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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 안에서 선을 잇고 있나, 틀 밖에서 선을 넘고 있나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을 읽고

당신은 틀 안에서 선을 잇고 있습니까틀 밖에서 선을 넘고 있습니까?

두 번째 나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을 읽고


“물방울은 액체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와 황홀경에 빠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물은 떨어지거나 흩어지면서 물방울로 분리된다). 소용돌이는 액체가 스스로를 향해 집중되는 지점, 회전을 통해 자신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세상에는 물방울-인간과 소용돌이-인간이 존재한다. 물방울-인간은 안간힘을 써서 바깥으로 분리되려고 노력하는 인간, 소용돌이-인간은 스스로를 중심으로 집요하게 몸을 휘감으며 더욱더 안쪽을 향해 뛰어넘기를 계속하는 인간이다(99-100쪽). 조르조 아감벤의 《불과 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물방울 인간의 중심은 원심력이다. 밖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끌려나갈 수밖에 없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밖에 있어서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할수록 모두가 닮은 인간이 된다. 들뢰즈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동일성의 범주에 갇혀 버리는 삶이다. 한편 소용돌이 인간의 중심은 구심력이다. 아무리 바깥의 위협이나 위기가 다가와도 내면의 나를 응시하는 힘으로 휘감아 자기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 바로 소용돌이 인간이다. 물방울은 더 이상 커지기 어렵다. 매달릴 힘이 자기 내면에 없다. 오로지 밖에서 당기는 중력의 힘으로 떨어져 나갈 뿐이다. 하지만 소용돌이의 위력은 그 한계가 없다. 소용돌이가 거세질수록 내면으로 파고들며 구심점을 향해 휘몰아치는 힘은 허리케인을 능가할 정도다.



물방울로 나가떨어지지 말고 소용돌이로 휘몰아쳐라


최근에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두 권의 책을 만났다. 한 권은 이미 리뷰를 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참고: https://brunch.co.kr/@kecologist/544) 라는 책이고 또 한 한 권은 이 책의 실천방안을 제시한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이라는 책이다. 이기철 시인에 따르면 “시란 모발 적시는 생각의 빗방울”이기도 하지만 ‘생각의 빗방울’에 담긴 의미를 추적, 거기에 담긴 내 삶의 존재목적과 이유를 찾아 탐구를 계속할 때 ‘생각의 빗방울’은 하나의 물방울로 떨어져 나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물방울의 흔적이 모여 거센 파도를 몰고 오며 ‘생각의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다. “탐구는 혁신과 마찬가지로 겸손에서 시작된다. 탐구는 겸손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 즉 배우려는 마음이다”(172쪽).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탐구를 지속할 때, 나는 물방울처럼 타자의 힘에 이끌려 휩쓸리는 복사본 인생을 마감하고 소용돌이치며 나의 고유한 자기다움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원본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원본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탐구는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필수적인 공부여정이다. “탐구는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열정이 있고, 왼쪽에는 믿음이 있으며, 앞에는 노력, 뒤에는 겸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네 가지가 DNA의 사슬처럼 서로 얽혀 탐구를 완성한다. 결국 탐구는 모든 거인의 열정의 산물이다”(172쪽). 이런 탐구심으로 완성한 또 한 권의 대작이 바로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존재의 파닥거림”이자 뿌리 깊은 질문을 던져 전대미문의 관문을 열어 우리들에게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내다보게 만드는 창문 디자이너다. 존재의 파닥 거림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사람은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따라갈 것이고, 존재의 파닥 거림을 듣지 않고 외부의 시끄러운 욕망의 물줄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은 늘 빠듯하게 살아가지만 언제나 뿌듯하지 않은 공허한 삶을 반복한다. 존재의 파닥 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틀 안에서 정해진 순서대로 선은 이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과 부단히 경쟁하며 복사본 인생을 살아가지만, 틀 밖에서 자신의 목적과 소명이 이끄는 대로 선을 넘어가며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사람은 소용돌이치는 원본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선 잇기’로 인생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마케팅은 넘버원을 목표로 다른 사람과 부단히 비교하면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선 넘기’로 인생을 창조하는 사람에게 브랜딩은 온리원을 목표로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서 비전을 품고 비약적으로 비상하는 사람이다. ‘선 잇기’ 인생은 남이 정해 준 각본이나 대본대로 따라가는 선형적 인생이다. 사람은 때가 있는 법이다. 어느 목욕탕 간판에 쓰여 있는 문구처럼 때가 되면 당연히 수행해야 되는 복사본 인생이다. 



주어진 순서대로 선을 이어가지 말고 당신이 순서를 정해서 선을 넘어라


남이 정해준 길을 따라 동일성을 반복하며 다른 사람과 닮아가는 인생 지도에는 자기다움은 실종되어 있고 남보다 잘하려는 치열한 레드 오션에서 넘버원이 되는 것이다. ‘선 잇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흐르는 물리적인 크로노스 시간에 맞춰 때가 되면 당연히 해내야 되는 일을 의무적으로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이들이 맞이하는 새벽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지는 시간(hour)이다. 반면에 “‘크로노스에 따른 나이 듦’이 아니라 ‘카이로스에 따른 나다움’”(47쪽)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선을 이어가는 복사본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다움을 찾아 스스로 점을 연결하며 대체불가능한 원본 인생, 즉 ‘선 넘기 인생’을 살아간다. 이들에게 “나의 시간은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47쪽). 이들은 “생존을 위해 일하지 않고, 존재를 위해 생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시간의 기준이다”(50쪽). ‘선 잇기’ 경쟁은 아무리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도 내가 추구하는 삶은 거기에 없다.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목적지일 뿐 나에게는 또 다른 목적지로 유혹하는 전초기지일 뿐이다. 하지만 선 넘기 인생은 한 점을 연결할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으로 추억되며 나만의 서사를 창조하는 삶이다.


이미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더 이상 사회가 정한 ‘선 잇기’를 할 수 없을 때, 사회가 정한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훌륭하게 사는 삶을 포기하고 가장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자기다움을 찾아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인생 계획을 제시한 바 있다.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이라는 책은 첫 번째 책인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총 7번의 워크숍을 통해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시간여행 처방전을 제시한다. 오늘을 사는 내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여행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시간여행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나는 미래에서 온 나 자신을 의미하지만, 그 본질은 자기다움을 살아가는 현재의 나를 뜻한다”(6쪽).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로 현재를 사는 두 번째 나는 일곱 번의 자기다움 워크숍을 통해 “미래의 나로 오늘을 산다는 것은 내가 되고자 했던 그 나로 살아가는 것”(358쪽)이라고 말한다. 시간여행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목적을 재발견하고,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연대기적 크로노스의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여행이 아니라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 의미를 부여하고 창조하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보내는 여행이다. 이런 시간여행을 도와주는 도구가 바로 미래소설 쓰기, 시 쓰기, 편지 쓰기, 회고록 쓰기와 같은 글쓰기다.



태어나 생존에 급급해하지 말고 고유함으로 창조되어 휴먼 브랜드가 되어라


“조태현은 태어나 생존했지만, 권민은 창조되어 존재”(84쪽)한다. 태어나 생존을 거듭하는 나는 다른 사람과 닮아지려는 노력을 통해 복사본(複寫本)으로 살다 복사(複死)하지만, 창조되어 존재하는 나는 나답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원본으로 살다 자기답게 죽는다. 유영만은 한 때 ABO(Auxiliary Bolier Operator) 유영만이었다. 수도공고를 졸업하고 평택화력발전소에 근무하던 시절 나에게 주어진 직함이 보일러 운전 보조원(Auxiliary Bolier Operator)이었다. 발전소 가장 밑바닥에서 집채보다 큰 보일러 운전에 필요한 다양한 보조기구나 장치 조작 상태를 점검하는 기능직이었다. 당시 나는 발전소 기계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기계적 인간의 한 가지 부속품에 불과했다. 그러다 우연히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공부는 고시공부라는 걸 우연한 기회에 읽은 고시합격생 수기집에서 잘 못 발견했다. 고시합격으로 보장되는 5급 사무관 자리가 나를 드러내는 의미가 아님을 머지않아 발견하고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나의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길이 배우는 길을 통해 인생의 주연 배우로 거듭나는 길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공부하던 길로 들어선 유영만 학생은 학부를 졸업하고 얻은 학사 학위를 기반으로 석사를 받고 마침내 유영만 박사가 되었다. 유영만 박사는 유영만 다움을 드러내는 자기다움의 본질이 아니라 공부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수많은 박사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박사라는 동일성의 범주안에 다 포함되어 함몰되는 학위 명칭이 유영만 다움을 드러내는 한 가지 입력 요인이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유영만의 자기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표에는 역부족이다. “자기다움의 본질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커리어를 쌓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보기 위해 가짜 커리어라는 짐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결국 자기다움은 ‘뻴셈’이었다”(216쪽). 유영만 다움은 유영만 학사-석사-박사-교수라는 ‘선 잇기 인생’을 통해 직선적으로 살아가는 여정에서 발견되지 않고, 학사-석사-박사-교수라는 학위나 직함을 다 걷어내고 유영만이라는 이름 석자로 버틸 수 있는 나력(裸力, Nakd Strength)에서 나온다. 유영만의 존재목적과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단어는 학사-석사-박사-교수가 아니라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나만의 고유한 유영만다움을 드러내는 이미지이자 메시지다. 일관된 이미지와 메시지 속에 유영만 다움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휴먼 브랜드가 들어있다. 메시지와 이미지가 어울려 유영만의 컬러와 스타일을 창조하고 가장 유영만답 다는 자기다움이 하나의 휴먼 브랜드로 드러난다. 



남다른 넘버원보다 색다른 온리원이 되어라!


“현재의 나는 타인과 다르게 넘버원(Number 1)이 되고 싶었지만, 미래의 나는 자기다움으로 온리원(Only 1)이 되고 싶었다”(94쪽). 자기다움으로 온리원이 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자기다움 소설 쓰기(자기다움 워크숍 3), 자기 자신에게 배우기(자기다움 워크숍 4), 소설 편지 쓰기(자기다움 워크숍 5), 나의 회고록 작성하기(자기다움 워크숍 6), 과거와 현재를 미래로 연결하기(자기다움 워크숍 7)를 제안한다. 일기가 과거에 내가 했던 행동을 돌아보는 도구라면, 소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들여다보는 창문과도 같다(112쪽). 저자가 쓴 《새벽나라에 사는 거인》도 태어나 생존하는 조태현에서 창조되어 존재이유나 목적을 찾아가며 권민으로 성장하는 과장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새벽은 작가에게 가장 나다워지는 시간이며 크로노스가 아니라 그 어떤 시간보다 소중한 의미가 창조되는 카이로스로 채워지는 의미심장한 때(timing)다. 새벽은 그냥 시간이 아니라 경이로운 자기다움이 창조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소설을 쓰는 새벽 시간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가 말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며, 시인 쉼보르스카가 말하는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시간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색다른 사람이고 색다른 사람은 자기 다운 사람이다. 자기다움=색다름=아름다움은 동의어다. 자기답게 살면 색달라보이고 색다르면 저절로 남달라 지면서 대체 불가능한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아름다운 사람은 자기를 어제와 다르게 창조하기 위해 소설과 시를 쓴다.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쓰는 소설은 상상 속의 내가 현재의 나를 관찰하면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들여다보는 창문”(112쪽)이자 “미래의 기억을 얻기 위한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는 시나리오”(118쪽)다. 자기다움 소설은 미래의 내가 현재를 산다면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대답이다. 반면에 자기다움 “시를 쓰는 목적은 단순히 감성을 일깨우거나 시인을 양성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막연했던 가치를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면에 불을 지피는 데 있다”(200쪽). 이처럼 시를 쓰는 일은 “잔잔한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일”(201쪽)이며 “자신을 구성하는 언어를 재정비하는 일종의 영혼의 정비작업”(201쪽)이다. 잔잔한 새벽시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응시하며 자기다움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재정비할수록 언격은 물론 인격도 같이 높아지는 고결한 카이로스의 깨달음이 엄습한다.



시 쓰는 삶은 곧 애쓰는 시다


“시가 가진 힘은 시를 삶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일 거예요”(11쪽). 이원의 《시를 위한 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새벽에 맑은 영혼의 정수를 길어 올리는 시 쓰기는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안간힘의 순간이기도 하다. ‘시적인 것’은 ‘어느 때나, 어디에도’ 있다...... 시를 통해 우리는 하마터면 못 보았을 것을 본다...... 시적인 것을 ‘보면서 보여주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 (16-17쪽). 황지우의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호》에 나오는 말이다. 시적인 순간이 자기 존재목적이나 이유를 깨닫는 뜻밖의 순간이며, 그 뜻밖에 순간에 불현듯 다가온 의미 덩어리가 심장에 박히면서 심장박동은 가속화되고 전두엽은 천둥과 번개가 휘몰아치며 뇌리 속에 위대한 섭리로 재배치되는 순간이다. “시적인 것은 세계를 보는 눈을 교정하는 데서 시작한다”(59쪽).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에 실린 안도현 시인의 ‘세계는 배반하면서 성장한다’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시 쓰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자신을 바라보고 세계 속에서 내가 차지한 위치를 부단히 재점검하면서 부단히 쓰기를 반복해도 한 번에 작품이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생각의 배설물이 쌓이다 보면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정밀한 언어들이 자신도 모르게 재배치가 되며 생각지도 못한 경이로운 문장이 건축된다. 끊임없이 언어의 줄달리기를 통해 지금 여기서 내가 느끼는 감각적 각성을 깨달음의 언어로 번역하며 어제와 다르게 쓰여는 애쓰기가 시 쓰기다. “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이상의 《오감도》에 나오는 ‘최후’라는 시구처럼은 쓰기 어렵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각의 흐름을 언어로 벼리고 벼리면서 나 다운 언어들의 배열을 직접 목격하고 겪어보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시는 정수자 시인의 말처럼 “단도의 서늘한 직입처럼 촌철의 난만한 살인처럼” 예고 없이 급습한다. 그래서 시는 시인이 마음먹고 쓰는 게 아니라 발버둥 치며 주변을 응시하고 내면으로 파고들다 김중식 시인의 말처럼 “어쩔 줄 모르는 삶의 흔들리는 언어”나 “흔들리는 삶의 어쩔 줄 모르는 언어”를 만나는 순간 내 몸을 관통하다 남긴 흔적과 얼룩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쓰이는 시인과 자연의 이중주에 가깝다. 박재연 시인에 따르면 “시는 내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잠시 주저하는 입술이자 갇힌 새들의 무모한 날갯짓이다.” 자기다움 시를 쓰는 시인은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쓰던 소설과 다르게 철저하게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오감각으로 느끼는 모든 신체적 반응을 곤두세우고 늘 존재해 왔던 당연함의 세계에 언제나 물음표를 던져놓고 존재의미와 목적을 따져 묻는다. “시인의 몸은 세상의 여러 자극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기(受容器)이자 공명통이다”(8쪽). 권혁웅의 《미래파: 새로운 시와 시인을 위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 일상을 보내도 어제 만났던 마주침은 오늘 부딪히는 마주침과 다르게 감각적으로 각인된다. 미세한 감각의 차이로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그때 내 감정의 소용돌이는 어떻게 휘몰아치는지를 유심히 관찰할 때 작은 통찰이 선물처럼 다가온다.



육체를 통과하지 않은 글은 관념의 파편이다


“시집은 권태와 고독으로 살찐다. 시의 성분은 육체적이다. 육체를 통과하지 않는 시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들은 고독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다”(53쪽). 장석주 시인의 ‘식물의 자세’에 나오는 시구절이다. 새벽에 책상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시를 쓰라는 게 아니다. 어제 하룻 동안 내 몸을 관통하고 남은 얼룩과 무늬를 반추하며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다 보면 뜻밖이 적확한 단어가 갑자기 나타나 자기도 놀라는 한 문장을 써놓는다. 시의 성분만 육체적인 게 아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소설, 시, 편지, 회고록도 모두 나의 경험적 상상력을 능가하는 작품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인생의 전략적 변곡점마다 겪어낸 사건과 사고의 합작품이 오늘의 내가 된 비결이다.  나 역시 가장 유영만 다운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되기 위해 인생의 변곡점마다 긴 방황도 해보고 방황 끝에 찾은 방향을 잡고 나만의 방식과 방도로 나의 길(My Way)을 걸어온 셈이고 여전히 제2의 나를 재발견하며 시간여행을 거듭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기존 교수 자리가 주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유영만 다움을 드러내기에는 부적합하다. 유영만 교수라는 타이틀보다 유영만다운 교수가 되고 싶었다. 교수로서 유영만의 가르침도 책상머리에 건져 올린 관념의 야적물이 아니라 내 몸이 겪어낸 경험적 깨우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영만 교수가 되었지만 유영만 교수가 유영만의 자기다움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깨달음은 또 다른 자기다움 탐구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교수는 그저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의 정식 교직원이 되어서 연구하고 가르치며 봉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직함에 불과하다. 똑같은 교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천차만별이 교수 이미지가 부각된다. 교수라는 직함이나 직업 자체가 유영만의 자기다움을 드러내지 못하기에 또 다른 유영만 다움을 찾아 탐구 여행을 떠났다. 탐구는 겸손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배우려는 마음”(172쪽)이라고 했듯이 교수도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자기다움을 찾아 나서는 공부의 끈을 놓고 학교나 사회가 원하는 연구논문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흔히 교수가 되면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며 그동안 축적한 지식으로 아성을 구축한 다음 그 안에서 안주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주는 안락사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르고 모르는 분야가 더 많다는 각성을 기반으로 겸손하게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공부여정에 뛰어드는 사람만이 인생의 주연 배우로 거듭날 수 있다. 배우는 배우는 사람이다. 배우는 탐구여정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배워야 부족함을 극복하고 자기다움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는 겸손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자기다움이란 ‘나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 아픔과 고난을 극복하여 참된 자아로 충만해진 상태’를 의미한다”(196쪽). 참된 자아로 충만해진다는 의미는 한두 번의 노력으로 완성되는 이상적인 상태를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다움으로 충만해지는 과정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미완성 교향곡이다.



보통명사로 묻히지 말고 고유명사로 묻는 브랜드가 되어라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글쓰기 방법에는 편지 쓰기도 있다. “편지 쓰기는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 자아 탐구와 성찰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편지 쓰기는 궁극적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다움을 더 쉽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다”(234쪽). 유영만 교수가 되어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에게 편지를 썼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기대감에 젖어 이제 힘든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수(敎授)도 학문적 교수형(絞首刑)에 처할 수 있는 운명으로 전락한다. 전공은 물론이고 가르침과 배움의 철학을 자기 신념을 기반으로 정립하고 연구와 봉사라는 의무도 의무적으로 수행하는 강제적 과업이 아니라 유영만이라는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숱한 수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말과 글 속에서 대체불가능한 언어적 사유체계를 구축하고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보통 명사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명사로 거듭나는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지식생태학자는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얻은 신선한 생각 재료를 토대로 (사람들이 재미있게 공부하며 의미 있게 습득할 수 있는) 건강한 지식을 요리하는 ‘Knowledge Chef’다. 지식생태학자의 또 다른 의미는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 그들에게 배운 생존 원리를 활용하여 지식이 자연스럽게 창조되고 공유될 수 있는 지식 정원을 설계하는 ‘Knowledge Designer’다. 지식요리사이자 지식정원사는 이제 지식임신과 출산, 지식잉태 조건과 자연분만 유도법을 세계 최초로 연구하는 지식산부인과 의사도 유영만의 자기다움을 구축해 나가는 행보를 이어갈 것이다.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글쓰기에는 회고록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글쓰기는 회고록(回顧錄)이 아니라 회고록(懷故故)이다. “회고록(懷故故)의 한자 의미는 다음과 같다. 회(懷)는 품다, 고(故)는 연고, 록(錄)은 기록하다는 뜻이다”(282쪽). 그래서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글쓰기의 한 가지인 회고록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회고록(回顧錄)이 아니라 그 사건의 이유를 탐구하는 회고록이다”(283쪽). 내가 지난 시절 겪었던 경험을 반추하며 과거를 되살리는 기록을 넘어 사건이나 사고 속에 담긴 기억을 되살려 그 의미의 퍼즐을 맞춰가며 “회고록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우연에서 필연으로, 사건에서 섭리로, 결과에서 목적으로 확장”(290쪽)시켜 나가는, 과거를 기반으로 오늘을 점검하고 오늘에 비추어 내일을 살아가려는 안간힘이다. “결국 회고록 쓰기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아를 재발견하고 새롭게 만들어가는 복잡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깊고 풍부한 자기 이해에 도달하며, 이러한 통찰은 미래의 자아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292쪽). 회고록을 쓰다면 유난히 강렬하게 기억으로 남아 당시의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내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사건도 있다. “기억에서 사라진 대부분의 사건은 자신의 본질과 소명에서 벗어나, 타인의 선택에 동조한 복사품 같은 시간이었다”(293쪽). 보통명사로 살아가면 복사본으로 묻힌다. 고유명사로 살아가야 대체불가능한 원본으로 색다른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



회고록은 자기 발견의 도구이자 기억에 대한 재해석이다


“나처럼 평범하거나 평균 이하의 사람들도 인생이라는 화폭 속에 감춰진 자기다움을 ‘문지르며’ 발견해 갈 수 있다. 경험이 없는 곳에 기억도 없고, 기억이 없다면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결국 회고록 쓰기란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문지르며 되새기는 가운데 기억의 무늬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여정인 것이다”(304쪽). 누구나 과거의 경험적 흔적이 있다. 다만 그 흔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역사적으로 묻힐 수 있는 인생의 어느 한순간으로 스쳐 지나갈 수도 있고 내 삶의 무늬로 직조되는 아름다운 얼룩이 될 수도 있다. “기억은 해석이다.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과거가 전하는 메시지도 달라진다”(309쪽). 우리는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기억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자가 특정한 시공간에 틀어박혀 틀에 박힌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는지, 아니면 선 넘기를 통해 틀 밖의 관점으로 뜻밖의 의미를 추출하는지에 따라 과거는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는 오늘의 시점이 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회고록은 자기 발견의 도구입니다. 과거의 경험을 분석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얻는 과정”(360쪽)이기에 내가 몰입하고 의미를 창조했던 순간을 반추하는 가운데 뜻밖의 자기다움에 관련된 이미지나 메시지를 발굴해 낼 수 있다. “미래로의 시간여행이 창작과 기록의 영역이라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편집과 윤문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이미 개봉한 영화를 재편집하는 감독관 작업과도 같다. 어떤 감독이 작업을 맡느냐야따라 영화의 모습이 달라지듯,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309쪽). 똑같은 사건과 사고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 사건과 사고에서 독특한 사유와 사고의 틀을 재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는 사람이 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사라져 버릴 경험적 흔적을 붙잡고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또 다른 고통을 반복하면서 대체 불가능한 의미가 담긴 콘텐츠를 창조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세상에 하나뿐인 원본임을 인정한다면, 다른 원본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비교하는 순간 ‘복사’ 버튼을 누르게 되고, 다른 결국 자신은 원본이 아닌 복사본의 인생을 살게 된다”(198쪽). 다른 사람과 비교할 시간에 내가 겪은 경험적 흔적을 어떤 언어로 번역해 낼 것인지, 어제 사용했던 언어 사용방식의 틀에서 벗어나 낯선 언어적 사용 문법을 창조하는 사람이 자기다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절망 속을 질주하는 언어가 앎의 서광을 열어간다


2007년도 411 사태를 겪고 쓴 처음 자기 계발서 《용기》를 통해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용기라는 걸 깨달았다. 용기는 머리에서 나오지 않고 뛰는 뜨거운 심장에서 나온다.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기를 반복하면 용기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다음 사안을 붙잡고 검토를 거듭한다. 내 안의 꿈틀거리는 자기다움의 DNA는 논리적 분석과 치밀한 검토를 통해 객관적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오지 않음을 《브리꼴레르》라는 책으로 증명해보고 싶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분석하고 검토하며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보다 몸을 움직여 도전해 보고 시행착오를 통해 판단착오를 줄여나가는, 딜레마 상황에서도 장고 끝에 악수를 두지 않고 맥가이버처럼 가용한 자원과 도구를 활용, 임기응변력을 발휘하여 난국을 돌파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개발하는 사람이다. 삶의 지혜는 직선으로 달려가는 주로에서 나오지 않고 에둘러 걸어가는 에움길에서 나온다는 《곡선으로 승부하라》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라는 점, 그리고 나를 바꾸는 방법은 언어를 바꾸는 길에 있음을 《언어를 디자인하라》를 쓰면서 언어의 한계가 나의 한계임을 깨달았다. 숱한 저술과 번역의 여정에서 내가 겪은 경험과 깨달음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고 해석하면서 가장 유영만 다운 문체가 가다듬어져 왔다고 본다.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능가할 수 없고, 쓴 글대로 글에 담긴 그리움이 앞으로 걸어가는 미래의 길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대로 쓰고, 쓴 대로 살아가는 변주 속에서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는 다름과 차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절망 속을 질주하는 언어가 앎의 서광을 열어간다. 어떤 책은 읽는 게 아니라 책이 나를 읽는 경우가 있다. 책이 나를 무장해제시키고 거침없이 나를 파고들어 그동안 축적된 인식의 두께를 사정없이 갉아먹기 시작한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기존 지식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온몸으로 항거하지만 절망은 아무런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안온한 인식의 터전을 저돌적으로 갈아엎는다. 앎의 막다른 골목에서 정말 포위당한 채 처절함을 넘어 처참한 탄식에 눌려 낯선 앎의 미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다가 쓴 책이 《코나투스》다. 유영만 다움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만난 스피노자가 예고 없이 급발진을 시도하더니 뚜렷한 방향감을 갖고 급습해서 나의 정신세계로 침범하고 들어온다. 뇌리에 담긴 기존 논리를 뒤흔들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인식의 주체로 생각했던 나를 변방으로 몰아붙인다. 



그때부터 유영만의 《코나투스》는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고 생각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설명을 넘어 세상을 해석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저자의 몸을 관통하고 피 끓는 열정에 버무려진 다음 존재 자체의 의미나 이유를 해석하는 틀에 걸러져 차가운 이성으로 관철된 주장이 잠시 머뭇거린다. 마지막으로 갈무리가 된 감정이나 정서들이 스스로 논리를 찾아 일리(一理)들의 행렬을 이룬다. 그 순간 일리 있는 이야기들이 심장에 들어가 세상을 따듯하게 품으며 온기를 잉태한 진리의 빛으로 거듭난다.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욕망의 물줄기가  실존감과 긍휼감으로 주변을 비춰주고 공동체를 아우르는 올곧은 정신으로 거듭난다. 지금의 나를 넘어서려는 안간힘이 노력을 만나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출산하는 순간, 나 역시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남을 반복한다. 나는 영원히 살아있음의 존재를 증명하며 자기다움으로 다음 생을 이어간다. 권민 작가의 두 권의 책,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와 《두 번째 나: 내일의 나를 위한 자기다움 워크숍》이라는 책도 자기 스스로 자기다움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일 것이다. 여전히 자기 탐구과정을 반복하면서 자기다움이라는 산물은 명사로 정체되어 있지 않고 어제와 다른 부산물을 부단히 재창조하면서 자기다움의 본질과 정수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안간힘을 쓸 것이다. “자기다움은 내 안에서 항상성을 유지한다. 그것은 마치 변함없는 빛의 속도처럼 불변의 상수다. 시간이 지나도, 환경이 변해도 나만의 고유한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345쪽). 변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다움이 어제보다 더 자기다워지는 과정이다.



오늘은 과거로 돌아가는 날이 아니라다시 미래로 흘러가는 날이다


“옷장이 아이덴티티의 외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면, 책장은 지적 여정을 가록 한 공간이다...... 책장은 내 정신적 성장을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이다”(354쪽). 나의 옷장에는 과거 양복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언제부터는 양복은 격식 차리기 위한 공식적 의복이 되었고 대부분의 강연장이나 미팅 장소에는 청바지에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으로 다닌다. 이제 양복바지보다 청바지가 더 많아졌다. 나의 책장만 보면 이 사람의 전공이 의심될 정도로 시, 소설을 비롯한 문학 서적과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분야별로 저마다의 다른 주장을 머금고 서가에 꽂혀 있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관련 서적을 50권에서 많게는 100권 이상을 읽으면서 나의 경험적 해석틀로 녹여가면서 나만의 언어로 재가공한다. 다양한 책을 읽고 100권의 책을 번역하거나 저술했지만 모든 책을 관통하는 핵심가치는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에 포함된다. 자기다움을 표현하는 다섯 가지 단어를 한 단어만 꼽으라고 하면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마지막 단어(Final Vocabulary)로 나는 도전을 꼽는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도전하는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아갈 것이다. “자기다움은 마치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본질적인 무언가다. 말하자면 자기다움은 목적과 가치에 가깝다”(344쪽)고 말하는 이유를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오늘을 과거로 밀어낼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당겨 오늘로 만들고 다시 미래로 보낼 것인가? 미래를 사는 사람은 남들보다 두 배의 삶을 사는 것이다. 미래의 나로 오늘을 산다는 것은 내가 되고자 했던 그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연대기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적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은 과거로 돌아가는 날이 아니라, 다시 미래로 흘러가는 날이다. 미래 같은 오늘을 살자. 미래의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인생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연보다 필연을, 사건보다 섭리를, 결과보나는 목적을 바라보는 것이다”(358쪽). 오늘을 크로노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순간적으로 오늘은 과거가 되지만,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결정적인 순간으로 재창조하는 순간, 오늘은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 미래 같은 또 다른 오늘이 된다. 오늘이 미래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미래의 내가 되어 오늘을 살아야 한다. 미래의 내가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서 현실에 구현되는 방식으로 치열하게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 오늘 내가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삶은 과거가 이어져 온 시간적 흐름의 한 부분이 아니라 미래의 내가 꿈꾸고 상상하던 대로 미리 살아가며 자기다움을 완성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이다.



“미래의 나는 나의 인생을 이해하고,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지금, 여기,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당신은 어느 미래에서 왔는가?”(359쪽). “통곡이 올라오는 몸은 앞뒤로 흔들어줘야 하는 법.” 김혜순의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미래의 나를 붙잡고 지금 여기서 오늘을 살아가려는 움직임은 매 순간 통곡이 연주되는 신체성으로 미래 가능성을 만들어가려는 몸부림이다. 내 몸을 내가 주체적으로 부리는 가운데 미래의 내가 살아가는 자기다움도 미리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몸부림으로 항거하는 지금 여기서의 노력은 미래의 나로 살아가려는 자기다움에 응답하는 부름인 것이다. 그런 몸부림으로 미래의 자기다움을 창조하는 노력은 어느 순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서 이룩되는 노력의 산물이라기보다 일상의 무의식적 습관으로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자기다움의 명인이 되는 여정의 부산물이다. “명인은 연습을 통해 의지를 떨쳐낸다. 명인의 솜씨란 무위다. 행위는 무위에 이르러 완성된다. 행복한 손은 의지와 의식이 없다”(28쪽). 한병철의 《관조하는 삶》에 나오는 말이다. 무의식적 손놀림으로 쓰는 소설과 시와 편지와 회고록의 축적이 어느 순간 내 삶의 기적을 만들어낼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색다른 자기다움의 꽃이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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