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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뉴 Jan 30. 2021

20대 중산층 여대생이 본 '기생충' 리뷰

봉준호 ‘기생충(2019)’

기생충은 봉준호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작품이다. 사회의 계급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 또는 현실 인식을 넘어 그 이후의 해결에 대한 희망이나 가능성이 조금도 없이 막이 내리기 때문이다.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왔을 때를 가정하는 설국열차나 인간과 동물과의 상생이 가능한 세상을 보여주는 옥자와 달리, 기생충은 어떠한 환상적인 상상력이나 스토리의 우회 없이 현실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관객에게 던진다.


그에 더해 계단을 비롯해 상승과 하강을 오가는 극단적인 이미지로,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 가학적인 대사로, 스크린 밖의 현실에서 비슷한 경험이나 고민을 했을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낸다. 그래서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봤을, 현실을 계속해서 직면해야 할 관객들을 갉아먹는다.


봉준호감독은 스크린을 현실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을 기생충에서는 어떠한 절제도 없이 보여줬기 때문에, 잔인하고 그래서 좋은 영화다.


계단 이미지라든지 복숭아 몽타주 등은 이미 전문 평론가들의 잘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그냥 내가 몇 가지 기억에 남은 것을 정리했다. 20대 중산층 여대생이라는, 사회에서의 객관적인 내 위치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조건의 누군가에겐 새로운 관점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참고로 스포가 많다.


가장 안타까운 캐릭터, 기정

가장 현실인식을 잘 하기 때문에 가장 삶에 애착이 없고, 여운이 진하게 남는 인물이다.

기정은 기택 가족 중 가장 현실적이고 상황판단이 빠른 똑똑한 인물이다. 완벽한 문서 위조가 가능한 디자인 실력은 차치하고 사람을 다룰 줄 알고 판을 이끌 줄 안다.


박사장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기정은 모든 분위기와 맥락을 자기 페이스로 가져온다. 첫 수업을 참관하려는 연교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문숙이 방해가 될 인물이란 걸 한 번에 캐치해서 대화에 끼는 것을 사전 차단하고, 그렇게 다루기 어렵다는 다송도 한 번에 제압한다. 첫 수업날 집에 가는 길에는 운전 기사 자리를 빼앗아 올 밑작업까지 완벽하다.


기생충에서 가장 허탈감이 훅 치고 들어오는 이미지였다. 홍수 속에서 아무데도 물러날 곳 없이, 할 수 있는 게 오물을 내뿜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 피는 것 뿐임을 보여주는 이 장면. 기정은 아마 이때 이미 현실에 마음을 놓은 듯 보였다.


이후 칼에 찔린 상황에서도 기택이 지혈하기 위해 상처를 누르니까, 아프기만 하다고 누르지 말라는 기정의 대사. 구태여 생을 연장하는 데 미련이 없다는 말 같아서, 너무 기정스러워서 내내 기억에 남았다.



바퀴벌레 같은 기택의 검은 발


평소에 자주 가는 역에 항상 있는 노숙인이 있다. 주변 환경을 잘 관찰하지 못하고 변화를 잘 캐치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그가 눈에 띄었던 이유는, 나와 비슷해보이는 20대 나이또래에 누가 봐도 처음 거리에 나 앉은 사람의 표정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노숙인이 된 지 얼마 안 됐기에 단정한 머리칼에 고개를 푹 숙이고 표정에 절망과 충격과 자괴감과 현실부정이 그대로 묻어있었다.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나 앉게 된 것 같은... 아마 그 때 현금이 있었다면 바로 몇 푼 뒀을 거다.

하지만 몇 달 지난 후 어느 날, 동일인이 그 자리 그대로, 그러나 그 때와 달리 머리띠로 머리를 과감하게 넘기고 어떻게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려고 애쓰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동냥하고 있었다. 마치 어디 시장에서 파는 강아지가 거둬달라고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포즈와 표정...


솔직히 그걸 보고 든 감정은 혐오감이었다. 사람다움의 마지막 선을 자기 스스로 도려내 버린, 한 존재를 목격한 기분은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비슷한 맥락으로 기생충에서는 기택이 박사장 부부의 눈을 피해 탁자 밑에서 배로 기어서 나오다가, 부부가 깨어나니까 긴장해서 멈췄을 때의 긴장한 검은 발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있다. 사람의 직립보행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발.


박사장 부부가 돌아오기 전, 기택이 탁자 밑에 숨기 전에 기택 가족이 그 탁자에서 술판을 벌일 때, 충숙이 기택은 어차피 박사장이 돌아오면 바퀴벌레처럼 숨을 거라고 말했다. 그 표현을 듣고 장난이라고는 했지만 발끈했던 기택이었다. 때문에 충숙의 비유대로 기어코 바퀴벌레의 발이 됐구나, 싶었다.


이 장면에서 느낀 것은 그 때 그 노숙인을 보고 든 혐오감과는 결이 전혀 달랐다. 사실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상황인데. 혐오감 보다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안타까움, 그리고 기택에 감정이입 되어 느끼는 모멸감.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는 함부로 그 인물을 온전히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됨을.



소외된 딸들


기정과 다혜에겐 공통점이 있다. 각자 가정의 1남 1녀 중 딸을 맡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남자 형제에 비해 소외됐다는 것.


박사장 댁 딸인 다혜의 소외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놈의 한우 채끝살 짜파구리를 엄마인 연교는 박사장이나 다송에게 권하고 둘 다 싫다니까 결국 자기가 먹는다. 다혜에게는 물어보지 않는다. 사소한 거지만 이런 식으로 평소에 쌓인 것들 때문에 다혜는 토라진다.


부모의 관심은 특이한 행동을 하는 아들 다송에게 전적으로 가 있다. 봉테일 영화답게 두 번째로 기생충을 보니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곳곳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기우에게 다혜의 과외를 맡기기로 했을 때 ‘심플한’ 연교가 홀라당 넘어간 줄 알았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것. 처음 봤을 때는 못 봤지만, 연교가 ‘인플레이션 반영해 인상’했다며 건넨 과외비는 실은 민혁의 과외비만큼 준비한 돈에서 지폐 몇 장 뺐던 것이었다.


연교는 사실 '실전은 기세야' 라는 기우의 능청에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니었고, 다혜 과외 선생님으로서 기우가 민혁 만큼 만족스럽진 않으나 이상하지는 않으니 적당히 값 낮춰서 맡기려던 게 아닐까 싶다.

기택네 딸 기정도 다혜와 마찬가지로 집안에서 관심을 많이 받는 위치는 아니었단 걸 몇 몇 장면에서 알 수 있었다. 기정이 운전기사 자리를 빼앗아올 밑작업을 한 다음날, 상징적으로 기사식당에서 식사하는 장면에서다. 연교의 짜파구리 편애 장면처럼, 아빠 기택은 고기반찬은 아들인 기우한테만 '아들 더 먹어'라면서 챙겨주는 장면이 있다.


또한, 박사장 집에서 술판을 벌일 때, 기택이 자기가 자리를 빼앗아온 운전기사 걱정을 하니, 기정이 “우리는 우리만 생각하면 돼. 아빠는 우리만 챙겨, 나만 좀 챙겨 제발 좀!”하고 소리치고 천둥번개가 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사실은 결말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송의 생일파티에서 기택은 ‘지하실 남자’ 근세의 칼에 깊숙히 찔린 기정을 지혈 하던 도중, 박사장이 근세의 냄새를 혐오하는 표정을 본 순간, 우발적으로 달려가 박사장을 찌른다.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는 기정은 근세를 처리하고 온 엄마 충숙이 마저 챙긴다.

결국 '피를 많이 흘린 기정' (마지막에 기우의 나레이션에서 정확히 이 표현으로 나온다)은 죽는다. 딸인 기정을 챙기는 것보다도 하층민으로서 연민을 느끼던, 심지어 자신의 딸을 칼로 찌른, 근세가 냄새 모욕을 당하는 것에 달려간 기택, 그리고 기정의 죽음.


계획이 없는 기택의 우발적인 판단이긴 했지만, 계획이 없는 자의 직관적인 우선순위에 죽어가는 기정은 없다.



기생충의 진짜 엔딩


사실 영화 기생충이 막이 내리는 지점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가 아니다. 영화를 본 후 생각을 털어놓고 사람들에게 반응을 '당하는 것', 그 때까지다. 같은 영화를 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위치가, 각자의 계층이 영화를 본 후의 반응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악역도 없지만 거진 모두가 파멸한 이야기에서, 개중에 어떤 지점에서 공감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현실에서 주로 겪는 문제의 수위를 자연스레 엿볼 수 있다.

박사장에 공감해서 자기 집 cctv걱정하는 사람들, 현재 가진게 많기에 그것이 박탈될 수도 있다는 데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기생충은 문제작이라기보다도 영화 '숨바꼭질'과 같은, 한 편의 스릴러 정도로 머물지 않았을까. 누군가 본인들에게 기생하고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실제로 영화 흥행 이후 보안 관련 업체 매출이 급상승 했다는 기사를 봤다. 유튜브 리뷰 중에서도 '부자들은 절대 보면 안 되는 영화'였나, 전적으로 박사장댁의 관점으로 쓰여진 제목을 본 기억이 있다.

이와 반대 극단에 있는, 단 한 번이라도 반지하에 살아봤거나 혹은 슈퍼 을의 입장에서 비슷한 모멸감을 겪어본 사람은 영화를 보는 내내 쓰라리다. 영화에서 나오는 기택의 집 장면 하나, 하나, 박사장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직접 연상되는 현실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생충은 정신적인 고문이자 돈 주고 산 고통일 거다.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차마 한 마디도 얘기도 하기 싫었다는 친구들도 여럿 봤다.

대개는 이러한 양극단의 중간 어디쯤에서 부의 상대적인 차이를 겪는, 각각이 중첩되는 경험을 한 중산층의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나도 '지하철 냄새'를 맡을 줄 아는, 때문에 지하철을 피해 주로 '택시'를 탄다는 친구를 본 적이 있다. 극 중 박사장 부부의 대사처럼, 그 친구는 지하철을 타본 지 까마득하다고 했다. 악의가 전혀 없었다는 걸 안다. 나도 그저, 저런 사람도 있구나,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확실히 생활 기반조차 다르구나, 정도로 넘겼다.


근데 생각해보니 반대로 나도 누군가에게 지나가는 말로 지하철 다른 호선은 몰라도 1호선은 정말 케케한 냄새가 나서 싫다고, 이상한 사람도 많지 않냐고, 웬만하면 피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흔하게 돌아다니는 짤 중에 1호선 비하 짤들도 있으니까. 그 와중에 나도 알게모르게 구분짓기를 하긴 했었구나, 비로소 깨달았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나랑 어떤 면에서든 나름의 공통분모가 있는 주변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 다른 것을 보고, 기생충을 다 본 후의 찝찝함과 허탈함이 한동안 현실에서도 이어졌었다.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담아내기엔 내 멘탈이 너무 유리였던 때라, 답 없는 미래나 진로가 고민이던 때라, 우울감이 꽤 길게 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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