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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Aug 13. 2023

넘어진 게 아니라 조금 휘청거렸을 뿐

<인생의 일요일들> 3주 차.

    가본 적 없는 도시를 여행하고, 본 적 없는 장면들을 바라본다. 내 앞에는 사무실에 버려진 꽃이 있었다가, 물속에 잠긴 고대도시가 있었다가, 신혼여행을 하는 중국인들이 있었다가, 찌뿌둥한 일몰이 있었다가, 끝에는 길에 쓰러진 당나귀가 있었다. 당나귀에게 다시 한번 살아볼 기회를 가졌는지 물어봤다가 이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게 묻는 거구나 하고 깨닫는다. 


    가본 적 없는 도시와 본 적 없는 장면들에서 쓰러진 당나귀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이후에 실제로 당나귀가 어떻게 되었는지 여기서 '실제'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본 적 없는 장면을 보듯, 당나귀가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단 듯 걷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을 당나귀의 모습. 그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넘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조금 휘청거렸던 거였던 나날들. 대학원에 추가합격했던 것도, 넘어진 김에 그냥 더 넘어져버리자 하고 아무렇게나 보았던 스튜디오 면접도, 될 대로 돼라 하고 아무런 계획 없이 스튜디오를 그만둔 것도, 이 영화 대신 저 영화를 보자 했는데 저 영화가 더 재밌었던 것조차도. 종종 있었다 생각했는데, 무수한 두 번째 기회들로 지금의 내가 있다. 


    참 이상하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고 얘기하는데 왜 때때로 인생은 무수한 두 번째 기회들로 이루어진 것같은지? 놓쳐버려서 아쉬운 것들을 다시 시도해 보는 두 번째 기회보다, 놓쳐버려서 아쉬운 것 대신에 만난 많은 것들이 나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하고.. 다른 길로 도망치며 얼버무리는 일요일.






사람들 사이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아주아주 보편적인 욕망이 있어요. 오래 사지는 것이냐고요? 글쎄요. 그것보다 제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두 번째 기회'에 대한 욕망이에요. 내 삶에 다시 한 번 기회를 가져볼 수만 있다면? 놓쳐버려셔 너무 아쉬운 것을 다시 시도해볼 수 있다면? -27p


'당나귀야, 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알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볼 기회를 가졌니?'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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