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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원의 초고들 Sep 26. 2023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모자는 어딨어?” 만나자마자 까쨔는 반가운 인사 대신 걱정스럽다는 듯이 잔소리를 내뱉었다. “가방에 있어. 날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안 썼어.” 나는 머리를 살짝 긁적이며 대답했다. “너 우리 할머니가 봤으면 아주 혼쭐을 냈을 거다.” 부릅떴떤 눈을 가라앉히며 까쨔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오늘 우리가 할 산책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긴 산책이 될 거야. 그러니까 그때는 모자 꼭 써야 해.” 그리고 나와 친구들은 이르쿠츠크 역으로 들어섰다.


이르쿠츠크역 안으로 들어서자, 남색 제복을 입은 경찰들과 검은 안내전광판이 보였다. 러시아답게 전광판은 큰 직사각형으로 단순했다. 화려한 광고 하나 없이 빨간색으로 역 이름, 도착시간을 내비쳤다.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 익숙한 도시 이름이 보였다. “쬼나야 빠디가 우리가 갈 역이야. 20분 남았네.” 순간 까쨔는 전광판 세 번째 줄에 쓰인 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국말로 어둡고 깊은 골짜기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역이었다.


우리는 바이칼을 횡단할 생각이다. 구글링으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바이칼 횡단 열차라는, 바이칼 주변을 도는 열차가 오늘 우리의 교통수단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바이칼 호수를 가로질러 간다. 그렇다고 보트를 탈 생각은 아니다. 두 발로 한 발씩 걸어갈 것이다. 깡깡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를 각자 챙겨온 장비와 함께 다 같이 지나갈 계획이다. 그래서 누구는 등 뒤에 스키를, 누구는 스케이트를 챙겼다.


12월부터 바이칼 호수는 얼어붙기 시작한다. 바이칼은 4월까지 평균 두께 약 1.5 ~ 2미터가 되는 얼음을 걸쳐 입고 겨울을 지내고, 5월이 되면 녹기 시작한다. 덕분에 표면이 깡깡 얼어붙었을 때, 바이칼 호수에 존재하는 유일한 유인도인 알혼섬까지 배가 아닌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주변 마을에선 호수를 스케이트장으로도 이용한다. 그리고 매년 3월 표면이 가장 두껍게 얼어붙었을 때, 바이칼을 횡단하는 행사가 진행된다.


우리는 15km짜리 평범한 코스를 선택했다. 예상 소요 시간은 4시간쯤 되었다. 호수에 발을 올리기 전, 우리는 둘러앉아 간단한 식사를 했다. 러시아식 빵 한 조각에 두껍게 썬 치즈, 햄, 그리고 오이를 올려 먹었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컵에 홍차를 채워 마셨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을 위해 저번 주에 구매한 스케이트를 가방에서 꺼내 신었다. 스케이트가 뻑뻑해 걱정했지만, 호수 위에 찍힌 자국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두 시간 정도 지났다. 우리는 숨도 고르고 차를 마실 겸 바닥에 가방을 깔고 앉았다.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높은 건물이며, 신호등이며, 광고판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자동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호수 저 끝에 눈이 쌓인 어두운 초록색의 언덕이 보였다. 하늘에는 전보다 편하게 떠다니는 구름이 있었고, 주변에는 서로를 부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둡게만 보이던 언덕이 사라졌고 우리는 드디어 얼음이 아닌 땅을 밟았다. 불필요해진 스케이트를 갈아 신으니, 까쨔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마을 사람들이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두었다. 감자 퓨레, 메밀밥, 닭고기였다. 식사를 받아 들고 빈 바닥 아무 곳에 앉았다. 음식물을 씹으면서 왔던 길을 돌아봤는데 시작점이 점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땠냐”고 까쨔가 물었봤고,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하길 잘했다.”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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