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봄 마중 여행

우연이 주는 선물의 기쁨을 알다

by 키파

매년 2월엔 혼자서 짧은 여행을 떠난다. 나의 속도에 맞춰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으로 충전하며 시작이 몰려있는 3월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매 여행마다 나름의 주제를 정해서 가는데 올해는 ‘입춘’이었다. 24 절기를 꼬박꼬박 챙기는 편은 아니지만, 김신지 작가님의 <제철 행복>을 읽고 나서는 달력에서 지나치던 작은 글씨의 절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2월 4일이 입춘의 시작, 여행 날짜는 그때에 맞추었다. 그렇다면, 목적지는? 봄 마중을 하려면 남해나 통영처럼 남쪽으로 내려가는 여행을 가야 하지 않겠나 싶지만 되려 위로 올라가는 곳을 선택했다. 입춘의 대표적인 풍속인 입춘첩이 여전히 남아 있을 법한 동네, 서울 ‘서촌’으로. 여행 바로 전날, 때늦은 대설주의보로 서울에는 함박눈이 왔다. 봄마중 여행이 아니라 눈 구경 여행이 되려나 하며 기차에 올랐다. 다행히 내가 서울에 머문 기간 동안 날씨는 온화했다.


나는 여행을 가기 전, 가보고 싶은 장소들을 지도 어플에다 미리 빽빽하게 표시해 둔다. 그 장소의 메뉴나 분위기, 가는 길까지 거리뷰 기능을 켜서 답사한다. 말이 안 통하는 해외로 떠나는 여행도 아님에도 헤매거나 실패하는 불확실성을 만들고 싶지 않은 불안과 완벽주의가 만든 행동 양식이다. 이런 계획 세우기의 장점은 충분한 정보로 지나칠 수 있을 법한 곳의 경험을 빼놓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예상치 못한 발견이나 우연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정한 올해의 키워드가 ‘틈’인데 정확히 반대로 거스르는 여행 계획이었다. 매 끼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이동할지를 찾아보며 정보의 바다에 허우적거릴 때마다 ’그만 찾아보자. 그날 끌리는 대로 한 번 가보자.’라고 스스로에게 워-워-를 외쳤다. 그리고 이번 여행은 계획에 없던 우연이 만든 장면들에서 행복과 영감을 느꼈다. 입춘 여행의 선물들이다.


첫 번째 선물, 방명록의 글.

내가 묵은 한옥 숙소는 1인 여성 전용이었다. 방명록에는 빼곡히 자매님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일기장과 읽을 책을 챙겨 왔지만 그곳에서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다른 날, 같은 곳에 머문 사람들의 삶, 여행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별, 퇴사, 휴식. 서로 다른 이유로 이곳에 모인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염원하는 공책 속의 사랑스러운 연결이 따스해서 첫 장부터 마지막 장 까지 꼼꼼하게 읽었다. 최승자 시인의 시 구절도 여행 기념품으로 담아왔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두 번째 선물, 입춘첩.

미리 계획했던 북카페에 가려다 어느 책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한 권의 책만 큐레이션 하는 특이한 콘셉트였다. 책방의 이름은 ‘이상서전’. 흰 벽을 배경으로 책과 음악, 영상이 마치 전시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잠시 머물러 책을 보고 있으니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셨다. “오늘 입춘첩 써주신다는 sns 보고 왔어요.” 책방 지기님이 화선지와 벼루, 붓을 꺼내신다. 이 무슨 운명 같은 우연인가. 입춘 여행에 입춘첩을 써주는 책방이라니. “저도 한 장 받아갈 수 있을까요?” 나로선 큰 용기를 내었고, 나의 용기는 정갈한 글씨로 써진 입춘첩으로 돌아왔다. 책방 지기님이 먹을 갈고, 입춘대길 건양다경 여덟 글자를 정성스럽게 써주시는 동안 서촌까지 입춘 여행을 오게 된 사연을 들려드렸고. 여행의 주제에 딱 맞는 기념품이 돼서 기쁘다는 말씀도 얹어주셨다. 마침 절기를 챙기는 분이신 것 같아 말씀드린다며 오늘부터 절기마다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시면 신청하라 권해주셨다. 바로 신청했고, 입춘 편지에 이어 며칠 전 우수 편지도 받았다. 프롬프트 몇 자면 입춘첩도 AI가 뚝딱 생성해 줄 시대에 아직 절기를 챙기고, 입춘첩을 써 붙이는 비슷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잘 구겨지는 화선지를 고이 들고 다니다 우리 집 현관에 소중히 붙여주었다. 서촌에서 온 화사한 봄기운이 우리 집에도 깃들었다.


세 번째 선물, 경복궁 돌담길 산책

야심 차게 예약해서 다녀온 미슐랭 식당의 저녁 식사는 기대 이하였다. 미식도 식구가 있어야 미식이 된다. 함께 맛에 대한 감상을 나눌 이가 필요했다.

다소 실망스러운 식사를 하고 괜히 더부룩해진 배를 문지르며 산책에 나섰다. 경복궁 주변을 밤에 걸어보긴 처음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궁의 돌담길은 고즈넉함과 권리를 찾는 사람들의 신명남이 함께 채우고 있었다. 첨단과 전통이 공존하는 광화문 일대가 가장 서울스럽다고 느끼는 풍경이다. 그 풍경을 배경으로 산책하고, 뛰며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 비일상의 시간을 보내는 나도 껴서 걸었다. 복잡하고 비싼 서울의 삶이 좋아 보였던 드문 순간이었다. 광화문 지붕은 밤에는 그 화려함이 배가 되었다.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름다운 광화문 야경을 배경으로 또래의 청년들이 점프샷을 남기려 연신 뛰어올랐다. 나는 그 모습을 최대한 잘 담아주고 싶어 연신 셔터를 눌렀다. 짧은 마주침이었지만 나에게 전달된 기분 좋은 에너지가 더부룩한 속을 달래주었다.


올해는 절기를 챙기며 지내보려 한다. 사계절보다 더 섬세하게 계절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를 느끼면서.

홀로 다녀온 여행에서 챙겨 온 많은 단상과 영감들로 새봄 맞이를 했던 나의 입춘 이야기.

서촌에서 받은 세 가지 입춘 선물. 해피 입춘!
서촌에서 만난 입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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