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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Oct 27. 2024

혼자 남겨지는 것

인기 요리 예능 <흑백요리사>에는 화제가 된 장면이 여럿 나온다. 그중 인상적인 것은 백발의 중년 요리사가 팀에서 방출되는 장면이다. 


여러 명의 요리사가 함께 의논하며 요리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팀원 중 한 명을 방출하라는 미션이 내려온다. 이미 준비시간이 많이 지나 방출되는 사람은 부족한 시간 속에서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는 상황. 자원자는 없었고 결국 투표를 통해 해당 미션에서 맡은 역할이 가장 적었던 중년의 요리사가 쫓겨나듯 팀을 나오게 된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요리를 이어갔지만, 이어진 개인 인터뷰에서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말했고, 방송을 본 사람들은 다수에게서 소외되거나 거절당했던 저마다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불쾌한 순간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나 역시 잊고 지냈던 중학교 3학년 때가 떠올랐다. 전년도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다시 같은 반이 되어 단짝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친구가 날 멀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잘못 느낀 거라 믿었지만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당황할 만큼 친구는 점점 더 나에게만 싸늘하게 대했다. 나중엔 대놓고 혹시 내가 잘못한 점이 있는지 사과하고 싶다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친구는 자신은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 없다며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았다. 


상대가 나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다른 친구를 찾아 나설 법도 하건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단짝이 꼭 있어야 했다. 선생님이 둘씩 짝지으라고 했을 때 당연히 서로가 옆에 있어 줄 한 사람, 갑자기 이동수업을 해야 할 때 상대가 자리를 비웠다면 그 부재를 알아채고 서로를 챙겨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새 학년이 시작하고 두어 달은 지난 상황, 친구들은 이미 그런 단짝을 제각각 가지고 있었고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결국 나는 쉬는 시간마다 반에서 탈출해 다른 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교실 안에 있어야 할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나를 거절하는 친구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좌절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전혀 다른 그룹의 다른 친구 A와 새롭게 단짝이 되었고, A와 친하게 지내다 갑자기 혼자가 된 B가 친구 뒤만 쫓아다니던 나의 새로운 짝이 되었다. 낙동강 오리알들의 만남이었다. 불행히도 B와 나는 성향이 잘 맞지 않았고, 반드시 두 명이 짝을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만 함께 있는 사이로 남았다.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B와 단둘이서 호텔 방을 써야 했을 때,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암막 커튼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서 숨 막히게 어색했던 B와의 정적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새롭게 들어간 친구그룹의 활발하고 자유로운 성향도 나와는 잘 맞지 않았고, 그들 사이에서 조용한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나 애물단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졸업여행은 내 기억 속에서 인생 최악의 여행으로 남았다. 



청소년 상담을 하게 되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겉돌거나 친한 친구와 원치 않게 멀어져서 어쩔 줄 몰라하는 학생들의 사연을 자주 접하곤 한다. 대부분의 상담은 학생의 부정적인 감정을 함께 다뤄주거나 사회적 기술을 학습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속 시원한 해답이나 비법을 제공하는 건 불가능하고, 상황이 지지부진할 때마다 괴로워하는 학생의 모습이 과거의 내 모습과 겹쳐 보여 답답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거절하던 사람의 마음을 전혀 모르겠다는 답답함은 성인이 되고 난 뒤 ‘그때는 미안했다’는 친구의 간단한 사과로 일단락이 되었다. 하지만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좌절감은 기억 속에 숨어있다가 비슷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나 날 괴롭혔다. 친한 친구들과도, 동료들과도, 사이가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소원해지거나 나를 뺀 사람들이 더 가까워 보이는 느낌을 받으면 어릴 때의 기억이 날 다시 그때로 잡아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연할 수 없는 건지, 내가 상담하는 어린 학생들이 느끼는 감정을 왜 나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가 미성숙해 보여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대학원 수업에서 흥미로운 논문을 읽게 되었다. 해외 유명 저널에 실린 사회심리학 논문이었는데, 소외된 사람이 느끼는 심리적 반응과 뇌 활동을 분석한 내용이었다. 실험 참가자는 세 명이 공을 주고받는 가상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데, 일정 시점부터 실험 참가자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만 공을 주고받게 된다. 


소외된 참가자의 뇌 활동을 관찰한 결과,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상황에서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실제 신체적 고통을 느낄 때 뇌 반응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경험은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뇌의 특정 영역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입증한 논문이었다.


원래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어서, 소외되고 거절당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만 너무 예민하거나 미성숙해서 힘든 게 아니었다. 연구 결과가 나에게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기분이었다. 연구 결과는 내가 나를 더 이상 한심해하거나 미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흑백요리사>의 방출되었던 요리사는 결국 해당 미션의 불리함을 이기지 못하고 탈락한다. 방송이 끝난 뒤 그는 탈락하고 집에 가는 길에 속상해서 펑펑 울었지만, 방송 이후 딸이 ‘멋지게 싸웠다, 자랑스럽다’고 보내준 문자에 감동받았다고 고백한다. 


나의 경우에도 관계에서 소외되고 상처받는 경험이 크고 작게 반복되지만, 또 다른 인간관계에 소속되어 다시 좋은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 회복되고 괜찮아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나에게 상담을 위해 찾아오는 학생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을 알아 직접 말하진 못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깨닫기를 바란다. 지금, 이 관계에선 소외되고 상처받지만, 결국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다른 좋은 관계에서 회복될 것이라고. 그리고 네가 부족해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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