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븐에서 갓 구워 나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린아이의 포동포동한 볼처럼 말랑거리고 부드러운 카스테라를 먹어본 적 있나요?
장담컨대 유명한 빵집에서 사 먹는 카스테라도 우리 집 오븐에서 갓 나온 카스테라의 맛을 이기지 못한다. 달달한 냄새가 코를 마비시키고 손 끝에 닿은 뜨겁고 몰랑거리는 카스테라를 내 맘 내키는 대로 툭 떼어서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행복. 우리 집 카스테라 레시피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갓 나온 음식이라맛있다.
이 토실토실 아기 엉덩이 같은 카스테라의 식감을 잘 구현하려면, 달걀물을 거품기로 쳐주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머랭'이 풍성하게 일어나야 한다. 이 머랭을 잘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머랭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알면,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귀찮아서 안 할 뿐이지)
집에서 카스테라를 만들어 먹게 된 건 사실 얼마되지 않았다. 결혼 초창기에 밥솥으로 카스테라를 쪄서 해 먹었는데,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맛본 카스테라는 그냥 카스테라 떡이었다. 핸드믹서기 없이 수동 거품기로 머랭을 치다보니 거품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했더니,빵이아니라 떡이 되어버렸다.
포슬포슬한 카스테라를기대했는데 쫀득쫀득한 떡이라니!!! 개인적으로 떡도 좋아하지만, 떡은 떡이고 빵은 빵, 엄연히 장르가 다르다.
어쨌든 떡과 빵의 장르를 가르는 비밀은 머랭에 있다고 본다.
잠깐 머랭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에게 설명하듯 가볍고 쉽게 설명해 보자면,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두고(제빵 용어로 '별립법') 각각을 거품기를 사용해 강력한 힘으로 반복적으로 때려서(휘핑, whipping) 섞어주는 게 기본이다. 달걀흰자는 90% 이상이 물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단백질인데, 거품기로 빠르고 강하게 쳐주면, 손에 손 잡고 있던 물 분자들 사이가 느슨해지거나 끊어져서 그 사이에 공기가 들어가고(거품이 생기고), 마찬가지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던 여러 개의 단백질들이 느슨해지고풀리면, 풀어진단백질 사슬들이 서로 밀고 당기고를반복하다가3차원의 그물망을 만든다.(정전기적 인력과 척력)이때 물을 좋아하는 단백질(친수성) 꼬리에물분자가 붙고,사슬들이 만든 그물망에 공기가 갇히면서 스펀지 같은 머랭이 만들어진다. 덧붙이자면 휘핑 초반에 거품이 보글보글 생기고 나면 분량의 설탕을 나누어 넣어주며 휘핑을 하는데 설탕이 머랭의 스펀지 구조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준다.(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아래 블로그를 방문해 보시길..⬇️⬇️
사실 맛있는 카스테라의 비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서 만든 머랭이 풀어지지 않도록 반죽을 빠르게, 골고루 잘 섞어야 한다는 것, 카스테라 반죽을 팬에 넣고 탁탁 쳐서 반죽 속에 남아 있는 기포를 제거해 주는 것, 알맞은 온도에서 최적의 시간 동안 열 샤워(굽기)를 해주는 것 등 따지고 보면 킬링포인트가 한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일단 머랭만 잘 만들어지면 나머지 과정은 반복- 반복을 통해 익숙해질 테고 '카스테라 만들기가 제일 쉬웠어요~'하게 된다.
그럼 생각을 해보자.
달걀흰자를 핸드믹서로 블렌딩 할 때.빠르게는 5분 안에 예쁜 머랭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시간 동안 달걀흰자들은, 아니 흰자 속 물분자들과 단백질들은 얼마나 많이 때림(?)을 당할까(whipping).
5분 동안 최대 6,000번을 때림을 당한다. 사람이 이 정도 맞는다면 최소가 혼수상태일 텐데, 달걀흰자는 6,000번 정도 맞고서 자신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화시킨다. 앞서 말했듯, 물리적 화학적 구조 변화이지만, 이러한 자기희생적 상태변화를 통해 우리에게 포슬포슬 탱글탱글한 식감을 선사해 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렇게 따지고들 자면 세상 만물 모두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만, 유난히 머랭에 꽂혀 머랭을 통해 삶의 단면을 비스듬히 들여다보려 한다.
살아보니(이제 불혹입니다) 꽃바람 날리는 좋은 날들도 참 많았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어도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를 맨몸으로 때려맞는 듯한 날들도 많았다. 눈물 나게 기쁘던 날들도 많았고, 눈물이 마르지 않게 슬프던 날들도 많았다. 지나간 일들이지만 그때의 감정들과 경험들은 고스란히 남아 얽히고 얽혀 내 인생을 더 촘촘하게, 그러나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나는 소리 내어 크게 웃을 수 있고, 툭하면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 수 있으니 나는 예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더 유연해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인생의 풍파에한 대 맞으면, '어디 더 세게 때려봐!'라고 달려들 때도 있고, 견딜만하면 '이만하길 다행이야'라고 안도할 때도, 그냥 툭 털어버릴 만하면 '뭐 이 정도쯤이야' 할 때도 있다. 그 모든 한 방 한 방들이 모여, 나는 제법 맷집이 생긴 적당히 부푼 머랭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딱 내가 견딜 수 있을만한, 꼭 필요했던 한 방들이었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덜 괴롭다.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고, 프레임을 바꾸어보면 지나가는 개미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지 않은가.
혹시 지금 내 인생에 쏟아지는 한 방을 연속타로 맞고 있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카스테라 하나를 사서 맛있게 먹으며, 카스테라가 견뎌낸 6,000번의 타격을 기억하며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힘을 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