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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에 휩쓸리는 기성리더,
사명으로 뒤흔드는 진성리더?

《급진 거북이: 진성 리더의 변화 전략》을 읽고

당신은 운명에 휩쓸리는 기성리더인가요사명으로 뒤흔드는 진성리더인가요

급진 거북이진성 리더의 변화 전략을 읽고

     


“너무 더워서 땀이 등에 폭포처럼 흘렀다. 참을 수 없어서 단숨에 마셨더니, 차가운 거품이 입속에서 작은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뛰었다. 삼키고 나자, 몸속에서 차가운 터널이 지나갔다”(47쪽). 오가와 이토의 《츠바키 문구점》에 나오는 말이다. “너무 읽고 싶어서 손꼽아 기다리다 날이 밝았다. 참을 수 없어서 단숨에 읽었다. 차가운 통찰력이 뜨거운 열정에 버무려 천둥과 번개 같은 깨달음이 온몸을 휘감았다. 깨달음으로 한 동안 줄달음쳤더니 온몸에서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책은 윤정구 교수의 피와 영혼에 적신 글로 건축된 문장이 곳곳에서 중심을 잡고 있고, 고뇌하는 지식인의 뜨거운 심장에 걸려서 직조된 주장이 기둥을 이룬다. 고통을 무릅쓰고 밤을 새워 벼리고 벼린 깨달음의 언어가 새벽녘의 서릿발 이성에 얼렸다 심장을 파고들며 감각적 열정으로 녹아든다. 그 언어적 무게감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으로 거듭나며 시공간을 물들인다. 주장은 급진적이고 단도직입적이지만 근원에서 근본을 파고들며 폐부를 관통하는 언어의 탄환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살갗에 남긴 여진은 그칠 줄 모르고 진한 여운이 반복해서 내 몸을 방문한다. 



급진과 거북이의 역설적(逆說的만남이 역설(力說)하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급진’과 ‘거북이’가 만나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라는 책이 탄생했다. 책 제목은 상반된 이미지를 지닌 두 단어가 절묘하게 불협화음을 내뿜으며 의미를 심장에 품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라는 제목은 한 줄로 ‘제 몫’을 하기 위해 한평생 진성 리더십을 연구해 온 윤정구 교수의 급진적 사유체계가 녹아든 상징적 증표다. 물론 급진(急進)은 급발진(急發進)이 아니다. 여기서 ‘급진’은 ‘급진적인’ 형용사이며,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과감한’, ‘양보할 수 없는’, ‘근원적인’이거나 ‘근본적인’ 등과 같은 형용사의 다른 이름처럼 들린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 처음에는 거북하게 다가오겠지만 책을 읽어보면 ‘급진’은 ‘거북이’를 만나야 근원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급진 거북이라는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따르고 지키는 급진주의자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실현되기 전의 약속상태인 존재목적을, 과업을 통해 실현하는 일에서는 할 수 있는 것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에서, 지금 가진 것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경계 울타리를 정해놓고 거북이처럼 시작한다. 거북이처럼 실행해 어느 정도 달성되면 달성된 상태를 지렛대로 삼아 다시 경계의 범위를 확장시킨다”(114쪽). 즉 목적은 급진적이지만 목적에 이르는 여정에는 거북이처럼 느리더라도 꾸준히 걸어가겠다는 결연한 각오와 의지가 역설적(逆說的)으로 만나 평범하지만 비범하게 역설(力說)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욥기, 8:7)는 성경말씀처럼 “진성리더는 목적에 대해서는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실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꾸준하고 차분하고 조용히 움직인다”(19쪽).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 보면 사회과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위대한 숙제를 내준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낸 다음 그걸 실천하라(Think of an Idea to Change our world. And put it into Action).” 많은 학생들이 어렵고  힘들며 불가능한 과제라고 하지만 트레비라는 학생은 자신의 주변 세 명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세명에게 내가 한 것처럼 세 명을 변화시키는 미션을 준다. 3명이 9명으로, 9명이 27명으로, 다시 27명이 729명으로 확산되면서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한 점진적 변화의 흔적이 축적되면서 마침내 세상이 바뀌는 기적을 이루는 변화전략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미약한 모닥불로 시작했지만 종국에는 걷잡을 수 없는 들불로 번지는 불길처럼 급진 거북이는 요란하게 시작하지 않는다. 반대로 “급진적 급진성을 가진 리더들은 모든 과제에는 단기적 답이 있다”(21쪽)고 믿고, 단기업적주의로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십을 발휘하며 성과목표 달성을 위해 무자비하게 밀어붙인다. 이들은 목적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자리보전에 유리한 단기목표 달성을 위해 진정성보다는 무자비한 급진성으로 성과 목표 달성에 매진하다 결국 자신은 물론 조직도 위기에 빠지고 만다.



리더십은 진성리더십과 진성리더십이 아닌 리더십두 가지뿐이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윤정구 교수를 알기 전에는 목적경영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하지만 윤정구 교수를 알고 난 후에는 목적경영 없이 인생경영을 하기 어려워졌다. 이미 《황금수도꼭지: 목적경영이 만들어낸 기적》을 읽고 나서 목적경영은 사람과 기업을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경영혁명이기 전에 존재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소명에 따라 자기 사명을 다하는 존재혁명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리뷰 참고https://blog.naver.com/kecologist/221295875618).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진성 리더십》 등과 같은 책에 이어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을 포함, 진성리더십으로 목적경영을 줄기차게 주장해 온 윤정구 교수에 따르면 “진성리더는 잘못된 리더십으로 산성화 된 대한민국, 사회, 회사, 개인에 변화를 개간하는 현능한 전략가”(10쪽)다. 글은 삶을 능가할 수 없다. 진성리더십을 일관되게 주장해 온 윤정구 교수는 스스로 “진성리더는 좁은 문을 통과해 목적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쇄빙선을 앞세워 고난을 뚫는 사건”(24쪽)의 주인공임을 증명해 왔다. 스스로 진성리더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진성리더십의 본질과 핵심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문장을 건축할 수 없다.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 안에는 윤정구 교수가 한평생 고뇌하며 진성리더의 진정성과 진정한 사명과 소명이 무엇인지를 몸을 던져 밝혀내는 과정에서 체득한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마트폰은 아이폰과 아이폰이 아닌 두 가지밖에 없듯이, 리더십에는 진성리더십과 진성리더십이 아닌 것 두 가지 종류 밖에 없다. 다른 리더십은 리더가 갖춰야 할 저마다의 필요조건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필요조건을 다 갖춘다고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반면에 진성리더십은 리더에게 필요한 충분조건을 내재화시켜 품성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진성리더십만 갖추면 리더십의 본질과 핵심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성리더십 없는 모든 리더십은 유사 리더십이다. 진성리더십 이전과 이후의 모든 리더십은 진성리더십의 사족이거나 주석에 불과한 까닭이다. 진성리더십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며 위기극복과 난국타개의 수단으로 리더십이 등장하는 이유는 목표달성에 실패한 다른 리더를 능가하는 탁월한 리더가 이전과 다른 리더십을 발휘하면 현실적인 경영위기는 물론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사실 진성리더가 아닌 다른 모든 리더는 존재목적보다 성과목표, 근원적 사명보다 소유자나 주주의 지명에 복무하며 매출이나 실적을 높여 경쟁력을 제고시킴으로써 살아남는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는 유사리더다.



진정(眞情)이 전해지지 않으면 진정(鎭靜)할 수 없다


“진성리더는 자신이 사명의 주인공이 되어 사명과 일관된 삶을 사는 과정을 통해 사명을 자신의 품성으로 내재화”(윤정구, 2015, 82쪽)시켜 품성 자체가 진성(眞性)인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명은 조직이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되는 이유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하며 진성리더에게 사명은 영혼의 종소리이자 진북(True North)이다. 진성리더가 고난과 역경의 파도가 밀려와도 진북으로 향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더욱더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진리가 말하듯 호랑이처럼 더 원대한 사명을 가슴에 품고 소처럼 우직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까닭은 북극성에 울려 퍼지는 영혼의 종소리를 듣고 지금 여기 삶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끝별의 ‘애착시어사전’이라는 시에 보면 “미래는 술래, 달려가면 물러서는 내일이거나/ 쫒기를 포기한 모레이거나/벼랑 끝에 방치된 글피”라는 구절이 나온다. 진성리더에게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는 내일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현실에 와 있는 사명대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다. 진성리더에게 오늘의 평범한 보행도 내일의 비범한 행보로 바뀔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이미 신념과 품성으로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련과 역경의 파도가 높이칠 수록 더욱더 강렬한 열망으로 사명을 찾아 떠나는 영혼의 여행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사명은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 단단한 마음의 근육으로 발전한다”(윤정구, 2014, 62쪽). 시련을 극복한 사명만이 한 시대를 이끄는데 도움이 되는 시금석을 마련할 수 있다. 유사리더는 사명보다 주주나 소유주의 지명으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라 목적보다 단기 목표에 목숨을 걸고 일하다 난관에 부딪치면 그만두어야 할 이유를 찾지만 진성리더는 난국을 돌파하는 이전과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선다.


윤정구 교수의 《진성리더십: 21세기 한국 리더십의 진정한 표준》에 따르면 진정성(authenticity)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전자가 후자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우선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삶의 스토리가 정말 자신의 이야기인지를 문제 삼는 ‘true to oneself’의 의미를 담고 있는 진정성(眞正性)과 내 진실된 스토리가 남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져 정서적 공명을 일으키는 진정성(眞情性)이 있다. 즉 ‘眞正性’이 Authenticity의 원인이고 眞情性이 그 결과라는 것이다. “진정성은 리더의 주장이 아니라 구성원의 마음에 목적이 밀알로 심어진 상태”(94쪽) 또는 “진정성이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목적과 구성원을 일으켜 세우는 목적이 같은 상태”(90쪽)가 되는 까닭이다. 원인이 부실하거나 부재하면 결과 역시 부실하거나 원하는 방향과 기대대로 나오지 않는다. 진성리더가 아니고 유사리더는 우선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삶의 스토리가 진정성(眞正性)이 결여되어 있고 진정성이 결여된 삶의 스토리에 공감하며 감동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는 진정성(眞情性)이 없으니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한 가지뿐이다. 영혼의 종소리가 울리는 근원적 사명감이 없으니 지금 당장 급진적으로 취할 수 있는 전략을 급진적으로 추진, 조기에 성과를 제고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강압적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음모가 마음속을 가득 채운다. 자신에게 진정성(眞正性)이 있는 삶의 스토리가 없으니 급진적으로 시나리오를 조작한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진정(眞情)이 전해지지 않고 스스로도 진정(鎭靜)하지 못하는 설상가상의 위험이 이중고로 작용한다. 상황판단력이 마비된 상태에서 급발진되는 자동차처럼 엉뚱한 ‘전략’으로 위기 상황을 급습하니 ‘지략(智略)’이 ‘생략’되고 어처구니없는 ‘중상모략’이나 ‘계략’으로 ‘침략’하는 것이다.



논리의 세계는 지식이 지시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지혜가 지휘한


“아무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주워온 지식들로 길고 긴 논리를 편다. 천직의 고행을 거치지 않고도 많은 목소리들이, 무거운 말들이 도처에 가득하고, 숱하고 낯선 이름들이 글과 사색의 평등을 외치며 진열된다. 정성스러운 종이 위에 말없는 장인이 깎은 고결한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찍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15쪽). 장 그리니에의 《섬》에 실린 김화영 번역자의 ‘글의 침묵’이라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진성리더십만이 신자유주의와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산성화 되고 황폐화된 우리 사회나 조직의 토양을 개간, 밀알의 씨앗을 뿌려 목적경영의 과일이 열리는 과수원으로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다. “진성 리더십을 실천하는 급진 거북이의 변화에 대한 태도는 “뛰어난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속담에 잘 표현되어 있다“(10쪽). 진성리더는 산성화 된 밭은 탓하지 않고 우선 토양을 믿음의 씨앗이 발아될 수 있는 비옥한 알칼리성 토양으로 개토한 다음, 사명으로 튼실한 뿌리를 내린 다음 비전의 줄기를 타고 존재목적의 열매가 맺을 때까지 줄기차게 노력을 거듭한다. “진성리더가 만든 변화는 조용하거나 과묵하나 목적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급진 거북이는 목적으로 믿음의 쇄빙선을 만들어서 좁은 문을 부수고 길을 뚫어 더 높고 더 평평한 곳에 과수원”(25쪽)을 세우는 까닭이다. 


‘백 사람이 한 번 읽는 책 보다 한 사람이 백 번 읽는 책을 쓰라’는 말이 있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마음에 다가오는 책이 바로 윤정구 교수의 책이다. 타성에 젖은 앎을 깨뜨리는 낯선 앎의 흉터를 바라보며 올곧은 앎이 걸어가야 할 정당한 진리의 뒤안길에서 격렬하게 한 시대의 화두를 붙잡고 싸웠던 윤정구 교수의 앓음다운 족적이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에 그대로 숨겨져 있다. 진북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해 목표달성과정을 재촉하지 않고 에움길에서 몸소 방황하며 소명이 명령하는 가시밭길을 굳이 선택한 결단에는 말 그대로 단호한 결심과 결연한 각오의 칼날이 서려있다. 문제상황을 감지하는 남다른 감각이 냉엄한 현실 인식을 가져오고 뜨거운 여름에도 서늘한 서정으로 긍휼감을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한의 겨울에도 뜨거운 문제의식으로 감기하나 걸리지 않고 지식의 내피에 용기의 나무를 심는다. “논리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이지만 현실은 이 나눠진 논리를 시대의 지평에 맞게 통합하는 지혜의 세계다”(280쪽). 지식이 지시하는 세계가 논리의 세계라면 지혜가 지휘하는 세계는 현실의 세계다. 분과학문으로 나눠진 경영학적 지식의 파편으로 현실을 재단하지 않고 열정과 신념으로 달궈진 지혜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진성리더로서의 솔선수범을 보여주고 있다. “진성리더의 급진 거북이 전략은 자신을 가둔 항아리를 깨고 항아리 밖의 세상에서 새로운 진실을 찾아 떠나는 디아스포라 여행자의 여정이다. 급진 거북이는 삶의 개입이 끝나는 죽음의 순간까지 아포리아와 디아스포라 여정을 반복하며 자신을 낳은 낡은 항아리에서 꺼내는 N번의 부활을 경험한다”(356쪽). 윤정구 교수는 타성에 젖은 습관성 언어와 통념에 갇힌 를 벼리고 벼려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위한 적확한 은유로 대안적 리더십의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건축한다.



끌개가 목적이라면 밀개는 긍휼감이


“급진 거북이 리더가 반복게임에서 파레토 최적점에 도달하기 위해 개입시키는 두 변수는 끌개(Attractor)인 목적에 대한 믿음과 밀개(Reinforcer)인 상처받을 개연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긍휼감이다”(124쪽). 목적에 대한 믿음은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믿음이 있다고 유혹해도 비록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기꺼이 초기 믿음에 승부수를 던져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이자 의도다. 긍휼감으로 작용하는 밀개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해도 리더가 솔선수범으로 나타나 손해를 기꺼이 감내함으로써 신뢰잔고를 더욱 굳건하게 축적하려는 변화 지원자다. “나침반의 북극은 진성 리더가 찾아낸 자신의 존재목적이고, 남극은 진성리더가 품고 있는 자기 긍휼(Self-Compassion)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이 내면의 나침반은 세상의 진북과 진남을 찾아 소통하고 피드백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떨린다”(298쪽).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다는 의미는 ‘떨리는 지남철’이라는 시를 쓴 민영규 시인에 따르면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을 지칭한다. 


거목은 흔들리지만 고목은 흔들리지 않듯이 살아있는 지남철은 험난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방향감을 잃지 않기 위해 바늘 끝의 전율이 불안하게 떨지만 죽은 지남철의 바늘은 더 이상 떨지 않는다. 이미 생명을 다한 지남철을 믿고 진북과 진남을 찾아갈 수 없다. “진북을 구성하는 목적의식과 진남을 구성하는 자기 긍휼의 양극이 극성을 가지고 떨릴 때 온전한 나침반이 된다. 진성리더는 극성이 강한 나침반을 가지고 세상의 지도를  그려내는 지도술사다”(302쪽). 진성리더도 외부적 환경요인이나 여건 불확실한 여건 때문에 방향감을 잃고 ‘지도’로는 진북을 찾아갈 수 없을 때도 직면한다. 더 이상 ‘지도’로는 진북을 찾을 수 없을 때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서의 ‘지형’에서 느끼는 긍휼감 덕분에 당황하지 않는다. “세상이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져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진성리더가 길을 잃지 않고 지도를 그려낼 수 있는 비밀은 진성리더의 나침반이 긍휼감이라는 남극성을 향한 극성을 유지하며 떨릴 수 있기 때문이다”(306-307쪽).



진북이 존재목적이라면 진남은 과감한 실천이다


진성리더는 언제나 ‘떨리는 지남철’이다. “사실 나침반의 옛말인 지남철(指南鐵)도 북극성의 진북보다 남극성의 진남을 가리키는 바늘이란 뜻이다”(307쪽). 떨리는 지남철이 물리적으로 멈춰 섰어도 진성리더가 당황하지 않는 까닭은 내면의 나침반이 언제나 진남을 향해 긍휼감으로 떨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나침반이 남극성을 찾아 떨림을 유지하는 상태가 긍휼이다. 긍휼(Compassion)이라는 말속에는 이미 나침반(Compass)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긍휼은 자신과 타인의 성장에 대한 아픔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이며, 이 용기를 통해 아픔을 치유하고 근본적인 설루션을 위해 혁신적으로 행동하는 정서다. 아픔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긍휼이다”(301쪽). 긍휼이 단순히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이 겪는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기에 몸을 던져 그 아픔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설루션을 탐색하고 실행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용기다. 용기는 머리로 이해타산을 따지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이 아니다. 오히려 용기는 나에게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몸을 던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근원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실현하려는 결단이자 결행이다.


“진북은 목표를 넘어서 왜 자신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인이 되어서 일어서야 하는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왜라는 물음이 목적에 대한 믿음으로 설정된다. 진남은 문제해결을 넘어 근원적 고통의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는 긍휼의 근력이다”(302-303쪽). 진북이 목적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 찾은 존재목적이라면 진남은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책을 강구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과감한 실천력이다. 그 뒤안길에 긍휼의 근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먼 길 날아온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몸을 눕히자/마른 나뭇가지가 지친 눈송이를 힘껏 끌어안았다......눈 송이가 제 몸 녹여 나뭇가지를 적시고/나뭇가지가 제 몸 얼려 눈송이를 떠받칠 때/아름다운 문장 하나가/흰 수정 테이프 아래 감춰졌다.” 정끝별의 ‘고로쇠 한 철’이라는 시의 일부다. 먼 길 날아온 눈송이의 고단함을 나뭇가지가 끌어안아 노곤함을 달래주는 휴식처가 된다. 눈송이의 헌신적 애정이 나뭇가지의 무조건적 열정과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긍휼감으로 관통하고 소통하며 교감한다.



점진적 변화가 수동적 전략이라면 근원적 변화는 능동적 전략이


경영자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지한 경영학자가 경영학적 상상력과 긍휼감으로 녹여내는 언어로 건축한 모든 문장에 시국이 언제나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내딛는 안간힘으로 처절하게 얼룩져 있다. 결연한 용기와 열정으로 물고 늘어지는 고뇌에 찬 질문과 이에 대한 결정들이 책의 곳곳에서 낮은 포복 자세로 숨을 쉬며 현실변혁과 삶의 혁명을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 급진 거북이의 발언에는 언제나 작심한 파장이 긴장감을 유지한 채 침묵의 어둠을 뚫고 조용히 하늘 높이 치솟아 세상을 굽어본 다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현장으로 뛰어내리는 결연한 결단이 심장을 파고든다. 모든 문장에는 땀과 눈물을 매개로 얼룩진 시인의 고독이 밤을 벗 삼아 깊은 성숙의 언어로 녹아들어 있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쉽게 건너가지 못하고 언제나 그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멈춰 서서 의미가 심장에 꽂히는 즐거운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말해야 하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함구하고 있는 어둠 속에 잠든 현실은 마침내 윤정구 교수의 고뇌에 찬 결단을 키우는 텃밭으로 자란다. 애간장을 녹이며 사유를 담금질하고 낯선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철학적 지상명령과 경영학적 처방전을 담아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으로 태어났다.


진성리더가 추구하는 기업경영은 “돈으로 창출할 수 없는 비금전적 가치를 끌개(Attractor)로 삼고 고유한 혁신의 알고리즘을 만들어 제품과 서비스에 반영할 때 고객이 자발적으로 물건을 구매하고 금전적 가치가 따라와 비즈니스를 밀개(Reinforcer)로 뒤에서 추동한다”(37쪽). 진성리더가 끌개와 밀개를 매개로 존재목적을 실현하고 긍휼감으로 고객의 아픔을 치유하는 혁신을 거듭하기 위해서는 경영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영학적 상상력이란 비즈니스 혁신을 통해 돈으로 창출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를 제품과 서비스에 반영하고 이것으로 고객에 싼 가격에 팔아 고객의 고통을 해결하는 역량”(39쪽)이나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돈이 돈을 먹는 자기 공멸의 고리를 끊어내고 선순환의 고리를 복원해 내는 근력”(39쪽)이다. 이러한 경영학적 상상력은 진성리더가 사용하는 두 가지 변화전략, 즉 점진적 변화전략과 근원적 변화전략을 통해서 현실에 구현된다. “점진적 변화는 변화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변화라면 근원적인 변화는 과거의 가정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토대로 환경을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변화여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55쪽). 점진적 변화는 조직에 불이 났을 때 당장 불을 끄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는 수동적 전략이라면 근원적 변화는 앞으로 불이 나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미래 지향적 시스템을 설계하고 작동시킴으로써 요동치는 환경 자체를 바꾸는 능동적 변화”(55-56쪽)다.



정신모형 I이 내비게이터라면 정신모형 II는 나침반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은 진성리더가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정신모형과 연결되어 있다. “점진적 변화는 기존에 성공한 관행을 담고 있는 암묵적 정신모형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업데이트시키는 과정”(60쪽)인 반면 “근원적인 변화란 상상적 죽음에 직면해 찾아낸 존재목적과 사명의 울타리로 미래로 가는 새로운 정신모형의 지도에 기반한 변화”(60쪽)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 모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과거의 암묵적 정신모형을 현실에 맞게 업데이트해서 그려낸 지도를 정신모형 I,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현해야 할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사명의 울타리를 통해 만든 지도가 정신모형 II다”(60-61쪽). “정신모형 I은 꾸준히 업데이트되어야 할 내비게이션의 임무를 수행하고, 정신모형 II는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게 하는 나침반의 임무를 수행한다”(61쪽). 진성리더는 내비게이터를 꾸준히 업데이트 시켜 과거의 지도로 치명적인 지도자의 오판이나 실수를 막아야 할 뿐만 아니라 떨리는 나침반으로 방향감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정신모형 I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거울이고, 정신모형 II는 미래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거울”(98쪽)이다.


“점진적 변화는 정신모형 I을 통해 과거를 현재에 맞게 오래된 새길을 만드는 작업이고 근원적인 변화는 정신모형 II를 통해 미래에서 현재로 이르는 지도를 만들고 이를 통해 존재목적에서 약속한 미래를 실현하는 작업”(61쪽)이다. 진성리더십 책에서 윤정구 교수는 정신모형 I은 삶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를 닮은 모형( Know-How Model)이고, 정신모형 II는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가치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모형(Know-Why Model)이다. 정신모형 I로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영혼의 울림이 오는 각성사건을 경험하면 정신모형 I의 울타리를 벗어나 정신모형 II의 세계로 새롭게 진입한다. 정신 모형 II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인 존재목적이자 이유에 해당하는 사명을 비롯, 사명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열정 발전소인 비전과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의사결정 기준이자 가이드라인에 해당하는 가치가 언제나 조화롭게 정렬되어 있어야 한다. “근원적 변화도 목적을 지렛대로 삼아 점진적 변화를 일관되게 반복해 조그만 차이를 누적하는 과정”(71쪽)이라면 점진적 변화 없이 급진적 변화도 보장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진성리더는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는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해서 마침내 반전을 일으켜 근원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다. “진성리더는 앞에서 이뤄진 과제의 결과가 다음 과제에 초깃값으로 반영되는 변화과정의 반복적 끼워넣기(embedding)에 주목한다. 진성리더는 개입이 끝나는 시점까지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목적의 씨앗을 반복적으로 과업 속에 끼워넣기를 통해 차이”(114쪽)를 키우는 까닭이다.



미시적 전략이 쇄빙선 전략이라면 거시적 전략은 마무리 전략이

망치가 못을 박고 있을 때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다가 손등을 찍었거나 다른 목적으로 활용될 때 비로소 본색이 드러나는 것처럼 “도구는 도구로 정해진 목적에 제대로 이바지할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도구가 자신을 드러낼 때는 잘못된 목적을 위해 쓰일 때다”(81쪽).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리더십이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제대로 사용될 때 리더십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리더십이 경영자의 사욕을 챙기는 도구로 전락할 때는 망치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81-82쪽). 진성리더는 오로지 리더십을 존재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한다. 진성리더십을 발휘하는 진성리더는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을 기반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사명의 울타리가 세워졌을 때 우리의 암묵적 정신모형을 위한 안심지대 울타리를 허물고 더 넓은 곳에 세워진 심리적 안전지대(Pshchological Safety Zone)”(60쪽)를 마련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애쓰는 리더다. “진성리더란 목적에 대한 진실성으로 자신과 구성원을 임파워먼트 시켜 사명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 안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조건으로 구성원을 자발적 협업에 동원하는 리더”(90쪽)다. 진성리더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구성원을 리더로 키워서 리더십이란 말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리더십의 민주화”(106쪽)를 이룩하는 것이다. 진성리더에게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명을 꼽으라고 하면 사명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이를 위해 모든 자원을 최적화해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다.


급진 거북이가 존재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미시전략과 거시전략으로 나뉜다. “미시전략은 산성화 된 조직에 균열을 만드는 쇄빙선 전략이다. 급진 거북이는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으로 미래에 펼쳐진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쇄빙선의 선장이다”(128쪽). 반면에 “거시전략은 성공적으로 초깃값을 벗어났을 때 파레토 최적점을 실현하는 근원적인 변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후속전략”(128쪽)이다. 미시전략으로는 존재목적을 밀알로 만들어서 자신이 하는 과제에 씨앗으로 뿌리는 ‘조용한 반역’, 이전 과제에서 도출된 성과를 다음 과제를 성공시키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는 ‘지렛대 전략’,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을 역으로 제압해 변화를 시도하는 ‘뒤집기 전략’, 경쟁적인 파트너를 협업의 파트너로 바꾸는 ‘스파링 파트너 전략’이 있다. 거시전략으로는 변화의 종착역에 도달한 상상적 체험을 통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우는 ‘선승구전 전략’,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세워야 할 첫 번째 캠프를 높은 곳에 설정하고 여기에 이르는 계단은 최대한 촘촘하게 만드는 ‘베이스캠프 전략’, 급진 거북이를 연합해서 변화를 위한 들불을 일으키는 ‘비밀결사대 전략’, 이원론으로 양분된 사람들을 협업의 파트너로 만들어 변화를 완성하는 ‘동적 역량 전략’이 있다. 미시적 전략은 변화 시작을 위한 초깃값을 만들어내는 쇄빙선(碎氷船/icebreaker) 전략이라면 거시적 전략은 변화 프로젝트의 반복을 통해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었을 때 이 차이를 굳히고 변화를 마무리하는 전략이라고 한다.



상황은 객관적 배경이지만 맥락은 주관적 전경이

     

“진성 리더십은 리더가 상황에 답을 찾고 상황에 적응하는 것을 답으로 생각하는 상황이론(Contingency Theory)이 아니다. 상황을 변화에 더 유리한 맥락으로 만들어 주체적으로 변화를 일구어내는 맥락이론(Context Theory)이다”(267쪽). 상황(situation)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이해되는 객관적인 배경일뿐이지만 맥락(context)은 똑같은 상황도 그 상황을 인식하는 사람의 관심과 애정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부각되는 주관적인 전경이다. 상황이 산성화 된 토양이라면 맥락은 존재목적의 밀알이 씨앗이 되어 구성원 간 밀착된 소통으로 신뢰감으로 물드는 과수원이다. 상황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보이는 환경(environment)이나 배경(surroundings)이다. 상황은 주변에 널려 있다. 똑같은 상황에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남다르게 와닿거나 특이하게 기억된다. 그 상황에 나의 특별한 의미나 의도를 갖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 못 할 사연이 그 상황에 숨어 있어서 특별한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황은 그냥 저쪽에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깊은 관심과 해석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정황(情況)이다. 상황은 화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이전에 도처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광경(光景)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맥락은 무수히 많은 상황 중에서 나의 주관적 관심과 애정의 손길로 포착되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정경(情景)이나 전경이다. 상황은 나와 무관하게 저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관조와 관망의 대상이지만 맥락은 나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관심과 관찰의 대상이다. 상황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맥락은 담벼락 너머에 존재하는 상황이어도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벼락처럼 달려오는 특별한 장소다.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시간에 머물렀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색다른 장소다.


상황과 맥락의 차이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 나오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감정이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감정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다. 익숙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스투디움의 세계로 보인다. 달리 보이는 것 없이 늘 세상과 일상은 정상적으로 보이고 다가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했던 현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당연했던 세계가 다르게 보이면서 불편한 문제의식을 잉태한다. 푼크툼의 세계로 보이게 만든 낯선 개념을 습득해서 그저 그렇게 보였던 세계가 다른 자극으로 나에게 각인되면서 깊은 앎의 상처가 만들어진다. 상황은 스투디움처럼 틀에 박힌 방식으로 바라보니 고리타분하게 다가온다. 길들여진 눈으로 바라보니 여기저기 상황이 널려 있지만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한다. 반면에 맥락은 푼크툼처럼 동일한 상황이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온다. 이전과 다르게 보이면서 색다르게 나를 자극한다. 그 속에는 어제의 나와 다른 또 다른 자아가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다른 사람이 맥락 속에서 어제와 다른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스투디움으로서의 상황이 푼크툼으로서 맥락으로 변신할 때 세상은 의미의 천국이자 배움의 텃밭으로 변신한다.


진성리더는 결국 익숙한 스투디움으로서의 상황을 푼크툼으로서의 낯선 맥락으로 탈바꿈시키는 리더다. 학습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로 작용했던 객관적 배경으로서의 상황을 의미심장한 사랑과 의도성을 반영한 정경으로서의 맥락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도처에 산재하는 상황을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눈길을 보내주고 손길을 내밀면 상황은 맥락으로 탈바꿈을 시도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모든 학습은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맥락적 의미 창조를 일으키는 경험이다. 누구나 상황에서 저마다의 경험을 하지만 그런 경험이 모두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학습경험으로 바뀌지 않는다. 똑같은 경험을 똑같은 상황에서 했어도 그 경험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삶은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만나 특이한 경험을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평온했던 환경이 갑작스러운 변수로 인해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돌변할 때 내가 거기서 어떤 반응을 보여주면서 대처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학습이 일어날 수 있다. 상황을 맥락으로 바꿔 경험하는 삶이야말로 관심과 애정으로 세상을 나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경이로운 기적의 연속이다. 오늘도 숱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거기서 얻은 체험적 통찰력으로 맥락을 재구성하는 탐색과 모험의 과정을 계속해야 되는 이유다.  



진성리더는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을 앓는 시인이


바람이 지나가는 사이 나뭇가지가 휘어진 까닭은 허락도 없이 매달아 놓은 외로움의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햇살이 마실을 나간 사이 나뭇가지에 걸린 한나절의 공포가 하소연을 하는 까닭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호주머니에 담긴 고뇌의 깊이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눈 깜짝할 사이 한 무더기의 시름이 추락하는 까닭은 사소한 추억이 그림자를 만나 찌그러지는 쇠락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기지개를 켜는 사이 줄기를 타고 눈물이 흐르는 까닭은 하루를 살아낸 추억이 기억으로 재생되지 않고 수면제로 전락하는 서글픔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녁이 하루를 마감하는 사이 괴로움을 머금은 나무뿌리의 침묵이 물음표를 잉태한 까닭은 절망의 짐짝들이 철없이 방황하다 불안한 발자국으로 떨고 있는 바다를 건너가기 때문이다. 진성리더는 “시의 언어들이 내딛는 안간힘”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주변을 보살핀다. 살피지 않으면 고객의 아픔을 보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긍휼감으로 무장한 진성리더는 일상은 타성에 젖은 틀에 박힌 기정사실의 세계가 아니다. 진성리더에게 일상은 저마다의 사명감으로 무장한 세계가 소명을 받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존재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영혼의 울림을 듣는 리더다. 진성리더는 장석주 시인이 말하는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5쪽)을 앓고 있는 시인이다. 시인은 역지사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측은지심의 거인이기 때문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데 정작 단 하나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90쪽). 장 그리니에의 《섬》에 나오는 말이다. 진성리더는 보이는 대상보다 보이지 않는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근원적인 변화전략을 상상하고 구상한다. 진성리더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발해하는 온갖 고정관념과 습관적 사고체계를 파괴하고 질문을 던져 확신이 부패하는 걸 방지하려고 노력한다. “시적인 것은 세계를 보는 눈을 교정하는 데서 시작한다”(59쪽).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에 실린 안도현 시인의 ‘세계는 배반하면서 성장한다’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진성리더야말로 세계를 보는 눈을 늘 교정하며 세상과 교감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며 희망의 연대를 구축, 공명의 신명 나는 장을 마련하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한다.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어디로 향하든 자기만의 길을 찾아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다......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단 한가지 뿐이었다”(218-219).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말이다. 진성 리더는 영혼의 종소리를 들으며 사명을 가슴에 품고 소명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급진 거북이다. 급진 거북이는 절망의 절벽에 걸터앉아 암각화를 새겨 넣듯 절치부심하며 고뇌했던 소명과 목적의식을 등댓불로 삼아 까마득한 희망을 잉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자기주장을 담아내는 문장건축노동자다.



진성리더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어떤 책은 읽는 게 아니라 책이 나를 읽는 경우가 있다. 책이 나를 무장 해제시키고 거침없이 나를 파고들어 그동안 축적된 인식의 두께를 사정없이 갉아먹기 시작한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기존 지식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온몸으로 항거하지만 절망은 아무런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안온한 인식의 터전을 저돌적으로 갈아엎는다. 앎의 막다른 골목에서 정말 포위당한 채 처절함을 넘어 처참한 탄식에 눌려 낯선 앎의 미궁으로 빠져들어간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정신모형 I을 갈아엎고 근원적인 변신을 거듭하기 위해 사명과 긍휼감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정신모형 II로 살아가려고 각성한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 바로 이런 각성과 결단에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해 주는 책이다. 스피노자가 예고 없이 뚜렷한 방향감을 갖고 급습해서 나의 정신세계로 침범하고 들어온다. 뇌리에 담긴 기존 논리를 뒤흔들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인식의 주체로 생각했던 나를 변방으로 몰아붙인다. 그때부터 유영만의 《코나투스》는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고 생각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설명을 넘어 세상을 해석하는 주체로 거듭난 것처럼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이 몸을 관통하고 피 끓는 열정에 버무려진 다음 존재 자체의 의미나 이유를 해석하는 틀에 걸러져 차가운 이성으로 관철된 주장이 잠시 머뭇거린다. 마지막으로 갈무리가 된 감정이나 정서들이 스스로 논리를 찾아 일리(一理)들의 행렬을 이룬다. 그 순간 일리 있는 이야기들이 심장에 들어가 세상을 따듯하게 품으며 온기를 잉태한 진리의 빛으로 거듭난다.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영혼의 종소리가 실존감과 긍휼감으로 주변을 비춰주고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헌신으로 뻗어나가게 만드는 올곧은 정신으로 거듭난다. 존재목적을 실현하려는 안간힘이 사명을 만나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출산하는 순간, 나 역시 어제와 다른  진성리더로 새롭게 변신을 거듭한다. 나는 영원히 살아있음의 존재를 증명하며 오로지 진북이 이끌고 진남이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에서 진실을 캐내려는 숭고한 여행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른가 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같다.” 황지우 시인의 ‘서풍(西風) 앞에서’라는 시의 전문이다. 진성리더 역시 박해받는 순교자다. 아니 은사시나무처럼 박해받고 싶어 안달이 나는 순교자다. 급진 거북이로 살아가는 진성리더는 공유된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과 신조를 기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기회비용을 계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가능과 한계가 눈앞에 닥쳐와도 숭고한 목적의식을 믿고 지금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가진 것만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는 우보천리(牛步千里) 방식으로 마침내 성공 사례가 텃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공명의 운동장을 만들고 점점 울타리를 넓혀 구성원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만든다. 지나친 개인적인 욕심이기는 하지만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은 세상의 박해받고 싶은 순교자들이 읽고 감동받아서 아니 박해받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순교자가 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진성리더로 변신하게 만드는 시금석이자 출발점을 마련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문성이란 이름으로 고착된 분과에 안주하는 연구보다는 뜻밖의 질문을 던지면서 다양한 영역을 횡단하며 새로운 '분과'를 창안하는 그런 연구; 사유에 공연한 무게를 싣고서 어설프게 던지는 아카데믹한 형식적 질문보다는 삶을 통찰하는 눈으로 막힌 벽돌을 부숴버리는 강밀한 질문; 어떤 학적.예술적.정치적 업적을 쌓고 지워지지 않을 명예를 얻으려는 욕망이 아니라, 벽들을 막히고 패인 홈들에 갇힌 삶의 흐름을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려는 욕망 등등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삶의 변환을, 낡은 사유와 체제의 전복을, 삶의 방식의 혁명을 시도하려고 한다면, 그게 무어라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466-467쪽). 이진경의 《노마디즘2》에 나오는 말이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에는 뜻밖의 강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진정한 리더십의 비밀과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이 책은 되돌아온 활력과 내일모레에 대해 새로 피어나는 믿음의 환호성이며, 미래와 임박한 모험, 다시 열린 바다, 그리고 다시 허락되고 다시 믿게 된 목표에 대해 갑작스럽게 솟아난 느낌과 예감이 소리 높여 외쳐대는 환호성 바로 그것이다”(24쪽).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말이다. 《급진 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은 우리 모두에게 니체의 《즐거운 학문》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사명과 목적, 비전과 가치로 무장, 근원적인 변화대열에 동참을 촉구하는 책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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