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적응

그리고 친구

by 정두부

앤소니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다. 내가 거실에서 잤기에 그는 첫 밤부터 양해를 구했다.
“준비하느라 널 깨울 수도 있어.”


그 예상은 다음 날 아침부터 빗나갔다. 나는 늦게 잤는데도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시차 적응이 안 된 것 같았다. 하긴 일주일 전만 해도 중앙 아메리카에 있었으니 리듬이 깨지는 것도 당연했다. 알람이 울리는데도 앤소니가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내가 그를 깨웠다.

앤소니가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씻을 때 화장실에 있는 라디오를 켰고, 나와서는 커피를 내리고 한 잔을 마신 뒤 출근을 했다. 정해져 있는 하루의 시작인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멋있어 보여서 한국에 돌아가면 화장실에 라디오를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앤소니가 떠나고 나서도 비슷한 잡상이 계속되어 한참 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 개운하게 깬 건 또 아니어서 뒤척이다 겨우 잠든 뒤 오후 2시가 돼서야 나갔다.
시차는 생각보다 극복하기 어려웠다. 일찍 일어났지만 늦게 시작하는 하루가 계속됐다.


밖을 다닐 때는 파리로 출장을 자주 다니는 친구의 조언을 빌렸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책방이나 카페, 산책 코스를 갈 수 있었다. 그냥 거닐 뿐인데도 버스킹 공연이나 멋진 커플, 패션 센스 넘치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한 게 문제였다. 오전을 통째로 빈둥대다 나오니 금세 해가 졌다. 볼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아 마음이 급했다. 노력해봤지만 일찍 자건 늦게 자건 너무 빨리 눈이 떠졌다. 파리에 도착한 지 열흘이 다 되도록 같은 싸이클이 반복됐고, 잠을 못 다룬 하루는 항상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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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소니의 친구들이 놀러 오기로 한 날이 됐다. 그들은 7시에 집으로 온다고 했다. 나는 그날도 늦게까지 몸을 일으키지 못해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세 시간은 금방 갔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서 고민이 커졌다. 보려 했던 것들을 다 못 봤기 때문이다.
결국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내고 마레 지구까지 둘러보고 난 뒤 9시가 돼서야 돌아왔다. 두 명의 친구가 와 있었다. 이름은 베아트리체와 나탈리. 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고 앤소니와는 대학에서 만났다고 했다. 나도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매번 늦게 나가는 걸 아는 앤소니가 오늘은 몇 시에 나갔냐 물었고 나는 4시라고 답했다. 앤소니는 이 친구 방금 일어났다며 놀렸다.

나는 초면이며 이방인이고 셋은 오래된 친구인데도 우리의 대화는 매끄러웠다. 내가 스타벅스에 다닌 이야기가 또 나왔고(…) 친구들은 같은 충고를 했다. 그러면서 농담 섞인 어조로 파리의 식문화가 얼마나 우아한지를 설명했다. 입으로 음식을 가져갈 때마다 이 와인은 어떤 지방의 것이고 이 치즈는 어떤 것이고 하는 설명도 따라왔다. 내가 안주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프렌치 체면이 있다며 엉망이었던 접시를 뺏어가 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웃었다.

취기가 오르자 여느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그렇듯이 분위기가 휙휙 바뀌었다. 파리의 어떤 두 지방이 합쳐지는데 다양성이 훼손될 거라는 걱정이나 샤를리 엡도 테러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다가도 베아트리체와 나탈리의 학창 시절 기억이나 영화, 여행, 이상형 얘기가 나왔다. 정해진 주제가 없는 이야기에 모두가 웃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자리가 믿을 수 없이 편했다. 외국인들과의 대화가 –영어가 유창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편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대학 친구들을 만난 기분이었다.
새벽 한 시쯤 되어서는 속에 묵혀뒀던 이야기까지 꺼낼 수 있었다. 그들은 이렇다 할 조언이나 해결책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들어주었다. 나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따뜻함에 취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떠들었다. 베아트리체와 나탈리는 막차도 포기하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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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여행한 적이 두 번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여행 이후 다시는 혼자서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무리 좋은 풍경을 보고 멋진 경험을 해도 나눌 사람이 없다면 아무래도 허전하고 심심했다. 숙소에 너무 일찍 들어가면 주인이 이상하게 볼 까봐 시간을 때우는 게 일이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렸구나 싶지만, 혼자라는 기분이 되게 버거웠던 것 같다. 혼자이면 쉽게 지치니까. 떠오르는 고민도 혼자 붙잡아야 하고 뭐든 삼켜버려야 하니까. 그리고 마음이 불안하면 꼭 잠이 안 오거나 피곤해지거나 하니까. 하지만 혼자 여행한다고 내내 혼자일 필요는 없었다. 혼자이지 않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커피를 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라디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앤소니는 오늘은 늦게 일어났네. 하고 말했다. 나는 좀 더 자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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