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고픈 저녁
"일기는 나만 본다고 생각하고 쓰는 글이지만, 진짜 내 밑바닥까지는 못 써.
결국 일기도 누가 읽을 거라고 생각하고 쓰는 글이야."
한 때는 작가를 꿈꿨지만 오늘은 경찰행정학 책을 끼고 독서실에서 생일을 맞은 내 동생이 한 말이다.
사람은 일기장에서 마저도 솔직하지 못하다. 기왕 솔직하지 못한 일기를 쓰는 김에 다른 사람도 다 볼 수 있는 이곳에 공개적인 일기를 쓰려한다. 제목은 '펼쳐진 일기장".
나무에 전구가 둘러지고, 곳곳에 캐럴이 흘러나오는 시즌이 올해도 돌아왔다. 추운 날씨와 설레는 따뜻함이 함께 하는 연말이다. 묵은해에게 시원섭섭한 안녕을 보내고 새로운 해에게 반가운 안녕을 건넬 준비를 해야 한다. 기분 좋은 소란함이 있는 이 시기에 나는 요즘 무기력의 끝을 달리고 있다. '인생 노잼 시기'라고들 부르는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터는 하루가 바쁘면 하루가 한가한 채로 퐁당퐁당 징검다리를 건너는 중이고, 퇴근 후의 일상은 캄캄한 방 안에서 외톨이가 된다. 저녁 6시 즈음 방의 불을 끄고 빔 프로젝터 전원을 켠다. 좁은 방에 억지로 건 스크린 위로 방탄소년단의 자체 예능 프로그램인 <달려라 방탄> 이 재생된다. 일곱 명의 멤버들이 함께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에피소드를 고른다. 나는 그들의 화려한 퍼포먼스 영상보다 이웃집 동생들처럼 어울려 노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는 것을 즐긴다. 나의 욕구가 반영된 것일 테다. 우정보다 찐-한 친구들과 맺고 있는 그들의 관계가 부러운 것이다. 툭툭 던지는 농담과 실없는 장난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웃어재끼는(?) 일곱 명의 멤버들을 보면서 나도 내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방탄소년단의 우정을 간접 체험하는 것보단, 내 친구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를 선택했다. 편하게 연락해서 차 한 잔, 술 한 잔을 제안할 친구가 없는 빈약한 연락처 목록을 보며 잠시 씁쓸해졌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가까이 거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소란한 연말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한 명의 동지를 찾았다. 외로움의 주파수가 맞았다며 한참 수다를 떤다. 한 동네에 살면 얼마나 좋겠냐며 물리적 거리의 아쉬움을 토로한다. 1월에 이사할 집에서의 서른 맞이 축배를 기약하며 전화를 끊는다. 잠시나마 무장을 해제하고 편안한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기운이 충전된다.
또 다른 친구와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무료한 일상에 환기를 시키기에 연애도 꽤 좋은 방법이지. 1인 가구의 삶에는 무료한 일상과 이겨내기 위한 분투가 기본 옵션으로 딸려있는 모양이다. 어느새 핸드폰으로 치고 있는 메시지를 말하듯이 소리 내어 내뱉고 있는 나를 본다. 수다가 많이 고프구나, 너. 친구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지만, 인생의 비슷한 지점을 지나고 있는 이들끼리만 통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 말이", "맞아, 맞아 나도 그래.", "우리가 서른이라니, 실화?" 하며 쿵, 하면 짝, 하는 수다가 그립다. 삶의 무게가 조금씩 더해지는 29.9세의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마주할 수 있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고픈 저녁이다. 오늘은 연락을 건네지 못한 친구들의 얼굴이 동동 떠오르는 저녁이다.
+) 1인 가구의 외로움을 나눈 친구의 조언을 받아 집 밖으로 나왔다.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 시간이 마음에 든다. 잔잔한 캐럴이 흐르고 빨간 산타 양말이 걸린 카페에 앉은 오늘 저녁의 나는 따뜻한 연말 시즌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외로움을 티내지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