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구

항상 함께 있었으나 항상 다시 시작하는

by 슬기

사실은 그림을 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 미술을 전공한 담임선생님은 물감으로 색칠한 내 꽃병 그림을 보고 미술을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어영부영 안 했다. 중학교 1학년, 장롱에서 아빠의 오래된 펜탁스로 사진을 찍었다. 재밌는데? 싶었다. 중학교 2학년, 짝꿍은 그림을 잘 그렸다. 미술 시간 미술 선생님은 걔 그림 그만 쳐다보고 너나 잘하라고 했다. 그 친구는 충남 예고를 갔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구나 알게 됐다. 중학교 3학년, 먼 친척 오빠가 안양예고 사진과를 다닌다고 했다. 그림이 안된다면 사진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이 무서워서 안양예고에 원서를 못썼다. 고등학교 1학년, 중앙대 사진학과가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사진학과를 갔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놀았다. 노는 게 재밌었다. 그냥 휴학을 해버렸다. 집에 누워만 있다가 복학 전 얼떨결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가야 했는데, 마음은 제주도에 머물러서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삼 학년 일 학기.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겨우겨우 과제로 제주도에 있는 마음을 풀어내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에는 바다가 있어서 자그마한 틈만 보아도 자꾸 바다가 보여요. 학기가 끝마칠 무렵 교수님이 흘리는 말로 ‘이제 좀 작업자 같네’라는 말을 했다. 그 말 한마디가 나를 작업하는 사람으로 이끌었다.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매료되어서 시간을 쏟아부었다.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것들, 공간과 마음과 관계들에 라벨을 붙이고 공간을 찍고 때로는 사람들을 찍고 그 사람들과 관련된 사물을 찍고 엉켜진 실타래 같은 마음을 풀어내며 책을 만들고,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문장을 쓰듯 사진과 사진을 이어 붙이며 책을 만들었다. 언제까지고 이런 시간들이 작업들이 계속될 줄 알았다. 현실을 마주하기 전까지.


대학을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쉬다가, 대학원을 갔다. 한 학기 만에 휴학을 반복하다가 제적당했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자꾸 나이를 먹었다. 현실의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내가 나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다. 사진학원 선생님을 했다. 돈을 조금 모아 리코 GR2를 샀다. 이때까지만 해도 작업을 계속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돈은 더 많이 필요했다. 스튜디오에 다녔다. 오 개월 한번, 육 개월 한번. 사진을 찍어서 돈을 버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작업과는 전혀 다른 일들을 했다. 눈치를 보면서 자꾸만 작아졌다. 작업을 하던 나는 커다랬는데. 자꾸자꾸 작아져서 나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 찍는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사진뿐이었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만 어쨌거나 사진과 관련된 리터칭 일을 하기로 했다. 이년 하고도 몇 개월 정도 더 하우스 리터쳐로 스튜디오를 다닌 후 그만뒀다. 육 개월 다닌 두 번째 스튜디오에서의 인연으로 지금의 회사에 오게 됐다. 운이 좋았다. 지금의 나는 나를 키우기 위해 리터칭 일을 삼 년 하고도 사 개월째 하고 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를 꽤나 잘 키우고 있다 생각하고 있다. 첫 스튜디오를 다니고 팔 년간 일어난 일들. 리코를 사고 거진 구 년간 있었던 일들.



그 시간 동안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할 때마다 작업이 떠올랐다. 사진이 마구마구 찍고 싶어졌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풀어내고 싶은 마음. 더 이상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만. 힘든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작업이 떠오른다. 리코 GR2로 엮이는 작업들. 누구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있었고 그 누군가와 자꾸만 이 카메라가 엮이는 상황들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면, 요즘 나는 다시 나의 지구로 사진을 찍고 있다는 거다. 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눈에 걸리는 것들을 담는다. 사진과 사진을 이어 붙여 누군가를 떠올리고, 떠나보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게 닿았던 것, 지금은 내게 닿지 않는 것, 그리고 항상 내 곁에 있는 이 카메라. 엉켜진 실타래 같은 마음을 이야기를 언젠간 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찍고 또 찍는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꼭 닿았으면 하다가도 때로는 인연이라면 다시 닿지 않겠나 체념하면서. 항상 내 곁에 함께 있었지만 항상 다시 시작하는 나의 지구로 찍고 또 찍고 엮는다.



2025.01 나의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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