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라면 새싹만 돋아도 장미
만 권의 책과 만리의 길
나는 택시 타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서서 가거나 다른 사람과 몸을 부딪히는 일이 생기는 경우도 싫고.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나는 택시를 탄다. 매주 목요일마다 정신과에 가기 때문에, 일주일에 최소 두번은 택시를 타는 셈이다. 누군가는 그 정도로 돈이 남아 도냐고 하겠지만, 나는 다른 곳에서 지출을 줄이고 택시 타는 것을 선택하는 인간이다. 너무 게을러 보이나?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택시기사님과 스몰 토크를 하는 게 재밌어졌다.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택시 기사가 있기 때문에, 나와 정치 성향이 너무 맞지 않거나(...) 가는 길이 너무 길고 차가 막힌다며 욕을 하거나(...) 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숏컷을 했을 때는 진짜 여자가 맞냐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기사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그냥 조용히 이어폰을 낀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택시 기사님과 얘기를 하는 편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택시 기사님이 하는 얘기에 맞장구만 쳐주면 된다. 보통 그렇게 먼저 말을 하기 시작하는 택시 기사님은 높은 확률로 오랜 시간 심심해서 그러실 확률이 높으므로, 내가 "아, 정말요?"나 "와, 진짜요?" 정도만 물어도 신나서 얘기하기 시작한다. 여기가 원래 낮은 산이었는데, 산 밑으로 홍수가 나서 산을 없애버렸어요. 아, 진짜요? 언제요? 몇년 안됐어요, 그때 난리도 아니었지. 아, 여기가 원래 산이 있었구나, 신기하네요. 이런 식이다. 택시 기사님은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고,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것저것 주워듣게 되니 윈윈이다. 하지만 그 이런저런 이야기라는 건 하루만에 잊혀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택시를 탈 때 즐거웠으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 택시 기사님들이 있다.
그 기사님은 2023년 11월 11일에 만났다. 이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날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드릴 히든 용돈 꽃 박스를 가지고 나는 케이크를 픽업하러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님은 오늘따라 차가 많이 막힌다며 궁시렁거렸다('이어폰을 껴야 할 때인가?') 오늘이 빼빼로데이라서 그런가봐요, 내가 대답했더니 기사님은 아가씨가 가지고 탄 것도 빼빼로데이 선물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이건 부모님 결혼기념일 선물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기사님은 갑자기 내 호구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다보니 내가 글을 쓴다는 얘기가 나왔고, 기사님은 다시 직업은 가지고 있는지, 부모님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는지를 물었다. 나는 회사원이라고 했고,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내게 재능이 있는 것 같냐고 묻기에, 애초에 재능이라는 걸 믿지 않는 나는 열심히 해서 소설을 잘 쓴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고, 하지만 아직 등단은 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요즘은 예술을 하는 것이 그나마 수월한 때라는 말을 하셨다. 옛날에는 나라가 어렵고 모든 집이 어려웠기 때문에 예술은 그저 재능의 영역이고, 예술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재능이 없으면 그만둬야 했다는 것이다. 기사님은 미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건축 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전 아가씨가 부러워요. 누군가가 아가씨를 부러워한다는 생각 해본 적 없죠?"
"네, 저도 항상 다른 누군가를 부러워하느라 누가 저를 부러워한다는 생각은 못 해봤어요."
"아가씨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이미 꽃을 피운 사람들이겠죠. 아가씨는 아직 꽃이 안 피어난 거고. 근데 아가씨, 꽃이 피지 않아도 장미는 장미예요. 꽃봉오리만 있어도, 새싹만 나도 그건 장미라고. 그걸 아가씨가 알았으면 좋겠어요."
여담으로 기사님은 말을 돌려 책을 많이 읽는 편이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은 바빠서 잘 읽지 못하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많이 읽었다고 대답했다. 이태백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라고 기사님은 운을 띄웠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걸으면 성군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때 광화문을 지나고 있었고, 광화문에는 어김없이 시위대가 있었다. 기사님은 혀를 끌끌 차시며('이어폰을... 껴야 할 때인가?') 시위대를 바라보셨다. 그러더니 그 전과는 다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책을 천 권은 읽었을 것 같아요? 천 리는 걸었을 것 같아요? 빛도 안 드는 철창에 갇혀서 썩어야 하는 사람이 나라를 지휘하고 있으니 원.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아가씨,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걸어야 해요. 그러면 사람이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니까. 택시를... 그만 타라는 이야기인가? 는 농담이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케이크를 픽업하고 약속시간이 될 때까지 자리에 앉아 핫초코를 마시고 마카롱을 먹으면서 나는 기사님이 하신 얘기를 떠올렸다. 누군가는 나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말. 꽃이 피지 않아도 꽃은 꽃이라는 말. 나는 감사하다며, 너무 위로가 됐다며, 아무래도 글은 기사님이 쓰셔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기사님의 말은 내가 비록 작가가 아니더라도, 결국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건 엄청난 힘이 되었다. 그 전까지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망설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등단을 한 것도 아니고, 글 쓰는 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 대화로 확실해졌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렇게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