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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Dec 08. 2019

사랑하며 살아갈 용기

<날씨의 아이(2019)> 후기

영화를 보고 나선 순간,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습니다. 막상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한 편의 글로 엮어낼 자신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럴싸하게 말하고 싶은데, 욕심이 큰만큼 표현은 자꾸 궁색해지고…….


파편처럼 나뉜 감상이지만 이대로 시간만 보내느니, 올리기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부랴부랴 써놓았던 글을 마무리합니다. 작품 전체에 대해 통일감 있는 글을 쓰고 싶었으나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만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키워드 위주로 나열한 글이나마 올려봅니다.


※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비가 오는 도시에서 사랑을 말하다

저는 이번 작품 <날씨의 아이>가 감독의 전작인 <너의 이름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어떤 분은 이번 작품 또한 <너의 이름은>의 연장에 불과하고 그리 달라진 게 없다고 평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만, 저는 어느 정도 유사한 측면은 있되, 훨씬 더 메시지가 정제되었으며 이야기로서 더욱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날씨의 아이>를 통해 신카이 마코토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사랑입니다. 신카이 마코토 본인이 지금껏 살아오며 느낀 것들이 있을 겁니다.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축약해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번 작품에서 그가 전달하고 싶었던 건 다름 아닌 '사랑'으로 보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노골적으로 엿보이더군요. 다소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어, 본격적으로 작품에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감상에 영향을 줬던 책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과학과 철학, 두 영역을 하나의 사유로 엮어낸 <플라톤과 미생물이 만났을 때>이라는 책입니다.


영화와 그다지 상관은 없는 내용이지만 꽤 재미있습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저자가 두 명이며, 각각 철학자와 물리학자입니다. 책의 내용도 흥미로우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여기서는 책의 내용 중 일부만 인용할 텐데, 바로 책의 말미에 소개된 유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에 대한 일화입니다.


책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리처드 파인만은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받습니다. 인류가 어찌어찌 멸망한 후 세계를 재건해야 할 때, 이들을 위하여 어떤 문장을 남기겠냐는 내용이었죠.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학자답게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떤 답을 하실 것 같습니까? 저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엉뚱한 말이나 아무렇게 늘어놓을 것 같습니다. 답변이야 아무렇게나 할 수 있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상황이 온다면 우리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참고하실만한 기사 : https://newspeppermint.com/2014/03/30/rebuild-civilization-worlds-end)


그런 의미에서 리처드 파인만의 답인 '원자'는 아주 명쾌한 답변일지도 모릅니다. 만물의 기본 구성이 원자라는 것을 안다면, 얼마든지 지금과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있겠죠. 실로 물리학자다우면서도, 적절한 발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현대 과학을 가능하게 한 위대한 발견 중 하나는 '원자'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책의 저자들은 '사랑'을 남기겠다고 주장합니다. 하필 여기서도, 사랑이라니? 사랑. 으레 떠올릴 수 있듯이 단순히 연인대한 감정이 아닌, 범위와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상대를 포용하는 태도.


사물의 핵심 원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앎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까지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기에 앞서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나아가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부터 결정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닌 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삶의 태도이자,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방법론, 그리고 관점으로서의 '사랑'. 그렇게 보자면 신카이 마코토의 이번 작품 <날씨의 아이>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년과 소녀는 온종일 비가 내리는 도시 속에서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니까요.




간략한 작품의 전개

언제부턴가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좀처럼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뉴스에서도 연일 호들갑입니다. 그럼에도 도시의 풍경은 건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모리시마 호다카는 무작정 고향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도쿄로 왔지만, 도시는 낯선 데다 냉정하기까지 합니다.


직장을 구하고 싶으나 미성년자인 탓에 구해지지 없습니다. 가져왔던 돈은 다 떨어졌고, 먹을 것도 묶을 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를 피해 유흥가 건물 한쪽에서 쪼그려 잠을 청하다 봉변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우연히 총을 주웠으나, 호다카는 감히 쏠 엄두도 못 내죠. 벼랑 끝에 몰릴 대로 몰려서, 3일 내내 콘스 프로 허기만 간신히 해결할 뿐입니다. 그런 소년에게 누군가 따스한 손길을 내밉니다. 패스트푸드 가게의 점원인 소녀입니다.


소녀가 건넨 햄버거는 그 어느 때보다 맛있었고, 식사 이후 소년은 어떻게든 이 도시에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고향에서 도쿄로 오는 중, 배에서 만났던 중년의 남성 스가에게 향하기로 하지요. 스가 덕에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봉급과 더불어 머물 곳과 먹을 것을 얻었고, 함께하며 호다카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얼마 후, 호다카는 유흥업소 직원의 손에 이끌린 소녀를 보게 됩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다급히 소녀를 끌어내고, 직원들에게 쫓기게 됩니다. 끝끝내 붙잡혀 폭행을 당하던 중, 호다카는 수중에 있던 총을 사용하고야 맙니다. 다행히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자리를 벗어난 후 소녀는 호다카를 다그칩니다.


소녀의 이름은 히나. 히나는 기껏 도쿄에 왔는데 내내 비만 와서 힘들지 않았냐며, 호다카를 위로하고는, 곧 두 손을 모아 기도합니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갭니다. 그저 날씨가 맑아졌을 뿐인데, 호다카의 안에 있던 어둠도 걷힙니다.




영화의 초반부까지의 내용입니다. 나름대로 정리했으나, 직접 보시는 게 훨씬 좋을 듯하네요. 여기서부터 영화에 관한 본격적인 내용입니다.


날씨와 기분.

사람의 기분은 주관적입니다. 심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10가지 감사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 한 가지 불행한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죠. 그래야만 위기를 학습하고 생존할 수 있었던 탓에, DNA에 박혀있는 슬픈 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작해야 날씨에 따라서도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비가 오면 사냥이든 채집이든 허탕을 쳤던 수렵민으로서의 과거가 기억나는 게 아닐까요?


물론 비가 오는 날씨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비가 내내 계속된다면, 괜히 해가 쨍쨍한 날이 그리워지는 게 또 사람의 생리 아니겠습니까. 또한 쾌청한 날에, 햇볕을 받으며 걸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봐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햇빛에는 신비한 힘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날씨의 아이>에서도 날씨, 그리고 비는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됩니다. 그리고 이상기후라는 또 다른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작품 내내 비 오는 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죠, 어쩐지 도시마저 우중충하게 보이는 느낌도 듭니다. 더욱이 하늘이 개이며 빛이 세상을 비추고 색을 찾아가는 묘사를 보면 도시가 껍질을 깨부수는 듯한 인상마저 받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변덕스러운 기분 문제가 아니라, 비와 해라는 서로 대립하는 날씨의 구도를 통해 인간의 마음 상태까지 드러내는 묘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아가서 이상 기후의 일종이며 과거에는 없었던 현상이죠. 기성세대는 당연하다는 듯이 '비가 오다가 개는 맑은 날씨'라는 혜택을 누려왔으나, 이는 다음 세대의 희생이 전제되어있었던 '당연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작 중에서 맑음 소녀에 대한 도시괴담은 과거로부터 전래되어 오던 전설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전설에 따르면 하늘과 인간을 잇는 매개자로서 '무녀'는 끝내 그 스스로를 희생해 지상에 평온을 가져다 준다는 게 주된 내용입니다. 이는 곧 다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온당한가하는 윤리의 문제는 물론 지금 세대의 안위를 위해 후손의 미래를 희생해도 되는가하는 문제와도 엮입니다.


히나가 희생을 결심하고, 구름 저편에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로 가버렸을 때 놀라울 정도로 맑게 개인 하늘은 영화 내내 히나의 기도로 맑게 개었던 날들과 비교하면 작위적일 만큼 '눈부신' 세계입니다. 따스한 게 아니라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강한 빛과 더위로 질식할 듯한 분위기를 선사하지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만들어진 평화에 대한 위화감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끝내 호다카가 히나를 데려오면서 세상은 다시금 빗속에 잠기고 맙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났을 때, 세상은 망하기는커녕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저 '일상의 풍경'이 바뀌었을 뿐. 전설을 알려준 노인의 말대로 고작해야 100년을 살다갈 뿐인 인간이 '정상'을 논하는 게 이상한 노릇 아닐까요? 과연 인간에게 세계의 흐름을 옳다 그르다 재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까요?


그럼에도 세상은 분명 나빠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비극'에 익숙해진 셈이니까요. 그럼에도 소년 호다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호다카는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선택했다. 자신에게 하나 뿐인 소녀 히나를 사랑하며 살아갈 것을. 세계의 운명을 한 인간의 희생으로 바꾼다한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해야할 의무도 없습니다. 오롯이 그들의 앞에 펼쳐질 인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 없는 시대의 어른과 아이.

스가와 호다카를 비롯해, 어른과 아이의 대비 또한 인상적입니다. 작품에 등자하는 어른은 그다지 어른답지 못하고, 그에 반해 아이들은 너무 성숙합니다. 어른과 아이를 가르는 기준은 '책임을 질 수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아이는 자신의 목숨 하나 책임지지 못합니다. 인간이 여타의 동물과 다른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진화를 거듭하며, 쌓아온 결과물인 동시에 현대 사회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밑에서 오래도록 양육과 보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회와 문화 역시도 무수히 많은 '어른'들이 쌓아온 결과물이겠죠.


요즘 시대에 아이가 어른의 품을 벗어나고자 선택하는 '가출'은 사회적으로 용납받지 못하는데, 작품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온전한 독립이나 자립은 환상에 불가하겠으나, 그것들이 더더욱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음 또한 알아야 합니다. 호다카가 어째서 집을 떠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모종의 이유로 집을 떠난 그에게는 '빛'을 향한 선망과 동경이 있었지요.


'빛'. 그것은 아마 사랑으로 치환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따스한 빛 아래에 서있을 때, 나를 감싸고 있는 이 공간의 온기는 물론이요 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본디 아이는 부모에게 그러한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호다카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부모와 아무 상의도 없이 고향이었던 섬을 떠나 도쿄로 향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됴코는 비로 가득찼고, 빛 비슷한 것도 찾을 수도 없습니다. 그 순간 호다카는 히나를 만나고 또한 맑게 갠 하늘의 고마움과 빛의 따스한 충족감을 느낍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히나의 능력이 어머니의 죽음 후에 개화한 것이라는 겁니다. 부모로부터 더이상 사랑받을 수 없게 된 히나가 누군가에게 내어줄 빛-사랑을 품게 된 건 이별과 죽음에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이유처럼 보입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야 밝혀지지만, 히나는 부모님을 여의고 남동생과 단둘이 살고 있는 미성년자였습니다. 호다카보다 어린 히나가 꿋꿋하게 삶의 의지를 이어온 바탕에는 적어도 세상에 대한 불평이나 분노가 아닌 사랑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렇기에 동생인 나기도 나이와 상관없이 성숙한 모습을 가질 수 있었겠죠.


'어른'이 만들어놓은 사회는 아이들의 독립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사정을 무시한 채로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살아갈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지 않음에도, 비정상으로 규정되고 다른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닌 정상 사회로의 복귀만을 종용받습니다.


또한 호다카는 작품 초반에 우연히 습득한 총 때문에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전개 역시 총기에 관한 문제를 일으킨 '어른'들의 사정인데도, 여기에 관한 규명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온전히 호다카의 잘못이 되고 맙니다.


작품 내에서 유일하다시피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인물은 스가 케이스케와 나츠미, 두 사람입니다. 돈은 떨어지고 오갈데 없던 호다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추후 불가피한 사정으로 호다카를 내치지만, 그 와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책임은 끝까지 다합니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오토바이로 최대한 먼 곳까지 호다카를 데려다준다거나, 히나를 구하려는 호다카를 붙잡으려다가 놓아주는 것도, 그러한 연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건 아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많은 걸 할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겠지요.



도대체 어른은 아이에게 어떤 존재여야할까요? 그 단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책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의 작품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그저 아이들이 떨어질 것 같을 때 붙잡아두는 정도, 딱 그정도'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른은 아이의 미래나 삶을 좌지우지할 권리도 그럴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저 정말 최악이나 최후, 도저히 아이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따스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아니, 그것이 '의무'입니다.


<날씨의 아이>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어른은 케이스케와 나츠미 뿐이다. 어른들은 시스템을 위해서 일할 뿐입니다. 경찰이나 형사, 아동보호 관리사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작품 중반, 스가 케이스케의 장모가 '요즘 아이들은 계절도 제대로 즐기지 못해 불쌍하다'고 하는 말은 너무나 이상하게 들립니다. 다름 아닌 그 '시대'를 만든 것은 바로 당신들인데 말이죠. 여기서 날씨에 대한 사유를 또 다시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상 기후와, '미래'

교과서와 언론에서 떠들던 이상 기후는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기후 변화가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인류를 파국으로 이끌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당장의 편리를 위해 다가올 비극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저 끝이 절벽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달리고 있는 셈이죠. 그 누구보다 이 상황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마 '그 순간'을 살아나가야할 이들, 어린이들일 겁니다. 설령 어린이들이 그 문제를 알아도, 그들에게는 목소리도 힘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온전히 어른의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고,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멀었으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목소리'와 '힘'이 생기니까요. 그러나 아이들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여 세계를 끝내는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http://imnews.imbc.com/news/2019/world/article/5633901_24712.html?menuid=world


호다카가 히나를 구하면서 세상에 비만 내려도 좋다고 부르짖는 결기도 그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생명과 미래를 담보로 해야하는 세계라면, 차라리 망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이어나가기 위해서 미래까지 먹어치워야 하는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미 괴물일 겁니다.




인간과 세계

결국 인간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세계를 이해하고 있을까요. 물론 <날씨의 아이>에서 쓰이는 소재와 설정은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됩니다. 이는 단순하게 '비과학적이다'는 푸념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작품의 논리마저 의심하게 합니다.


구름 위에 있다는 세계나, 일본에 한정된 국지적인 이상기후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 지구에서 특정 지역만 주구장창 비가 내린다면 어딘가는 분명 비가 한 방울도 내릴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애초에 비만 내릴 수도 없을 겁니다.


맞습니다. 말이 안 되죠! 하지만 지나치게 설정의 정합성을 지적하는 건 작품 감상의 태도로 썩 훌륭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견 무리하게 보이는 설정의 이면에 잠재된 메시지를 읽어내는 차라리 나아보입니다. 그러한 말도 되고 비상식적인 설정이야말로 신카이 마코토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인 거죠.


인류 문명이 지금껏 세계의 운행원리는 물론 숨겨진 사실까지도 밝혀온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여전히 인간이 어째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나아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아마 과학의 영역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언뜻 보기에는 불합리하지만 영화의 설정은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세계와 인간, 삶의 불가사의함 그 자체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러한 불가사의함마저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해왔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설정인 하늘과 인간을 매개했다는 무녀도 그렇죠.


인간은 그 자신과 세계, 둘의 관계에 의미룰 부여하면서 비로소 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는 물론이고 삶의 균형을 잡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균형은 어느 순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의미를 규정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워졌죠. 과거에는 신과 종교가 그 역할을 담당했으나, 지금은 믿는 이에게만 유효합니다. 과학이나 기술은 점차 발전하는데, 인간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답을 내주지는 못합니다.


신카이 마코토는 <날씨의 아이>를 통해 인간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어른이 만들어놓은 세계는 언젠가 기능을 멈출 겁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니 인간은 그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관과 절망에 짓눌릴 것이 아니라 누군가 사랑하고 살아갈 선택에 대한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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