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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Jun 28. 2022

31살의 크로스핏 대회 도전기

K Box Rise 2022 후기

1.

31살, 올해로 만 4년 차 크로스핏터. 연차로만 보면 운동에 진심인 사람처럼 보이는 데다,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민망하지만 나는 겉으로나 실제로나 운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물며 대회에 나간다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전국의 크로스핏 박스들이 모이는 K Box Rise에 나가게 될 줄이야.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도 쉽사리 믿기지 않는 노릇이다.

2.

5월 초, 크로스핏 수업이 끝난 후 코치 님이 던지신 한 마디가 그 시작이었다.


"너도 이번 케박라 참여할 거다."


갑작스레 날아든 통보(?)에 당황스러운 기분도 잠시, 책임감과 걱정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케박라(K Box Rise), 2019년에 시작되어 대한민국 곳곳의 박스들이 참여하는 그야말로 크로스핏 전국 대회라 할만한 자리. 여느 소년만화의 배경에 어울릴 것 같은 '전국 대회'라는 단어에서 오는 그 프레셔는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어느새 내가 그런 대회에 참여할 정도의 실력은 갖췄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서 기분이 좋다가도, 그만한 실력이 실제로 있기는 한 건지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과는 정반대로, 곧장 "예, 알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어찌나 낯설던지. 예전 같았으면 무척 난감해하면서 빼느라 바빴을 텐데.


그렇게 케박라 예선을 통과하기 위한 5월 9일부터 5월 23일간, 약 3주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팀원은 총 6명을 매니저 1명과 코치님 2명, 나를 포함해 회원 3명으로 구성되었다. 모두들 크로스핏을 오래 하기도 하셨고, 실력도 좋은 분들이라 민폐만 끼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3주간 총 4개의 와드(wod)가 주어졌고, 이 중 2개 와드는 6명 모두가 함께, 나머지 2개는 3명이 1팀을 이루어 수행했다. 버피와 줄넘기라는 2개 동작으로 이루어진 1번 와드조차 만만치 않았다. 기록을 단 1초라도 줄이기 위해 팀원 모두가 촉박한 일정 속에서 무려 5번이나 측정을 했다.


3명으로 쪼개져 수행한 와드들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어서, 지금껏 크로스핏을 해오면서 짧은 시간 안에 머슬업을 그렇게 많이 해본 건 처음이었을 것이다. 7분 동안 머슬업을 48개나 할 수 있을 줄이야.


마지막 예선 와드였던 Mental Game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말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뜩이나 힘든 쓰러스터를 다른 이들과 함께 동시에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니. 거기다 떨어뜨리는 순간 지금까지 수행한 횟수에서 10개씩 차감이 되는 규칙이 있어서, 나 하나 때문에 형편없는 기록이 될까 두려워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모든 예선 와드를 마쳤을 때, 놀라운 기록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180여 팀 중에서 10위로 예선을 통과한 것이었다. 특출나게 어느 종목을 잘 하지는 않았지만 평균적으로 고른 순위를 차지한 덕분이 아니었을지. 결과적인 분석이야 그렇다쳐도 믿기지 않았다.


본선에 진출하는 50개 팀에 들기만 해도 감사했을 텐데, 기대 이상의 순위에 걱정도 커졌다. 과연 본선에서도 이만큼 잘할 수 있을까?




3.

예상외의 결과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본선 와드가 공개되고, 본선까지는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 다시 한번 팀원들끼리 시간을 맞추고 본선 와드를 준비했다.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목봉 체조 동작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막상 연습을 해보니 크게 무겁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큰 착각을 했던 셈이지만, 여하튼 연습 자체는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정확히 말한다면 여기서 갑자기 더 잘 해질 수는 없으니 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였다.


마침내 다가온 6월 18일, 본선. 강원도 정선의 하이원 리조트에서 진행되었다. 대회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선수들이 모이고 있었다. 어찌나 덩치들이 크던지 나랑 다른 운동을 하고 있나, 내가 운동을 잘못했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였지만, 어디까지나 대회는 대회.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차례를 기다렸다. 예선에서 10등을 한 덕분에(?) 우리 팀의 순번은 꽤 뒤쪽이어서, 먼저 이벤트에 참여한 조들의 면면을 확인했는데 만만치 않아 보였다. 특히 웜은 워밍업을 위해 들어봤는데, 연습 때 들었던 그 무게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거워서 깜짝 놀랐다.


이미 이때부터 당황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목봉 체조가 포함된 첫 번째 와드는, 나의 실수로 다른 조에 비해 턱없이 느린 시간에 끝이 났다. worm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자꾸 뒤로 밀려서 선을 넘은 데다, 무릎까지 제대로 다 펴지 않아서 rep으로 판정이 되지 않은 개수가 상당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무턱대고 와드를 하고 있었으니.  

코치 님이 네 탓이 아니라고, 오프라인 대회가 처음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속상한 건 별 수 없었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에 기록이 엄청나게 밀렸으니. 그나마 연습 때보다 기록이 줄기는 했지만 다름 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두 번째 이벤트에 참여한 두 분이 분전해줬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컸다. 자책과 별개로 다른 박스들의 실력도 대단했기에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해결될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에는 허탈함이 앞섰다. 조금만 더 잘할걸. 멘탈 잡아볼걸. 후회는 항상 늦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마지막 와드만큼은 연습에서 했던 그대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로잉도 1분 50초쯤에 끝냈고, 핸드 스탠드 워크도 한 번 넘어지기는 했어도 무사히 완주했다. 머슬업을 하나만 더 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했다.


3번째 이벤트를 끝으로 케박라 본선이 끝났다. 우리 박스는 전체 48개 팀 중에서 26위로 마무리했다. 예선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끝내고 보니 여러모로 후련했다. 깨달은 것도 많았고, 내가 왜 크로스핏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4.

운동과 관련된 대회라고 하면 좋은 기억들이 딱히 없다. 기본적으로 '들러리'의 입장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으니 좋을 수가 없었다. 선수로 참여한 적도 딱 한 번뿐이었다. 10년도 더 옛날인 중학교 때, 얼떨결에 달리기 계주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수로 발탁된 이유도 기가 막혔다. 당시의 나는 몇몇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들은 걸핏하면 가만히 있던 나를 툭 치고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나는 그걸 잡아보겠다고 진심으로 쫓아갔는데, 이걸 보고서는 달리기를 잘하겠다고 계주 선수로 뽑아놓은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누군가 장난으로 도망치는 걸 붙잡으러 가는 정도의 속도로는 각 반에서 잘 뛰는 걸로 소문이 난 이들을 잡을 도리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계주에서 입상을 하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의 대회에서 느꼈던 '들러리'로서의 입장보다 훨씬 더 비참한 기분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K Box rise 2022는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규모나 실력의 의미도 아니고, 나이를 더 먹었기 때문도 아니다. 참여자로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비교할 게 되지 못한다. 온전히 내 의지로 결정한 일이 아니었다는 건 비슷할지는 몰라도, 팀의 일원으로 대회에 참가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5.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은 말한다.


어째서 크로스핏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운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운동 신경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다. 운동을 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왜 하필 괴롭고 힘든 크로스핏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크로스핏을 3년 가까이하고 있다.


가끔 크로스핏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기는 한다. 처음엔 달라지고 싶어서였다. 일단 운동을 하고 몸을 움직이면 뭐라도 달라지겠지 싶었다. 실제로 크로스핏을 시작하고 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단순히 몸이 좋아진 것과 건강해진 것을 넘어서 정신적인 부분도 한 발자국 성장한 느낌이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해야 할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모르겠다. 이번 대회에서도 부족한 부분들을 절실하게 느꼈다. 우선 몸을 좀 더 키워야겠는데 그러려면 식단도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챙겨야 하고, 스트렝스도 해야겠더라. 특히 스트렝스는 벌써 1년째 말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절실하게 필요성을 실감했다. 그리고 더 겸손해져야겠더라. 자만하지 말고 꾸준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조금씩이라도 더 늘어있을 테니까.


물론 남들이 내 기록을 앞지르거나, 나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들에게 뒤처질 때는 조바심이 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운동을 지속하는 이유가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사람을 경쟁상대로 생각하면 지칠 뿐이다. 그저 어제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기록이 아니라 사소한 부분이라도 좋으니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목표 외에도 크로스핏을 통해 인간관계의 소중한 점들을 더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운동을 잘한들, 혼자서 3년을 했다고 대회를 나갈 일이 있었을까? 물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으나,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이 아니었다면, 지금 다니고 있는 크로스핏리스펙이라는 박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모든 분들께 감사했다. 보여지는 글이다보니, 함께 해주신 분들의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적을 수 없어서 못내 아쉬울 뿐이다. 이렇게라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선 와드 연습 때문에 어깨 상태가 안 좋아지셨는데도 대회 당일 멋지게 끝내주신 Koo 매니저님과, 참여를 제안해주셨고 모든 이벤트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아주셨던, 그리고 항상 최선을 다해서 모범이 되주셨던 Adam 코치님. 좋지 않은 몸 상태에도 와드를 하는 순간만큼은 최고조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주셨던 Stella 코치님. 나이로는 팀에서 막내지만 운동을 하는 순간에는 든든하게 제 역할 그 이상을 해준 형민이. 목봉 체조나 런지 같이 무거운 무게를 소화해야해서 쉽지 않으셨을텐데도 잘 수행해주셨던 소현 회원님. 그리고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정선까지 먼걸음해주신 박스 회원 님들과 사랑하는 여자친구 지영이까지.


K Box Rise 2022는 내 인생에서 여러모로 의미있게 기억될 순간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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