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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원의 초고들 Sep 23. 2023

아뇨, 기숙사에 재고만 쌓여있습니다

‘제발…’. 왼쪽 손으로 딸깍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누르고 검은 화면에 떠오를 숫자를 기다린다. 오후 세 시 십 분이다. 내가 지금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버스가 이르쿠츠크에서 알혼섬으로 출발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지났다. 알혼섬에 도착하려면 아직 세 시간이 더 남아있다. 그새 왼쪽 손에 땀이 차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 했다. 버스는 다행히도 흔들림 없이 잘 가고 있다. 그래서 이 버스에는 손잡이가 없나 싶다. 대신 엄지손가락이 덜덜거리는 오른손에 마이크가 쥐여있다. 아무 말이라도 내뱉어야 하는데 눈만 껌뻑인다. 눈 뒤쪽으로 머릿속을 마구 헤집는 중이다.


“알혼섬은 당일치기가 … 힘들어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라는 친구의 조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는 친구가 아니라, 스물다섯 명의 여행객이 버스 좌석에 앉아 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이르쿠츠크 현지 가이드다. 상대역은 다양하다. 할아버님, 할머님, 4인 가족, 교수님들 그리고 한 명의 젊은 사람. 어르신의 선글라스 속 눈이 나를 향하는지 감겨있는지 모르겠지만, 선글라스에 반사된 햇빛이 갈수록 나를 덥게 만든다. 왼쪽 손목으로 땀이 맺힌 이마를 쓸어올리고 양쪽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앞니를 내보인다.


여행객에게 만만히 보이지 않기 위해 가이드 경험이 꽤 많다고 말하라는 신 사장님 말은 따르지 않았다.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이미 말해주고 있다. ‘오늘 현지 가이드 아르바이트가 처음입니다’,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아직 1년이 채 안 됐습니다’, ‘러시아어는 조-금 할 줄 압니다’. 통제 불가능한 성대를 숨기고 싶어 최대한 미소를 지어본다. 미소는 내가 지금 가진 말 중 가장 쓸만하다. 내 장기가 통했는지 여행객 한 분이 버스 통로를 따라 화답해 준다. “러시아에 관해 설명 안 해줘도 돼요. 가이드님 얘기해주세요. 러시아에 왜 왔어요?”


청운관 2층 강의실 의자에 엉덩이를 한 학기만 더 붙이고 앉아서 있으면 됐다. 그러면 햇빛 쨍쨍한 어느 날 학사모를 쓰고 부모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동기가 터뜨리는 플래시에 웃을 수 있었다. 먼저 졸업한 선배 형들처럼 인스타그램에 연수 사진을 올리고, 더 시간이 흐르면 결혼사진도 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대한이와 형선이 입에서 “회사를 위한 하나의 볼트가 된 기분이야”, “그럼 난 너트”라는 소리가 진동했다. 그리고 학사모를 쓴 그 쨍쨍한 어느 날 “치즈~”소리를 듣고 찡그릴 왼쪽 눈이 떠올랐다. 입은 웃고 있지 않고.


비뚤어진 표정을 바로잡고 싶었지만,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0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바닥부터 ㄱ,ㅗ,ㄷ 그리고 ㅂ,ㅣ,ㄹ를 하나하나 쌓아 올리면 무언가 분명히 될까 싶었다. 러시아는 이 조건에 딱 맞았다. 지체 없이 액셀을 밟고 준비되지 않은 여정을 떠났다. 누군가는 내 움직임을 보고, 차 번호표를 달듯이 ‘도피’라는 단어를 유학 앞에 붙여줬다. 그럴 때마다 감시카메라에 찍힌 것처럼 내 본심을 스스로 의심했지만, ‘독립’이라는 표지판만 보고 앞으로 나아갔다.


“공부도 하고,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 왔어요. 이르쿠츠크는 러시아 다른 지역에 비해 유행이 약 1년 정도 늦어요. 그래서 저는 이미 타지역에서 잘 팔리는 한국산 화장품을 한국에서 수입해 와요. 그리고 SNS랑 저희 러시아 사이트를 통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 “오, 잘 팔리고 있나요?”

“아뇨, 기숙사에 재고만 쌓여있습니다. 하하하”

- “하하하”

“혹시 필요하시면 집에 가실 때 드릴게요.”   

“아뇨, 괜찮아요. 화이팅이에요. 하하하”


“……”


사실 한국산 화장품 판매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됐을 때 떠오른 아이디어다. 도전해 보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 이르쿠츠크에 와서 시도한 일이다.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일이다. 반대로 이 첫번째 가이드는 울렁거림과 함께 새벽 세 시까지 잠을 설치며 준비했다. 하지만 수십 장의 하얀 에이포 용지에 담겨있던 검은 것들 중 단 하나도 내 머릿속을 부유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붕어처럼 입을 다물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완벽하게 준비된 일은 내 생에 없었고, 반대로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일도 내 생엔 없었다.


오후 여섯 시 반이다. 스물일곱 명을 태운 버스가 알혼섬 앞 선착장에 종착했다. 비가 올 지도 모르니 우산을 챙겨달라고 여행객들에게 전달했지만, 하늘은 버스에 서있던 나의 머릿속보다 더 깨끗하다. 차례차례 버스 화물칸을 활짝 열어 캐리어를 꺼내 들었다. 누구는 왼손으로 누구는 오른손으로 탈탈탈 각자의 짐을 끌며 여객선으로 걸어간다. 내 오른손에 있던 마이크는 두고왔으니 대신 큰 소리로 외친다. “이 호수만 건너면 알혼섬입니다. 다 왔어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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