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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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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Dec 21. 2021

너의 생일을 기념하며

후추일기 스물아홉 번째


얼마 전, 후추의 생일파티를 했다.


후추가 가는 동물병원이나 후추 물품을 구입하는 쇼핑몰에 내 마음대로 입력해둔 날짜가 다가온 것이다. 내 마음대로라고 했는데 이 날짜라는 것이 조금 웃긴다. 후추 입양을 한참 고민하던 때, 이 작은 아기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12월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의미 붙이기 좋아하는 나는 대번에 ‘아, 역시 우리 가족이 될 아이다!’ 했었다. 아니, 내가 결혼한 지 꼭 10년 되던 때 후추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운명 같지 않은가. 그럼, 당연히 운명이지. 그래서 그때부터 후추가 가족이 되면 그 날짜를 생일로 줘야지, 생각했던 것이다.


예전 같으면 그 날짜에 남편과 둘이 갈 식당을 알아보았겠지만, 작년부터 이어진 코로나19로 그것도 포기한 지 오래. 자칫 심심과 서운만 들어찼을 날인데 못하는 것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바쁘게 기념할 날이 되다니. 이게 다 후추 덕분이다. 나는 지치지도 않고 연신 감탄하며 '후추 생일 주간'을 흥얼거리면서 보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추의 생일 케이크. 강아지가 먹을 수 있는 예쁜 케이크를 만드는 곳들을 조사하고, 그 중 마음에 드는 한 곳을 정해 디자인과 배송 일정을 문의하고, 케이크에 새길 문구를 정해서 후추의 사진과 함께 보내고(강아지 얼굴도 케이크에 귀엽게 그려 넣어주는 멋진 곳이었다!), 입금까지 완료하니 후추 생일날이 더욱 기다려졌다. 내 평생 강아지 케이크를 주문 제작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 일련의 과정들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어쩜, 그 즈음은 케이크를 생각만 해도 배시시 웃음이 나오곤 했다.

 

이어 가족들을 초대했다. 후추가 얼마나 복덩이냐면, 나의 엄마도 나의 동생도 아닌 무려 남편의 엄마(H) 남편의 동생(S) 완전히 후추의 팬이다. 특히 H님은 후추가 우리 가족이  순간부터 누구보다 기뻐하고, 후추와 자주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고, 그래서 때로는 하루 이틀 후추를 기꺼이 맡아주기도 하고, 그럴  먹이려고 비싼 간식도 준비해두고, 그러다 우리집에 후추를 돌려보내면 "후추가 너무 그리워"라고 말하는 분이다. 후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H님과 . 우리는 후추 사진을 보내고()  사진을 받아 보며 감탄하는(H) 메신저 대화를 하기에 이르렀다.(1:1 대화라니, 당연히  전에는 상상도  했던 일인데!) 그러니 후추 생일파티에 초대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H님과 S님이었다. "후추 생일 선물을  해야 하나?"라며 한참 고민하던  사람이 후추의 꼬깔모자를 사온 것이 대폭소 포인트였던 것은 물론이.(새로운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나는 후추는 지극히 예측가능한 반응을 보여 모자를 착용하는 데는 실패했다)


12월 11일. 후추 생일상에는 날짜에 맞춰 무사히 도착한 깜찍한 케이크와 후추가 좋아하는 간식들을 소담하게 한 접시 올려두었다. 이어 아마도 세상에서 후추를 가장 사랑할 사람 네 명이 모였고, 우리는 후추를 가운데 앉히고 쪼르르 둘러 앉아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영문 모르는 후추가 자꾸 생일상을 벗어나는 바람에 간신히 사진 몇 장을 건졌을 뿐이지만 덕분에 12월 11일이라는 날짜는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빨간실이라면 우리는 이 날짜, 이 순간에 엮여 있었을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 날이 나의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이 기뻤다. 부연하자면, 내가 특별히 이 날에 의미두는 데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닌 '내가 선택한 가족'과 살겠다고 세상에 알린 날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주어진 것, 바꿀 수 없는 것, 선택지가 없는 것.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성인이 됐으니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고 살고 싶었다. 원가족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훨씬 소중했기 때문이랄까. 나는 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와 수평적인 소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살고 싶었다.(누구나 그런 사람과 법적인 가족이 되는 데 큰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차별금지법부터 제정합시다...!) 다행스럽게도 행운처럼 그런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 가족을 만들었으니 말하자면 그 날은 내게 생일처럼 특별한 날이다.


내가 '내가 선택한 가족'을 만든 날이 된 지 꼭 10년이 되는 즈음에, 앞으로 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생명이 세상 어딘가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어도 내게는)기적같다. 그래서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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