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4장 - 5장
창의성이란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창의성을 '보고 대답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우리가 날마다 보고 대답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장미를 보고, '장미네!'라고 반응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어떤 대상을 감각한 후 올바른 단어로 분류하는 것이다. 내가 본 하나의 장미가 일반적인 장미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지만, 그 하나의 장미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구체성을 보면 재빨리 추상으로 넘겨버린다. 더 나쁘게는 자기 자신을 투영하거나 대상을 왜곡한다.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투영과 왜곡 없이 그것 자체를 온전하게 본다는 것이다. 온전히 보아야 알맞게 응답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응답은 순전히 지성적인 반응에서 그친다. 신문에서 기아를 다룬 기사를 보면 가엾다고 생각하겠지만, 눈앞에서 그 참혹한 고통의 광경을 본다면 온몸으로 아파할 것이다. 돕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것이며, 그 충동을 따를 것이다. 온몸으로 보고 온 힘으로 응답할 때, 대상은 더 이상 대상이기를 멈추고 나는 더 이상 관찰자나 재판관이기를 멈춘다. 둘은 하나가 되어 완벽한 관계를 맺는다.
창의성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나 예술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도달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자세다.
참혹한 일이라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맞서는 행동을 하거나 연대하지는 않는다. 폭력과 착취에 대해, 전쟁에 대해, 공장식 축산에 대해, 환경 파괴에 대해, 차별에 대해 그렇다. 나는 그것을 알지만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대상이 더 이상 대상이지 않은 관계. 이런 개념을 종종 접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깔을 상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기와 부모의 관계가 이렇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오랜 친구가 자신의 아기를 보는 눈빛이,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처음 보는 눈빛이어서 순간 멈칫한 적이 있다. 이런 관계 맺음이 부모-자녀가 아니어도 가능할까?
첫 번째는 감탄하는 능력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너무나 당연한 것도 궁금해하고, 문제로 제기하고, 작업거리로 삼아야 한다.
두 번째는 집중력이다. 우리는 여러 일을 동시에 하지만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이미 마음속으로는 다음 일을 생각한다. 진정한 인식과 응답은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만 전념해야 한다.
세 번째는 자기를 경험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요구된 감정을 스스로 느낀다고 믿는다. 듣거나 읽거나 배운 것을 스스로 생각해냈다고 착각한다. 자기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주인으로 경험하는 것이 독창성이다.
네 번째는 갈등과 긴장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갈등은 흔히 우리가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의 원천이다. 갈등을 피하면 어떤 격정이든 금방 가라앉고 모든 욕망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감정이 얕아지는 기계가 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갈등을 회피하고, 양극성이 불러오는 긴장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다섯 번째는 매일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인생의 전 과정을 출생으로 보며 인생의 어떤 단계도 최종 단계로 보지 않는다. 안전을 버릴 용기, 타인과 다를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놀랍게도 인간이 자기 생명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일 때가 많다. 환자가 의사의 조언에 냉담하게 반응하며 저항하는 것, 전 세계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에 무관심한 것, 재난을 몰고 올 환경 파괴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그 이유는 다양하고 복합적인데, 먼저 우리가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인하며 불멸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믿지 않고, 따라서 행동으로 죽음의 위험을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기주의도 한몫을 한다. 타인의 죽음은 운이 나쁜 것일 뿐,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세대를 향해서는 "나 죽은 뒤에야 어찌 되건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한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는 불멸의 착각과 손을 잡고 죽음을 저지하기 위한 행동을 막는다.
자기 삶에 불만족하기 때문에 그 삶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크다 보니 그 가능성마저 터부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기 삶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큰 것은 논리적인 모순 같지만, 살고 싶은 것과 죽음이 두려운 것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해도 기쁘고 즐겁게 살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 기쁨도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진정으로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 친구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려웠는데, 더 정확하게는 죽음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신체적 고통이 두려웠다. 신체적 고통이 없는 죽음이라면 그리 무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이유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나의 존재가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 자체가 두렵다고 했다.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마저 죽고 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두렵다고 했다. 나는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게 왜 두려운 것인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삶을 더욱 알차게 살아내려는 그의 노력을 존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