 찐다고 생각하는 눈은 뇌안이다. 햄버거의 영양성분을 과학적 분석한 결과 햄버거에는 지방이 많아서 살이 찐다고 생각하는 눈은 뇌안이 작동한 결과다. 이처럼 사물의 속성이나 특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눈이 바로 ’뇌안‘이다. 여기서 말하는 육안은 세상에 널려 있는 자료를 보는 눈이고 뇌안은 자료를 조합, 과학적으로 체계화시켜 정보를 만드는 눈이다. ‘육안’과 ‘뇌안’은 누구나 갖고 있다. ‘육안’과 ‘뇌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삶이 무미건조하다. 무엇이든지 보이는 대로만 보고 논리적으로 분석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다.
똑같은 ‘육안’과 ‘뇌안’을 갖고 있지만 남 다른 성취를 만들어내는 남 다른 사람들은 남이 갖고 있지 않는 ‘심안‘을 갖고 있다. 과학적 분석으로 포착되지 않는 깨달음을 보는 눈은 ‘심안’에서 비롯된다. ‘심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햄버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심안’은 겉으로 보이는 피상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이다. ‘심안’은 한마디로 사물을 머리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눈이다. 똑같은 물질적 피상을 보고도 거기서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시적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하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삼라만상의 미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모든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이 하나의 시요 문학적 재료다. 심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람과 사물을 바라볼 때 깊은 관심과 뜨거운 애정으로 본다. 햄버거를 먹을 때 겉으로 드러난 영양성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햄버거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시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햄버거에 담긴 소의 아픔을 읽고 햄버거를 생산하는 패스트 후드의 역기능적 폐해를 읽어내는 눈이다. 심안은 단순히 제시된 정보만 보지 않고 정보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보이지 않는 이면을 캐묻는 가운데 탄생하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눈이다.
남다른 문제의식은 물리적 특성을 보는 ‘육안’,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뇌안’과 시적 상상력을 떠올리는 ‘심안’을 넘어 ‘영안’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나온다. ‘영안’은 일상의 작은 사물이나 현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질서와 체계를 읽어내는 눈이다. 작은 사물 및 실체가 다른 전체와 맺고 있는 구조적 관계를 꿰뚫어 읽어 내거나,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는 ‘혜안’(慧眼)이다. ‘영안’은 부분 속에서 전체를 읽어내는 직관적 통찰력과 지혜의 눈이다. '햄버거 커넥션(Hamburger Connection)'이라는 말이 있다. '햄버거 커넥션'이란 햄버거의 재료가 되는 소고기를 얻기 위해 조성되는 목장이 열대림 파괴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햄버거용 소고기 100g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물 2,000리터가 필요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점점 더 빨리 소비되는 햄버거용 소고기를 대량 양산하기 위해 숲을 태우고 목초지를 만들면서 숲이 그만큼 빨리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이후 중앙아메리카 숲의 25% 이상이 소를 키우기 위한 목초지 조성을 위해 벌채되었다고 한다. 햄버거 커넥션이란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가 먹는 햄버거 하나에도 이렇게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햄버거를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소화시키면서 소가 내뿜는 가스와 더 빨리 파괴되는 숲으로 인하여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을 아는 눈이 바로 ‘영안’이다. 지혜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의 구조적 관계를 꿰뚫어 보는 데 필요한 깨달음의 산물이다.
지식과 지혜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실천적 지혜에 비추어 생각하면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일찍이 아리스토델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전문가가 갖추어야 될 최고의 덕목으로 프로네시스(phronesis), 즉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를 꼽았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도 그의 저서 《덕의 상실(After Virture)》에서 전문가가 되는 최고의 덕목은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매킨타이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제시되어 있는 실천적 지혜의 핵심 주장을 그대로 전승하면서 미덕과 탁월성을 동시에 지닌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조건을 규명하고자 했다.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실천은 그 활동에 내적인 가치가 들어 있으며, 탁월성의 기준을 포함하고 있는 활동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여름날 호숫가에 앉아 무심코 돌을 던지는 행위는 실천이 아니다. 돌을 던지는 행위는 내적인 가치 또는 자체에 내재하는 가치 있음이 들어 있지 않으며 탁월성을 갖추기 위한 분투노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투수가 전심전력해서 공을 던지는 행위는 당연히 실천이다. 왜냐하면 투수가 공을 던지는 행위는 탁월함을 추구하면서 그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실천은 각각의 행위에 맞는 목적을 세우고 추구한다는 뜻이다. 환자의 아픔을 해소시켜주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료행위의 목적이지만 명성과 부를 추구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실천이 실천의 목적을 상실하고 다른 목적을 위한 실천이 반복될 때 덕을 상실하고 부차적인 목적을 위해 실천을 감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사가 명예와 부, 지위와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실천을 계속한다면 의료행위의 본질적인 목적을 상실하고 의료행위의 본질과 거리가 먼 외부 목표 달성에 혈안이 된 실천이다. 이들이 아무리 훌륭한 성과를 낸다고 해도 이들은 실천가가 아니라는 것이 매킨타이어의 주장의 핵심이다.
실천적 지혜는 단순한 사실관계나 법률과 규칙이나 원칙, 직무기술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 갈등하는 몇 가지 선의의 목표를 조율하거나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와 규율만 고수하는 전문가가 많을수록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의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나온다. 레모네이드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가게에 하나밖에 없는 마이크스 하드 레모네이드(Mike's Hard Lemonade)를 무의식적으로 사주었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 레모네이드가 알코올 도수 5도인 제품인 줄도 모르고 레모네이드라는 글씨만 믿고 아들에게 사준 것이다. 때마침 경비원이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던 아들을 발견하고 경찰에게 신고한 것이다. 경찰은 구급차를 불러 급히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지만 아들에게 아무런 알코올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의사들은 아들을 퇴원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아들을 아동 보호소의 위탁 가정에 맡겼다. 경찰은 원하지 않았지만 절차에 따라야 했다. 3일 동안 보호소에 머문 아들은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아버지는 집을 떠나 2주 동안 호텔에 투숙해야 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판사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주정부의 법률적 절차에 따라야 했다. 2주가 지나서야 가족은 다시 만났다. 한 마디로 판사는 이 딜레마 상황이 지니고 있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오던 판례대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즉 판사는 기존 지식이 지시하는 대로 판단을 내리고 판결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판결이 최상의 판단일까?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통해 주어진 상황을 성찰해보자. 레몬에이드를 판매한 직원은 알코올을 함유하고 있는 레몬에이드를 아들이 마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판매했을까? 과연 아버지는 알코올 도수 5도인지를 알고 아들에게 주었을까? 아들은 알코올이 포함된 레몬에이드를 알고 마셨을까? 판사는 판례대로 판결을 내리기 전에 이런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가운데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해서 판단을 내렸어야 했다. 알코올이 든 음료수인 줄 모르고 아들에게 건넨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음료수를 정기적으로 주거나 아이가 알코올을 남용해도 눈감는 아버지와 동일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상황적 특수성이 지니고 있는 미묘한 갈등 국면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관례대로 규율과 절차에 따라 법집행을 감행한 판사는 기존 지식에 근거해서 판단한 것이다. 원칙은 소중하지만 판단이 실종된 원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규율이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원칙은 또 다른 원칙과 갈등하지만 조율되어야 한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려면 공감과 거리감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겪고 있는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다른 이의 관점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도 주어진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없다. 공감하는 의사는 미묘한 감정적 실마리를 알아채는 통찰력과 상상력이 있으며, 말로 표현하지 않는 내용을 듣기 위해 몸짓 언어와 얼굴 표정을 읽어내는 예민함이 있다. 현명한 의사는 공감을 통제하고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지혜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